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백마 탄 왕자는, 있다!
식물인간?!
계산할 것도 없었다. 얼른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질래에게로 뛰어갔다.
내 사랑 그녀가 고요히 누워 있었다.
세상에, 한 달간 이렇게 지냈다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무척 수척해진 상태였다.
꼭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제길! 눈물이 쏟아졌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보지만 남자의 울부짖음을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흐흐흐흑. 질래야!!!”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침상에 엎드려 펑펑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침상을 적신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은우는 마치 그동안에 울지 못한 회한을 이곳에 다 쏟아붓는 듯했다.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흐흐흑, 보고 싶었어.”
차마 눈물범벅이 된 못난 얼굴로 그녀를 볼 수 없어서 은우가 눈물을 닦으려 고개를 들던 찰나였다.
분명, 그의 손에서 미세한 자극이 느껴졌다.
어라? 움직인 거 같은데?
은우가 질래의 새하얗게 질려 있는 마른 손을 제 손바닥에 올려 뒀다.
그 작고 가녀린 손을 마사지하며 제 목숨을 담보로 신에게 혹시 모를 기적을 구하고 있던 그때였다.
“살려….”
은우가 질래의 작은 손을 꼭 그러쥐고 말았다. 재빨리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주세… 요.”
반쯤 감다시피 한 눈, 색감을 잃은 여린 입술에서 나온 희미한 SOS.
“도와….”
질래의 구조요청이었다.
“…줘.”
***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일이다.
질래의 아버지인 강화그룹 가정만 회장과 GH그룹 이은구 사장이 제주도 사업 협약을 맺기 직전, 그러니까 테러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밤의 일이었다.
서울아신병원 VIP 병실 안에는 출장 전 딸을 찾은 가 회장이 질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눈 뜰 줄 알았건만, 식물인간이 될 처지에 놓인 코마 상태의 딸을 보며 냉철했던 그의 눈물샘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가 회장과 권 원장, 그리고 침상에 누워 있는 질래까지. 이렇게 셋만이 오롯이 병실 안의 묵직한 공기를 견뎌냈다.
“권 원장, 어떻게 우리 질래가….”
가 회장의 친구이자 주치의로 오랜 세월 친분을 쌓아온 서울아신병원 권 원장이 그의 축 처진 어깨를 토닥였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어. 실려 오자마자 저체온 치료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니까 의식만 회복된다면….”
“몸은? 괜찮은 건가?”
“왼쪽 다리랑 골반이 골절되긴 했지만 장애가 남을 여지는 적어. 제일 관건은 의식 회복 여부야.”
“다른 장애는? 뇌나 뭐….”
권 원장 입에서 바로바로 나오던 대답이 잠시 주춤해졌다. 가 회장이 절박하게 묻자 권 원장은 고심 끝에 최상의 시나리오를 냉큼 써 내려갔다.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시적인 기억 장애는 있을 수 있어. 물론 모든 건 깨어난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검사했을 땐 큰 문제는 없었어, 음! 기적을 믿어보는 수밖에.”
권 원장이 일부러 긍정적인 이야기만 쏟아내고 있다는 걸 가 회장도 눈치채고 말았다. 양손으로 급히 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을 가리려는 듯 가 회장은 마른세수로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후, 내가 믿는 건 우리 질래밖에 없어…. 왜 하필 질래일까.”
딸 앞에서 허리 숙인 아비의 손등엔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 원장의 따스한 손길이 그 눈물 위로 살며시 포개졌다.
“줄래도 좀 신경 쓰지 그래. 사람 안 쓰고 언니 지극정성으로 돌보던데, 들으면 서운해하겠어.”
그러자 가 회장이 천천히 얼굴을 가로로 저었다. 벌어진 입에선 긴 한숨도 함께 흘러나왔다.
“줄래는 아니야. 그릇이 아니라고.”
권 원장도 그 말뜻을 이해하는 듯 저도 모르게 수긍의 끄덕임을 보이고 말았다.
그때였을까.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두 남자의 주름진 이마가 동시에 들썩였다.
“결혼, 싫어….”
그토록 기다리던 딸의 목소리. 질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질래야!”
가 회장과 권 원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마치 아비의 간절한 마음이 이루어진 것처럼 질래는 절묘한 타이밍에 눈을 떴다. 그들에게는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다만 단 한 번도 태윤과의 결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던 딸의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가 회장은 불안하기만 했다.
“너 사고 소식 듣자마자 하루도 안 빠지고 오더라. 그 아인 진심 같던데.”
질래가 대화 가능한 상태인 걸 확인한 권 원장이 다른 의료진을 부르려 하자 질래가 얼른 있는 힘껏 소리쳤다.
“잠시만요.”
쇳소리처럼 갈라진 음성 속에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이내 그녀의 설명은 이랬다. 의식을 회복한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깨어난 것을 권 원장과 아버지, 저. 이렇게 셋만 아는 비밀로 해달라며 부탁해 왔다.
심지어는 약혼자 태윤에게도, 저를 돌보고 있는 동생 줄래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수액에 수면유도제를 몰래 섞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도 모르게, 뼈가 온전히 붙을 때까진 계속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식물인간 상태라고 해주세요.”
“그래, 너라면 다 생각이 있겠지. 일단 몸부터 차차 회복하자! 그거 알지? 나한테 불상사가 생기면 내 모든 지분 너한테 넘어가는 거. 그런데 자식 먼저 보낼까 봐 얼마나 걱정한 줄 아니?”
처음 보는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이었다. 저를 이토록 생각하고 있었나 싶을 만큼 염려 섞인 가 회장의 모습은 어색할 지경이었다.
아버지긴 했구나. 그게 뭐라고 마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됐다. 그러면서도 질래의 머릿속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가득했다.
“…죄송해요, 걱정 끼쳐서. 그런데 왜 저, 사고 난 거예요?”
“기억, 안 나?”
“새어머니 장례식 치르고, 와인 바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리곤… 모르겠어요.”
“그래, 사고 당시 기억, 뭐가 좋다고.”
사실, 가 회장도 왜 제 딸이 한때 가장 친했던 후배 이은철의 아들,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 그러니까 13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양아들로 지냈던 은우와 함께 사고가 난 건지,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질래의 표정을 봐서는 별 사이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을 평생 모르고 사는 게 차라리 나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게 제 딸과 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당시만 해도 가 회장과 권 원장은 앞으로 마주할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이 또한 영원한 이별을 앞둔 전주곡에 불과하단 걸 알지 못한 채, 권 원장은 다음 날 아프리카 오지로 자원봉사를 떠났다. 약 한 달간의 여정이었다.
질래의 아버지는 그사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 GH그룹 이은구 사장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문제는 권 원장 라인마저 포섭한 태윤이 오지로 떠난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친딸인 질래도, 사적으로 제일 친한 친구도 참석하지 못한 강화그룹 가 회장의 성대한 장례식은 서울아신병원에서 그렇게 밍밍하게 치러졌다.
한겨울 앙금 빠진 풀빵처럼 빈 수레는 요란했다.
그게 질래에게는 피눈물로도 씻지 못할 한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
그렇게 보름이 흘러서 질래는 현재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권 원장이 떠나기 전 손수 제조한 수액 봉지로 하루 대부분을 잠든 채로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저 주치의의 처방대로 질래는 병실에 잠든 공주처럼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동화라면 차라리 왕자님이라도 나타나 구해줄 텐데,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물론 수면유도제의 약발이 떨어질 때쯤엔 잠든 척 연기하기도 일쑤였다. 가령 태윤과 줄래가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알게 되는 거지 같은 순간도 견뎌 내야만 했다.
그나마 이 상황을 버티게 해준 건 잠들어 있는 내내 저와 사랑을 나누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의문의 남자와 꿈속에 나타나 놀아주던 추억 속 동생 이길래. 그 설레는 꿈들이 꼼짝달싹 못 하는 질래를 그나마 살게 했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된 건가?
약발이 떨어질 때쯤, 비몽사몽 한 와중에 절묘하게 길래가 아른거렸다.
“길, 래?”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그리고 울부짖는 남자의 눈물이 이불을 적신다는 걸 깨달은 후 무턱대고 그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윤태윤만 아니라면 누구의 손이든 잡고 싶었다.
그런데 시야가 선명해질수록 눈에 들어온 남자는 제가 알던 길래가 분명했다. 사하라 여사의 장례식장에 예고 없이 찾아왔던 그 남자. 제 첫 키스의 주인공인 이은우, 그가 어떻게 여기를 들어 올 수 있는 거지? 마치 동화가 현실로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백마 탄 왕자가 찾아온 것만 같았다.
“그래 나야, 길래.”
“정, 말, 온 거야?”
질래가 작은 입술로 한 자 한 자 힘겹게 내뱉을 때마다 남자의 마음이 무너졌다.
마음 같아선 그냥 들쳐 업은 채로 뛰쳐나가고 싶은데 아직 질래가 그럴 만한 몸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침대 채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몰래 나가느냐가 관건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던 난이도는 최상의 수준. 지금 저에게 주어진 미션은 방 탈출 게임 같은 가상현실이 아니었다. 고로 실패가 허락되지 않았다.
“물. 좀.”
그녀의 동그란 입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나왔다. 애타게 물을 갈구하는 그녀의 부탁대로 선반에 놓인 생수병을 열어 질래의 입가를 촉촉하게 적셔줬다. 말라 있던 입술에 그제야 생기가 차올랐다.
그 순간까지도 은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떻게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거실에 있는 육 상무는 또 어떻게 설득하지? 문제는 이 병실에 들어서기 전 태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갈 수 없다는 동의서에 사인까지 한 후였다. 말이 병문안이지 육 상무와 은우는 꼼짝없이 갇힌 셈이었다.
남자의 고민이 한없이 깊어지던 순간, 질래가 은우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었다.
“나가자, 길래야.”
“…….”
“나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