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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29화 (29/84)

29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질래가 은우에게 어려운 과제를 제시했다. 남자의 고민도 동시에 깊어진다. 답은 없는데, 꼭 답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때 은우 눈에 응급 시에 누르라는 비상벨이 들어왔다.

“간호사 부를까?”

삑, 오답이었다. 질래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행동마저 무척 힘겨워 보이는 게 남자의 마음을 한 번 더 찢었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원장님 아니면 안 돼, 다 연락 갈 거야!”

“원장님? 그게 누군데? 누가 감시한다는 건데?”

질래는 원장님을 제외한 모든 의료진이 이미 태윤의 통제하에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은우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의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탈출.

이 병원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줄래와 태윤의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져야만,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뉴스를 통해서, 또 그들의 입을 통해서 강화그룹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에 눈먼 줄래는 윤태윤에게 회사도, 제 영혼도 모두 팔아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태윤의 손에서 강화그룹을 지키고 온전히 가질래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판단하에 권 원장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소조차 못 지켰다는 질래만의 지독한 아픔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확신은 없다. 그래서 질래는 목숨 걸고 물었다.

“너 말이야.”

은우가 질래의 눈을 부드러운 눈매로 응시했다. 그 순간, 질래는 깜짝 놀랐다. 뭐지?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은우의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꿈속에서 봤던 그 남자의 실루엣과 매우 유사했다. 그저 눈빛만 교환했을 뿐인데 말려드는 것만 같았다. 질래는 얼른 현실을 직시했다.

“내 편이야?”

질래의 물음에 은우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환자 신세긴 하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동생이었던 은우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곧바로 질래가 다음 관문을 제시했다.

“그럼 증명해봐. 내 편인 거.”

그 한 마디가, 질래에게 덫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은우가 갑자기 그녀의 환자복 단추를 하나둘 풀어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야?”

능숙한 손놀림에 당황한 그녀가 그의 손을 막아보지만 이미 새하얀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야위었음에도 펑퍼짐하게 퍼져 있는 큼지막한 두 개의 동그라미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뭐 하는 거냐니까?”

“증명하라며.”

조금만 옷이 젖혀져도 그녀의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긴박한 상황. 하지만 남자는 환자복 앞섶을 붙잡은 채 그녀의 핑크빛 비밀을 조심스레 감춰줬다.

이후 뜨거운 타액을 물감 삼아, 질래의 가슴골에 정성스레 그림을 새겨 갔다.

그뿐이었는데 여자의 환자복 양쪽으로 딱딱하게 선 몽우리가 활짝 피어올랐다. 키스마크 새기는 게 뭐라고, 질래는 매우 쪽팔렸다.

“이, 이게 무슨… 증명이야?”

말까지 더듬었다. 순간 신음이 흘러나올 뻔한 걸 겨우겨우 참아냈다.

하지만 질래의 인내심도 잠시, 제가 새긴 작품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는 남자의 한 마디가, 환자복을 스치듯 지나간 그의 손끝 하나가 그만 질래를 넉 다운시키고 말았다.

“우리 질래.”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꼴깍, 마른 침을 넘겼다. 눈앞에 이 남자 때문에 질래는 순간 질식사로 저세상에 갈 뻔했다.

“활짝 폈네, 두 송이나.”

치솟는 부끄러움에 얼굴은 홧홧해지는 건 온전히 질래의 몫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여전히 마이웨이다.

“딱 예쁘게 하트 모양이다.”

“사람 못 움직인다고 너, 이런 식으로.”

“알았어, 입혀줄게.”

게다가 쓸데없이 다정했다. 남자의 예쁜 손이 어느새 제가 풀어놓은 단추 세 개를 구멍, 구멍에 끼워 넣었다. 그 당연한 모습이 왜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이 정도면 잠시나마 사고로 혼절하고 일어난 부작용이 분명했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러더니 자꾸 네 멋대로 그럴 거야?”

“막상 밀어내지도 않았으면서.”

차라리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게 팔에 깁스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질래는 귀 끝까지 뜨겁게 타오르길래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숨결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한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저항도 못 한 게 사실이니까. 심장이 흔들려서, 죽을 것만 같아서, 사실 제 가슴에 상흔을 남기는 남자가 기분 나쁘지 않아서,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설마 첫 키스의 여운이 남아 있던 걸까. 사하라 여사 빈소에서의 짜릿했던 키스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저를 구해내라는 미션을 줬을 뿐이었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남자의 행동에 당황해버린 질래의 온몸은 어느새 열기로 가득했다.

“증명하래서 하트 새겼고, 더 보고 싶은 거 진짜로 참았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내가 언제, 너보고….”

“밑에도 섰는데. 대단한 인내심이지?”

뭐니 얘는? 어이없는 대화에 그만 실소가 터졌다. 그런데, 이 농담이 그간 겹겹이 쌓아 올린 울분을 씻어내는 듯. 뭐랄까, 잠시 제 척박한 현실에 그나마 인간미란 게 투척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준 설렘을 만끽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없다. 식사하러 간 태윤과 줄래가 그리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던 연유에서다.

“알았어, 너 믿어볼게, 그니까 나가자!”

“같이 온 사람이 있는데, 그분 설득할 시간 좀 줄래?”

같이 온 사람이 있다고? 누구길래?

질래가 다급히 은우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지금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은우가 제 가슴에 하트를 새겼다고 해서 한순간에 적군이 아군으로 돌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만 본능적인 감을 믿기로 했다.

이 벼랑 끝에서 저를 구해줄 사람은 지금 이 남자뿐이란 것을. 혹,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달리 방도가 없다. 마치 인생을 걸고 룰렛을 돌리는 기분이었다.

줄래와 태윤, 그리고 그들의 감시 속에서 움직이는 의료진 외에는 아무도 이 병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은우가 신이 배달해 준 기회라고 믿고 싶었다.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라고 보내 준 사람인 것만 같았다.

은우도 질래의 그런 혼란스러운 눈빛을 포착했다. 촉촉한 눈동자에선 끊임없이 저를 향한 의심이 맴돌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질래는 지금 위험에 처해있고, 제가 그녀를 구해줘야 한다는 확신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어지러운 눈빛이 드디어 절충선을 찾았다. 확신이 선 질래가 먼저 해답을 제시했다.

“여기 뒤쪽에, 비상 엘리베이터 있어. 중환자실이랑 연결된 비밀 통로인데 비상시 탈출할 수 있도록 1층 이랑도 연결돼 있어. 그쪽으로 누나 좀 빼줘, 길래야! 아니, 이은우랬나?”

‘누나’, ‘이은우’랬나? 이 단어들이 남자의 심장에 비수처럼 팍팍 꽂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알몸으로 체온을 나누던 운명 같은 사랑이 지금은 저를 13년 전의 동생, 혹은 장례식장을 찾아온 낯선 남자로 대하는 게 둘 관계의 현주소였기 때문이다.

남녀는 3초간 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 느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뒤죽박죽, 머릿속이 온통 북새통인 지금, 은우는 이제 여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난 육 상무에게 엄청난 제안을 해보기로 했다. 현실적으로도 질래를 옮기는데 하나 보다는 둘이 나을 것 같았다.

제 제안이 먹힐지 안 먹힐지는 차후 문제고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며 은우는 VIP 병동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는 이 병실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비상시 잠그는 보안 장치에 보란 듯이 손을 갖다 댔다. 바람대로 그 모습을 육 상무가 빠르게 포착했다.

“지금, 뭐하시려는 겁니까?”

은우가 육 상무를 몇 초간 묵묵히 바라봤다. 은우의 희고 긴 목 중간에 자리 잡은 울대뼈가 크게 한 번 요동쳤다. 마른 침을 버겁게 넘긴 후 은우는 생각했던 것을 천천히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제가, 스스로 정리해 봤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갑자기 나한테 잘해줄까? 내가 뭐라고 이렇게 깍듯할까.”

“그런데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미 육 상무의 동공은 떨고 있었다. 불안감을 감추기엔 너무 확장돼 버렸다.

“GH그룹 일가 핏줄… 저밖에 안 남은 거죠?”

“…….”

“괜찮다면 저랑 평생, 손잡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그래도 될 만한 사람인 거 같아서요, 제가.”

육 상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갈등하는가 싶더니 결심이 선 듯 이내 고개를 무게감 있게 끄덕였다.

그 역시 지금부터 어마어마한 일에 연루될 수도 있을 거란 짐작은 대충 한 것 같았다.

지금의 상황은 두 사람에게 모두 모 아니면 도, 불법 도박 같은 거였다. 다만 선택지를 집어 든 육 상무가 재빠르게 상황을 진행시켰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탈출할 겁니다. 함께요.”

무슨 감옥도 아니고 병실에서 탈출이라니. 갈수록 예상을 뛰어넘는 제안에 육 상무의 눈썹이 한두 번 크게 꿈틀댔다. 하지만 이내 그가 괜히 GH그룹의 상무가 아님을 보여줬다. 다음 일을 순시에 예측하는 게 신통했다.

“중환자실로 이어진 비밀 통로, 거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은우가 고개를 주억이자, 육 상무도 입술을 꾹 말아 문 채 수긍의 시그널을 보냈다.

은우가 병실 잠금장치를 누르려는 순간 문밖으로 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생각보다 이른 등장이었다.

은우는 얼른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밖의 대화를 엿들었다.

“손님들 도착한 건가?”

“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명이 왔다고?”

“예. 두 분이십니다.”

태윤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화면 속에 그대로 비춰졌다.

“육 상무님 말고 한 명은 누구지?”

“그게….”

그때였다.

정말 신기하게도 육 상무와 윤태윤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보안 요원도 이어폰을 통해 무슨 지시를 전달받은 듯 얼굴이 심각해졌다.

딸깍!

은우는 혼란을 틈타 바로 보안용 잠금장치 버튼을 꾹 눌렀다.

문 잠김 소리에 그 앞을 지키던 보안 요원들의 표정도 변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단한 이유는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육 상무가 한발 앞서 소리 지른 것이다.

“병원에 폭탄이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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