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로사린]
1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회한이 담겼다. 창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인형처럼 아름다운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지만, 정작 디아나는 빛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고귀한 황후의 관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에겐 이제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벌써 보름이야. 전의가 이번 달부터는 다시 합궁하라더군.”
루카스가 디아나를 침대에 눕히며 무심히 말했다.
몇 달 전, 디아나는 이유 모를 하혈을 했고 전의는 그것이 극초기의 유산일 거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보름에는 황제와 황후가 합궁하는 것이 법도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지나간 유산 따위, 루카스에겐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극초기라 더 낫다니 다행이다.”
그게 제 자식을 품었던 부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곧 인형처럼 누워 있는 디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들치는 루카스의 손길이 기계적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마치면 루카스는 바로 떠날 것이다. 굳이 옷을 다 벗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 아래의 페티코트가 올라갔다. 디아나는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예부에서 당분간은 합궁 일을 늘리라던데.”
루카스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의 손이 디아나의 허벅지를 타고 들어왔다. 곧 그가 하의를 벗어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디아나의 위에 올라탔다. 그저 욕망만 묻은 손이 디아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황후는…… 어떻게 생각하지?”
옷섶을 파고드는 루카스의 손이 이내 쑥 가슴으로 들어오더니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디아나의 유두를 비틀었다.
“……읏.”
디아나가 신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 황후는 언제까지 이렇게 내외를 할 건가.”
처음엔 신혼이라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영애는 황실로 시집을 와서 초야를 치르고 수줍음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루카스의 거친 손길이 다시 한 번 유두를 세게 틀어쥐었다. 마치 디아나가 찡그리는 얼굴을 보고 싶은 것 같았다.
“하긴, 황후는 늘 그랬지.”
루카스는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태생이었다. 초야를 보낼 땐 서툴렀고, 지금은 무심했다. 후계를 위해 정해진 합궁에 여인을 위한 전희 따위는 없었다.
루카스의 손길이 디아나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음부에 닿았다. 디아나는 합궁 일이면 루카스의 명령으로 아래에 속옷을 입지 못했다. 그조차 귀찮다는 것일까. 그런 루카스의 손길이 아래의 수풀에 닿자 디아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루카스의 손은 능숙하게 수풀을 거두고 디아나의 도톰한 음부를 더듬었다. 희롱이 아닌, 제가 삽입할 곳을 찾는 몸짓이었다.
“읏.”
과정은 단순하고 빨랐다. 루카스가 디아나의 음부를 손으로 대충 쿡, 찌르더니 완전히 자세를 잡고 디아나 위에 올라탔다. 루카스의 숨결이 디아나의 뺨에 닿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곧 루카스의 물건이 디아나를 꿰뚫을 것이다.
“눈이라도 뜨지 그래? 꼭 인형이랑 하는 것 같다고.”
수치심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모멸감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가 할 수 있는 반항은 침묵뿐이었다. 허, 루카스의 냉소가 울렸다. 그것과는 별개로 루카스는 제 물건을 꺼내서 디아나의 하체에 가져다 댔다. 단단하고 뜨거운 물건이 살에 닿는 느낌은 두려움과 불쾌감 자체였다.
“좀 벌려 봐. 최소한의 협조는 해야지.”
루카스가 제 페니스를 쥔 채로 디아나의 음부를 향했다. 코앞에서 루카스의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본능적 욕정과 지배에서 오는 만족으로 가득했다. 삽입 직전, 루카스는 습관처럼 디아나의 귓가에 고개를 묻었다.
“아, 참…….”
음부의 균열을 따라 페니스를 움직이며 들어갈 구멍을 찾던 루카스가 무심히 말했다. 누가 보면 티타임이라도 가지는 것 같은 심드렁한 태도였다.
“리샤에게 후작령을 내리려고 해.”
루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애칭은 익숙했다. 그 순간 디아나의 전신이 굳었다.
처음부터 이 결혼은 셋이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리샤, 그러니까 트리샤 블랑은 친구라는 미명으로 늘 루카스의 그림자에 서 있었다.
“하긴, 그대는 세간의 일엔 별로 관심이 없지.”
젊고 총명한 제국의 황제 루카스는 손쉽게 결론 내렸다. 디아나는 눈을 떴다. 루카스의 어깨 너머로 공허한 천장이 보였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리샤에겐 특별한 날이니까, 황후로서 자리를 빛내 줘.”
본론은 이거였다. 작위를 하사받으면 황제와 황후에게 각각 문안을 올려야 한다. 그 자리는 온 귀족들이 주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황제와 황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새로운 작위의 가치가 급변했다. 그리고 루카스는 그것을 전희도 없는 관계에서 제 물건을 삽입하려는 도중 말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피가 식는 기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좀 벌려 보라니까.”
“지금, 뭘 하시는 건지 알고…… 계신 건가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디아나의 손이 루카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여린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에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디아나의 몸에서 떨어졌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디아나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때는 저런 것을 남편이라고 여기고 살았다.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도 갖추지 못한 쓰레기였다.
“뭐, 짐도 안다. 후작위를 여인에게 주는 것은 이례적이지.”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 건가. 어찌 됐든 디아나는 루카스의 유일한 황후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디아나를 그저 후계를 생산할 인형으로 보는 것이 확실했다. 적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으면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여론은 잦아들 거야. 리샤는 그럴 자격이 있고.”
디아나의 감정을 읽지 못한 루카스는 태연히 말했다. 여인으로서 후작이라는 단독 작위를 받는 것은 제국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딱히 공훈을 세운 것도 아니고 단지 황제의 보필에 힘썼다는 이유밖에 없으니 더욱 그랬다. 어찌 보면, 황제의 진짜 파트너는 트리샤라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리샤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무지한 헛소문 때문에 리샤가 힘들어하고 있어.”
리샤, 리샤…… 루카스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지겹게 같은 이름을 반복한다.
“그대도 알겠지만, 리샤는 마음이 여린 아이야.”
그런 것 따위, 디아나가 알 리 없다. 루카스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걸까. 처음부터 셋의 관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디아나는 자신의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이 트리샤 블랑과 루카스의 아름다운 우정 때문이라는 것까지.
“리샤가 여인이라는 이유로 나의 정부라는 소문이 도는 건, 용서할 수 없어.”
루카스의 눈동자에 적의가 떠올랐다. 트리샤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오랜 세월 우정을 지켜 준 고마운 친구를 정부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건 루카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자신의 품위를 무엇보다 끔찍이 여기는 황제였으니까.
“황후인 그대가 리샤를 따스하게 맞아 주는 모습을 보이면 나쁜 소문도 잦아들겠지.”
“그게…… 제게 하실 말입니까.”
“물론, 그대는 황후이자 리샤의 좋은 친구잖아.”
파르르, 디아나의 손끝이 떨렸다. 지금 이 감정을 형언할 길이 없었다. 루카스는 그런 것을 이해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자신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다.
“우리의 우정을 보여 주면 돼.”
“하…….”
무심한 루카스는 디아나의 실소를 듣지 못했다. 더 분노할 일은 없을 거라고 느꼈다. 모멸감과 수치심은 여태까지로도 충분했다. 디아나가 틀렸다. 지금 루카스는 잘도 우정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우정? 그게 그리도 끔찍한 단어였던가. 어차피 루카스가 말하는 우정에 디아나의 자리는 없었다.
“우정이라…….”
디아나가 씁쓸하게 되뇌었다. 우정이라는 것은 참 그럴싸한 핑계다. 그 우정은 무척 대단한 거라서 다 큰 성인 남녀가 둘이서만 키득이거나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쳐도 정당했다.
한 방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서슴없이 손을 잡아끌다가 서로에 대한 감정에 혼란을 겪고 이내 실수로 입술을 맞추게 돼도 괜찮을 거다. 그러다 몸을 섞을 때면, 어쩔 수 없는 합궁 일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고 열정적인 정사를 나누겠지.
트리샤는 이전에 한 번, 목덜미에 남은 붉은 정사의 흔적을 마치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나타났다. 그 목덜미를 물고 빤 것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디아나에겐 의무만을 다하는 루카스였지만, 트리샤와는 정사 그 자체의 행위를 즐겼다는 증거였다.
아무려면 어떤가. 대외적으로 트리샤 블랑은 황후의 좋은 친구이자 황제의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황제가 그렇게 공언했으니,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너무 끌었어. 오늘 합궁은 글렀군.”
루카스가 기운을 잃고 잠잠해진 제 페니스를 슥 만지더니 하의를 입었다. 그 말엔 디아나를 향한 작은 질책이 있었다. 황후로서 눈을 감고 누운 채 얌전히 다리나 벌리고 있어야 했는데, 괜한 말로 흐름을 끊었다는 것이다.
“됐어. 뭐…… 이야기 나온 김에 계속하지. 황궁에 리샤를 위한 처소를 새로 마련해 줘야겠어.”
트리샤가 궁에 없는 날이 있긴 했던가. 하지만 루카스는 지금 트리샤가 정식으로 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황후로서 디아나가 베풀어야 좋은 그림이 된다.
“리샤가 새로 지은 정원을 좋아하니 그 근처로 했으면 하는데.”
그 정원은 명목상 디아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당연히도 궁에서 가장 좋은 위치, 황후의 처소 바로 앞에 있다. 루카스는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디아나의 목소리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빼어나게 아름다웠지만, 호수처럼 고요한 푸른 눈동자는 늘 잔잔했고,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여인이었다.
디아나는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크게 즐거워하지도, 슬퍼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꽃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고아하고 품위 있는 자태는 디아나의 미모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완벽한 황후였다.
디아나는 굳이 따지자면 아름다운 정원의 식물에 가까웠다. 루카스는 마치 초목처럼 소리 없는 디아나의 무심한 평온을 좋아했다. 그 평온 속에서 토끼처럼 활달한 트리샤와 뛰어노는 것이 루카스에겐 완벽한 일상이었으니까.
“아, 잊을 뻔했군.”
루카스가 천천히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디아나는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그의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루카스 곁에 앉은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였다. 둘의 옥좌가 붙어 있으니 그때만큼은 두 명일 수 있었다. 트리샤가 후작이 되면 그조차 힘들어지겠지만.
“리샤에게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주고 싶어.”
루카스의 눈빛에서 다정함이 스며 나왔다. 물론, 눈앞의 디아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태도에 구역질을 참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다.
“황실 세공인에게 물으니 그대가 가진 루비가 가장 좋다던데, 그걸로 목걸이를 만들면 어떨까?”
그 루비는 디아나의 혼수품이었다. 그것도 디아나가 어릴 때 마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가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유품이었다. 루카스도 모를 리가 없었다.
“리샤의 붉은 눈동자엔 루비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겠죠.”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하자 루카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죽고 못 사는 리샤를 위한 것이니 퍽 기쁠 것이다. 지금, 그 미소가 얼음송곳처럼 디아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