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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화 (10/184)

10화

그 무렵, 공작부인 실비아의 귀에 불쾌한 소식이 들렸다.

“아니, 내 추천장을 들려 보냈는데!”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시녀장 도나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한 거냐? 그 아이가 시침용 시녀로 분류된 것이?”

“예, 어찌 됐나 알아봤더니 그만…….”

“하, 이렇게 황당할 데가.”

실비아가 트리샤에게 추천장을 써 준 것은 국혼 후에 디아나의 시중을 들며 제 수족이자 끄나풀이 되라는 의미였다. 공작부인의 추천장이 있으니 시녀로 합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우선은 전체 시녀를 뽑은 후에, 따로 선별했다고 합니다.”

처음 시녀로 합격했을 땐 공작부인의 추천장이 유효했다. 하지만 일단 뽑힌 후에 시녀장이 시침용 시녀를 고를 때는 본인의 신분이 더 중요했다. 감히 황태자에게 평민의 천한 몸을 들이댈 수는 없으니 간신히 귀족이되, 일회용으로 사용하고 버려도 뒤탈이 없을 만큼 한미해야 했다.

“그 아이, 모친이 평민이지? 이래서 신분이 하찮은 것들은 안 된다니까.”

“어떻게 할까요?”

되묻는 도나의 목소리에 실비아가 우습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후, 한숨을 쉰 실비아는 다시 우아한 체를 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 앤 버리고, 다른 아이를 찾아봐야지.”

“네, 알아보겠습니다.”

트리샤를 일회용으로 생각하는 것은 황실의 시녀장만이 아니었다. 실비아도 시침용 시녀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루카스가 한 번 범하고 나면 버려질 패였다. 아마 디아나가 입궁할 때쯤이면 자취도 없어질 것이다.

***

며칠이 지났다. 트리샤는 자정의 종소리를 듣고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하나씩, 그 방에 서 있던 신입 시녀들이 자취를 감췄다.

트리샤는 열일곱이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이 수상한 임무엔 뭔가 비밀이 있었다. 아니, 어느 시점이 지나자 비밀도 아니게 됐다.

“어떡하지…….”

황태자 전하는 트리샤의 상상 속에서나 멋지고 완벽한 남자였지, 현실에선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방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즉, 황태자 전하에게 순결을 바치고 나면 바로 버려지는 것이다.

“뭔가 수를 내야 해…….”

트리샤는 이렇게 허무하게 황실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녀로 지내다 디아나가 들어오면 측근으로서 당당히 나설 생각이었는데, 자신이 하필 시침용 시녀가 됐다니.

최악의 경우 트리샤는 황태자와 초야를 보낸 후에 초라하고 습기 찬 집으로 돌아가 평생을 일해야 할 수도 있었다. 고작 며칠 만에 화려한 황실에 익숙해진 눈에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광경이었다.

“디아나가 있으면 다 해결될 텐데.”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디아나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어른이 되어서 거리가 생긴 것뿐이지, 둘은 친구였다. 그러니 당연히 트리샤를 도울 것이다.

고작 이런 일을 하고 버려질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는 트리샤를 위로해 줄 것이다. 디아나는 상냥하고 마음이 다정한 아이였으니까.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그러나 자정의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시종장은 트리샤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황태자 루카스의 모습이 있었다. 듣던 대로 밝은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떨리는 트리샤의 귓가에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트리샤는 배운 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트리샤는 잔뜩 언 채로 예를 올렸지만, 루카스는 그런 트리샤를 본체만체했다.

“허, 진짜 머리가 붉다니.”

지금 루카스는 트리샤의 음모도 붉을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봐라.”

트리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처럼 붉은 눈동자를 루카스가 빤히 주시하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트리샤 블랑입니다.”

“신기하게 생겼군.”

루카스가 무심히 뱉고는 제 옷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트리샤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곧 일어날 일을 막지 못하면, 자신은 이 황실에서 바로 내쳐질 것이다. 초조함에 트리샤의 입술이 바짝 탔다.

“카를가의 소개로 입궁했습니다.”

그러나 루카스는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트리샤는 쿵쾅대는 심장 소리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황태자비가 되실 디아나 영애의…….”

엉망으로 꼬인 생각에 멋대로 말이 입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순간 루카스의 손이 멈췄다.

“디아나?”

루카스의 눈빛에 욕망 대신 호기심이 찼다.

“네, 저는…… 디아나 영애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라서. 그, 그러니까.”

“허.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지?”

딱히 트리샤를 향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트리샤를 범할 생각은 없는 태도였다. 잠깐 의아한 표정을 하던 루카스는 침대 대신 의자에 앉았다.

“소꿉친구라면, 디아나 영애에 대해 잘 알겠군.”

“네, 그렇습니다.”

한 줄기의 희망이 트리샤에게 비쳤다. 아니, 트리샤가 쟁취했다.

“앉아 봐라.”

그제야 트리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줍음과 떨림이 열일곱 소녀의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루비 같은 트리샤의 눈동자 한가득 루카스가 담겼다. 듣던 것처럼 황실의 특성인 밝은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은 잠시 넋을 빼앗길 정도로 반짝였다.

“시종장, 차를 내와라. 여기…… 그러니까.”

루카스가 트리샤를 보며 눈썹을 기울였다.

“트리샤 블랑입니다.”

트리샤가 수줍게 제 이름을 다시 가르쳐 주자 루카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 영애와 티타임을 갖겠다.”

그 말에 트리샤의 가슴이 일렁였다. 루카스의 한마디에 트리샤는 일개 시침 시녀에서 영애가 됐다. 그것은 격변이었다.

“그래, 트리샤.”

황태자가 직접 제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트리샤가 몇 번이고 꿈꿨던 환상에 가까웠다. 한낱 시침이나 들고 쫓겨나는 시녀가 아닌, 황태자에게서 직접 영애라 불리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은 마법 그 자체였다.

“우리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 볼까?”

트리샤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고요한 예배당에 디아나 홀로 앉아 있었다. 신을 믿진 않았지만,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아니,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신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쉽지는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려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샬롯, 벌써…….”

대답이 없었다. 게다가 기척도 달랐다. 샬롯의 조심스러운 발소리 대신 묵직한 걸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감히 공작 영애가 있는 예배당에 쉬이 들어올 사람도 없었다. 문 앞에서 지키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곳이다. 신의 자비에도 신분을 가르는 세계인 것이다.

“저런, 누가 있었군.”

디아나가 돌아본 순간, 나직한 저음이 울렸다. 커다란 남자가 새카만 눈동자로 디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난히 건장한 체격에 먼저 시선이 갔다. 눈동자만큼 새카만 머리카락은 그다음이었다. 디아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디아나가 일어서 예를 갖추자 에드윈이 느긋하게 디아나를 봤다. 이제 가문과 이름을 고하는 것이 순서였다.

“카를가의 디아나라고 합니다.”

“아아.”

에드윈의 입술 사이로 저음이 새어 나왔다.

“그대가 소문의 황태자비로군.”

그러나 말과는 달리 새카만 시선이 집요하게 디아나에게 꽂혀 있었다.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눈부신 빛이 조각나면서 아름답게 번졌다.

그러나 그 빛은 디아나의 미모를 각인시키기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일렁이는 백금발과 눈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호수처럼 고요한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에드윈은 평생 이 광경을 잊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이 움직이며 청아한 목소리가 흘렀다. 에드윈은 잠자코 디아나를 보고만 있었다. 이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진중함이 서렸다.

에드윈은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강한 그의 얼굴선이 더 남자다운 색을 풍기며 디아나의 시선에서 도드라졌다.

“그래, 아직은 아니지.”

에드윈은 천천히 그 말을 뱉었다. 한순간도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했지만, 커다란 에드윈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차분히 그를 관찰하며 담는 것 같았다.

“우리, 만난 적이 있었나?”

잠시 침묵이 끊어졌다.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대 같은 미인을 만났다면 잊을 수 없었겠지.”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디아나는 에드윈을 만난 적 있었다. 그건 황후가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즉, 디아나 자신이 체험하진 못한 기록이다.

그나마 그 책의 내용에서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남자 에드윈 체스터였다. 그는 황태자비 후보인 디아나를 처음 본 순간 반해서 일생의 순정을 바친다.

그러나 너무도 짧은 생이었다. 대공령의 전쟁을 치르러 떠난 에드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황태자비가 된 디아나의 마음은 이미 얼어 있었다.

“날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대공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 풍모로…… 추측했습니다.”

흑발에 흑안은 흔치 않았다. 젊은 대공은 이미 제국에서 유명인사였고, 그의 외모에 대한 찬사도 퍼져 있으니 썩 괜찮은 답이었다.

“곁에 앉아도 되겠나.”

정중한 요청이었지만, 이미 에드윈의 몸은 디아나의 곁에 앉은 후였다. 약간의 거리를 두긴 했지만, 서로의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간격이다.

디아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정면을 봤다. 신을 찬미하기 위한 조각을 보며 에드윈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퍽 이상했다.

“무슨 기도를 하고 있었지?”

말수가 없기로 유명한 에드윈이었지만, 디아나에겐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이 조각조각 디아나를 비춘 순간, 에드윈은 이미 그 모습을 각인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그건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스테인드글라스만큼 다양한 색의 감정이 에드윈의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전 사실…… 신앙이 그리 깊진 않습니다.”

“우연이군. 나도 그런데.”

하지만 에드윈은 드물게 신의 존재를 느끼는 중이었다. 디아나를 처음 본 순간 그저 깨닫게 됐다. 신은 어딘가에 있으며 운명이라는 것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제 심장이 증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하고 싶군.”

하필, 그 상대가 황태자비가 될 카를가의 영애라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 세상 수많은 여인들 중에 에드윈이 유일하게 가질 수 없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것은 운명의 장난인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 정해진 인연인지 알 수 없었다.

“저도 그래요.”

디아나가 기도를 위해 손을 모았다. 가까이에서 에드윈의 매혹적인 체취와 체온이 느껴졌다. 그제야 디아나는 왜 에드윈이 원작의 디아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를 바로 이해했다. 본능적인 끌림이었다. 그와 함께였다면, 디아나는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 루카스가 아닌 에드윈과 함께였다면.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디아나는 고개를 돌려 에드윈을 응시했다. 그의 강인한 얼굴선을 보자 어쩐지 그리웠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곳은 예배당. 신의 이름 아래 만나는 모든 이는 같다고 하죠. 소망도, 비밀도…….”

에드윈이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신의 자비지. 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만난 우연까지.”

디아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부디, 황태자비가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신께 간청하던 중이었어요.”

“……뭐?”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굳어졌다. 이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에드윈은 아까부터 디아나와 황태자비가 관계없는 단어가 되길 기도하던 차였다. 너무 희망이 강해서 헛소리를 듣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절 도와줄 분을 보내 달라고 했는데, 전하가 오셨군요.”

청아한 목소리가 에드윈의 심장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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