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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래요-1화 (1/84)

가질래요

1화. 가질래요?

“가질래요?”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 앞으로 새빨간 장미 한 송이가 내밀어졌다. 질래는 이 어이없는 장면에 일직선으로 굳게 다문 창백한 입술을 순시에 샐그러뜨릴 뻔했다.

“길을 잘못 드신 거 같은데, 장미는 저쪽에.”

“왜요? 산 사람한테 주면 안 되나?”

뭐지? 지금 장난하는 거야? 혹시 사하라 여사의 숨겨진 애인이라도 되나?

상념이 산을 이루고 눈물이 바다를 이룬 이 삭막한 공간은 바로 조문객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인산인해를 이룬 강화그룹, 사하라 사모의 빈소였다. 고인의 유언대로 장례식장에는 고결함의 상징인 새하얀 국화 대신 정열의 빨간 장미가 사 여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전직 여배우로서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강화그룹 가 회장의 마지막 여자이고 싶은 바람을 담은 것일까?

동남아에 가면 자동차 두 대 중 한 대는 강화그룹의 작품일 만큼, 이제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자동차 브랜드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자부심인 글로벌 기업 강화그룹. 그래서 연예인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까지 쫙 깔린 이 장례식장에서 감히 강화그룹 장녀 ‘가질래’에게 대범하게 들이대는 놈은 누구란 말인가.

그런 질래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돌연 장신의 남자가 허리를 꺾어 질래의 얼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왠지 모를 풋풋함이 스민 청량한 향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저버린 그 객기가 거슬리던 그때, 보란 듯이 질래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남자였다.

“밤새웠어요? 많이 지쳐 보이네.”

남자는 기어이 질래의 여린 손에 가시 달린 장미꽃을 꼭 쥐여 주었다.

“힘내라고. 고인 말고 당신한테 주는 내 선물.”

“…….”

질래는 알 수 없는 이 남자와의 관계로 더 이상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하에 얼른 남자가 쥐여 준 장미꽃을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인 단상 위로,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런데 이 남자, 그런 질래 옆에서 잠시 묵념 중인가 싶더니 돌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마치 질래와 잘 아는 사이인 양 또다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끄러워지는 거 원해?”

저도 모르게 질래는 작게 도리질하고 말았다. 그 미세한 동작을 확인한 남자가 마치 유가족이라도 되는 듯 커튼을 밀어낸 채 빈소 뒤에 마련된 좁디좁은 수납공간으로 질래를 끌고 갔다.

상주실도 아니고 여긴 왜? 누군데? 왜 이래? 순간 질래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어질러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곳은 수많은 인사가 가득한 사하라 여사의 빈소 아닌가. 제가 소리만 질러도 빈소 곳곳에 배치된 보안요원들이 달려와 줄 것이다. 그 계산 하에 질래는 편각에 몰려오는 두려움을 도도함으로 포장해버렸다. 좁아진 미간 양옆으로 배치된 날 선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누군데 이래요?”

“나, 모르겠어?”

그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드디어 대면하게 된 두 사람. 그는 질래보다 족히 삼십 센티미터는 더 컸다. 비율도, 얼굴도, 단 1초 만에 끝내준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해주는 훈훈한 비주얼의 남자였다. 타고난 듯 고운 피부 결이 질래보다 한참은 어리다는 게 유추될 만큼, 모성애를 자극하는 살구 같은 남자.

심장이 콩콩, 콩콩. 처음 보는 남자한테 순식간에 반할 뻔했다.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남자의 얼굴이 질래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미쳤어? 정신 차려! 아무리 장미 향이 풀풀 나는 장례식장이라고 해도 좀 생긴 놈한테 순시에 홀릴 만큼 이곳이 로맨틱한 장소는 아니잖아. 질래는 얼른 마음의 성벽부터 쌓아본다.

“좋게 말할 때, 장난 그만 치지.”

“기억 안 나? 그쪽 가슴에… 안겨도 봤는데, 서운하네.”

남자의 손이 민망하게도 정확하게 상주복 위 풍만하게 곡선을 이룬 여자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가슴?

질래는 순간 뒷골이 당겨 화내는 법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당황한 그녀의 몸에서 일어난 또 다른 반응을 남자가 포착했다는 거였다.

“뭐야? 빨개진 거야, 귀엽네.”

“…….”

“생기가 돌아, 따뜻하게 말이야.”

그러면서 제 엄지로 그녀의 붉어진 입술을 쓱, 쓰다듬었다. 질래는 그렇지 않아도 홧홧해진 얼굴이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내 남자의 따뜻한 온기가 실린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뺨 위를 포근하게 덮었다. 그게 뭐라고 이번에는 콩콩 뛰던 심장이 팔딱팔딱, 제 안에서 폭발할 기세였다.

평소 재벌 딸 한 번 찔러보겠다는 연하남들의 어설픈 접근이 종종 있긴 했었다. 그런데 이 차원이 다른 끌림은 뭘까. 이 남자, 왠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이러는 건 도가 지나쳤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매우 잘생긴 이 녀석 말이다.

그녀는 이제 조문객에 대한 예의를 벗고 강화자동차그룹의 도도하기로 소문난 가질래 상무로 돌변해 본다. 상대의 키가 큰 탓에 까치발을 들어야 해서 좀 기품 떨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이마를 꼿꼿이 세운 검지로 기분 나쁘게 탁탁 두 번, 무언의 경고문을 새기듯 건드려 줬다.

남자의 산만한 허우대에 비해 한 줌도 안 되는 가냘픈 여자라고 해서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이런 애들은 안 그러면 더 기어오를 게 빤하니까.

“내가 널 안았다고?”

“응. 잠도 같이 잤는데?”

“잤다고?”

“응.”

당혹스러웠다. 평생 남자를 사귈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건만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가 있지?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이런 사기꾼한테 질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말해봐! 내가 기억나게.”

“많이 잤는데, 벌써 기억력이 감퇴한 건가?”

“내가 치매 환자로 보여? 어린 앤 더더욱 내 취향 아니라서.”

“바꿔 취향. 이제 그럴 나이 됐어.”

피식, 장소가 부적절하긴 한데 너무 어이없어서 질래의 입에선 그만 실소가 터졌다.

그런데 이 남자,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따라 웃고 난리다. 그것도 입술을 양옆으로 쭉 찢으며 빙그레. 마치 소프트아이스크림 광고 속 모델처럼. 연하남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로 질래를 녹일 줄이야.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 미치게. 하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이게 뭐람.

견고하게 쌓아올린 질래의 방어벽이 마구마구 허물어지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풋풋한 신형 무기 앞에서 그만 백기를 들 뻔한 질래였다.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어린 남자 앞에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약점을 보이고 말다니. 아무래도 초면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 아는 사이일까? …왜?”

“왜?”

“왜, 낯설지가 않지?”

“당연한 걸 물어 뭐 해, 많이 잔 사이라니까.”

그때였다. 질래의 동생인 줄래가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언니! 질래 언니! 어디 갔지? 손님 왔는데.”

“나….”

“쉿!”

질래가 대답하려고 하자 남자가 제 길게 뻗은 검지를 그녀의 입술 위에 세로로 지그시 올렸다.

질래가 눈빛으로 왜 이러냐고 묻자 돌연 제 품 안에 그녀를 꼭 안아버렸다. 초면부터 사람 심장 터지게 만드는 재주 하난 뛰어난, 알 수 없는 이상한 남자였다.

동시에 질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그 나지막한 중저음만으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 기다리면 되지.”

“이상하다. 언니 아까 누구랑 나간 거 같았는데. 어디 갔지? 밥은?”

질래를 찾아온 문상객은 바로 그녀의 약혼자인 TY 그룹의 장남, 윤태윤 본부장이었다. 집안끼리 맺어준 관계임에도 그는 질래가 맘에 쏙 든 건지, 결혼 전부터 그녀의 남자인 양 상당히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줄래랑은 오누이처럼 지내면서도 질래한테는 늘 지독하도록 깍듯이 대하는 고마우면서도 불편한 남자, 윤태윤. 질래는 약혼자에게 오해 사기 전에 얼른 이 위험천만한 공간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해 본다.

“나가야 돼.”

마치 죄인처럼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왜?”

“그걸 질문이라고 해? 나 상주인 거 안 보여?”

“애인이야?”

“그걸 말해줄 사이야?”

“아마도?”

“네가?”

질래는 이제 저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모델 같은 남자의 옭아맴에서 벗어나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저를 가둔 그의 품을 밀고 나가려는 순간.

“가지 마.”

남자가 질래를 끌어와 제 심장 위로 그녀를 가뒀다. 쿵. 덕분에 여자의 심장이 저 멀리, 빈소 밖으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미쳤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녀석한테 들켜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이 부적절한 장소에서 느껴버린 설렘과 당황. 갑자기 시작된 이 밀당에서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질래였다.

“왜 이래?”

“사 여사 돌아가신 게 정말 슬퍼?”

“그럼 안 슬퍼?”

“응, 안 슬퍼.”

그의 대답에 질래는 마음이 까발려진 것만 같아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지? 하나도 안 슬픈 거.

그런 궁금함이 가시기도 전에 남자는 계속 그녀의 귓가를 은근하게 자극했다.

“다 알아, 옛날부터 그랬어, 누나 맘 다 알았다고.”

“누나…? 설마.”

“이제 떠올랐어?”

질래는 다시 고개를 꺾어 그의 얼굴을 조목조목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몇 주 전, 기업 이미지를 위해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동참했던 적이 있었다. 동기는 따뜻한데 실상은 한없이 차가웠던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 얼음물을 뒤집어썼던 당시의 맹렬한 싸늘함이 또다시 질래의 온몸에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질래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저를 안고 있는, 자신보다 한 30센티미터는 더 클 것 같은 훤칠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맞는 거 같아.

보다 보니 숨은그림찾기처럼, 혹은 매직아이처럼 저 연하남의 얼굴 속에서 제 가슴에 묻어 두었던, 제 품에 안겨 장난스럽게 코를 비비던 어린 남자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얼마 만이야! 왠지 모를 반가움과 벅차오름을 만끽하기도 잠시였다.

“결혼하고 싶으면, 장미꽃 들고 오라며. 허락의 의미로 사탕 준다고.”

“그, 그게 언제적… 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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