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13화
그런 그녀의 얼굴에 숨겨진 속내를 읽으려는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아서가 곧 짧게 혀를 차더니 말했다.
“부인의 말대로, 제국의 황족으로서 감히 폐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죠.”
“네. 그렇죠.”
“……알겠습니다. 부인께서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뜻을 담은 서신을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죠.”
“네. 부탁드릴게요.”
아마도 아서는 그레이스의 참석이 못내 탐탁지 않은 듯 그녀에게 거듭 확인하며 물었다. 하지만 망설임 없는 그레이스의 대답에 아서는 결국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한숨을 내뱉은 아서는 곧 시선을 내려 여전히 그레이스의 품에 안겨 있는 레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온, 이제 그만 부인의 품에서 나오렴. 부인께서 팔이 아프시겠구나.”
“네. 저 이만 내려 주세요!”
“아, 응.”
아서의 말에 레온은 군말 없이 자신을 안은 그레이스의 팔을 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레이스는 갑자기 품에서 빠져나간 레온의 체온이 사라지자 좀 허전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팔을 문질렀다. 아서가 그 모습을 흘긋 보고는 제 곁에 와 선 레온을 향해 말했다.
“레온, 다음번에 부인을 뵈면 꼭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팔을 주물러 드리렴.”
“네, 형님.”
“그럼 난 이제 가 봐야겠구나. 레온. 너 또한 곧 롤랑 경과 함께 군사학을 배울 시간이지? 서재까지 데려다주마.”
“……군사학은 싫은데…….”
“그래도 어엿한 제국의 기사가 되려면 배워야 한다.”
아서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을 부리는 레온의 긴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그 곁에서 귀엽다는 듯 레온을 보고 있던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그럼, 나와 레온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네. 살펴 가세요. 레온, 가서 공부 열심히 해! 우리는 또 내일 보자!”
“헤헤,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아서는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레이스를 향해 인사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 또한 어색하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그 곁에서 올리버 경의 손을 잡고 있는 레온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레온이 맑게 웃으며 작은 손을 붕붕 흔들더니 앞서간 아서를 따라 총총 걸어갔다.
그레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작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서와 레온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그레이스의 곁에 서 있던 샐리가 그녀를 향해 살짝 눈짓하며 말했다.
“저희도 이제 그만 침실로 돌아가요. 이제부터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하셔야죠.”
“……응. 알았어요.”
그레이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샐리의 뒤를 따랐다.
서신에 따르면 황궁에서 열리는 성혼 파티까지는 앞으로 닷새.
조금 전 아서에게는 괜찮으니 가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정말로 참석이 결정되자 걱정과 불안으로 가슴이 뛰었다.
사실 저주도, 자신을 첫 번째 죽음으로 몰았던 가족들을 다시 본다는 것도 두려웠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두 번째 생을 ‘나답게’, ‘나로서’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
그렇게 홀로 다짐하며 그레이스는 남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 *
샐리와 함께 그레이스는 곧장 침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 시종이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은 모양인지 침실 안은 차가운 공기에 얼어 버린 손이 녹을 만큼 따뜻했다.
그레이스는 얼른 걸치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으며 창가 옆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샐리는 그레이스가 벗어 놓은 외투를 받아 들어 옷장 앞에 섰다.
그 후 외투를 옷장 안에 걸어 둔 샐리는 잠시 그 안을 살피더니 곧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를 향해 물었다.
“참!”
“응? 왜요, 샐리?”
“갖고 온 파티용 드레스는 어디 두셨어요? 저기 저 짐가방 속에 두셨나요?”
“아, 응. 맞아요. 당장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꺼내 놓지 않았어요.”
“어머, 그렇군요! 죄송해요, 제가 진작 정리해 두었어야 했는데.”
그레이스의 대답에 샐리는 반색하며 옷장 옆에 세워둔 그레이스의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 후 샐리는 그것을 열어 안에 든 드레스 한 벌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짙은 청남색에 은 단추가 달린 폭 좁은 드레스가 드러났다. 샐리는 지나치게 수수한 드레스의 모양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설마, 그동안 이걸 입고 파티에 참석하셨어요?”
“……응, 그랬어요.”
“세상에! 파티용이라기엔 너무 수수하지 않나요? 비록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저지만 적어도 드레스가 유행에 한참은 뒤처져 있다는 건 알겠네요.”
“……하하.”
샐리의 경악한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지적처럼 그 드레스는 수도의 유행에 뒤처져도 한참은 뒤처진 것이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드레스는 그녀의 어머니인 앨버튼 공작 부인이 갖고 있다가 제게 버리다시피 던져 준 것이었으니까.
‘성인식 때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옷장 구석에서 저걸 던져 줬었지.’
그레이스는 아직도 생생한 앨버튼 공작 부인의 성가시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샐리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또 실언을 했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샐리의 말대로니까요.”
그레이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샐리가 쥔 자신의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샐리는 속상하다는 얼굴로 손에 쥔 드레스와 그레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에 걸치고 있던 드레스가 귀부인답지 않게 수수해서 선한 성품만큼 검소한 분이라 일부러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것이라 그만 착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샐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진작 살펴봤어야 했어요. 이런 줄 알았다면, 오셨을 때 당장 장인부터 불렀어야 했는데.”
“역시 그 드레스를 입고 가긴 그렇겠죠?”
“죄송하지만, 네. 이 드레스를 입고 가셨다간 뒤에서 떠들기 좋아하는 귀족 부인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댈걸요.”
“……하하.”
“내일이라도 당장 장인을 불러올게요.”
이참에 드레스도 여러 벌 맞추고, 장신구도 좀 새로 사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샐리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자신을 염려하는 샐리의 마음은 기뻤지만 솔직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몇 달 뒤면 자신은 이 제국에서 없는 사람이 될 텐데, 굳이 막대한 돈을 써서 드레스와 장신구를 맞춰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괜히 펠릭스 공작가에 폐를 끼치는 기분도 들었다.
“……저, 샐리.”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털어서 드레스만 사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똑똑.
“안에 계십니까?”
밖에서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레이스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실 문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네, 마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만.”
“아, 샐리. 마침 계셨군요. 괜찮으시다면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어머, 네. 그럴게요.”
돌아온 대답에 샐리가 문을 열자, 여러 명의 시종과 시녀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양팔에 큰 벨벳상자를 가득 든 그들은 그 상자를 그레이스가 앉은 자리 앞에 쌓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눈앞에 하나둘 쌓이는 수십 개의 상자에 놀라며 그들을 향해 물었다.
“어, 이게 다 뭐죠?”
그 물음에 시종들과 시녀들은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더니 그들은 상자들이 그레이스가 앉은 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하더니, 정리가 끝나자 하나씩 상자들을 열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나.”
그러자 눈앞에 드러난 것은 수십 벌의 드레스용 옷감과 구두용 가죽, 그리고 갖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였다.
봄이 되어 싹을 틔우는 연두색, 신비로운 자색, 여름의 장미 같은 연한 분홍색을 비롯해 색색의 실크와 새틴, 갖가지 색으로 염색된 구두용 가죽과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에 자수정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옷과 구두, 보석들에 그레이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이게 다…….”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께 보내신 것이랍니다.”
“이, 이걸 전부 다요?”
“네. 혹여 이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직인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이미 차고도 넘쳐요. 굳이 다시 장인들을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고르시지요. 부인 치수에 맞게 드레스와 구두를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어느새 곁에 선 시녀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레이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무엇 하나 자신이 갖기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귀하고 예뻐서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릴 뿐, 선뜻 고르지 못했다.
그러자 샐리가 잔뜩 들뜬 얼굴로 그레이스의 손등을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저기 저 장밋빛 새틴과 흰 송아지 가죽, 그리고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가장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마님 생각은 어떠세요?”
“……그, 그런가요?”
“왜요,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럼 저쪽의 하늘색 미카도 실크와 청색 가죽 구두에 사파이어 목걸이 조합은 어떨까요? 마님의 하얀 피부와 딱 어울리지 않을까요? 둘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세요?”
“……아. 나는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한 번도 드레스나 보석을 제대로 골라본 적이 없었기에 그레이스는 샐리의 제안에 그저 좋다고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샐리가 살짝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활짝 웃으며 대기하고 있던 시녀와 시종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여기 있는 것 전부 다 드레스와 구두로 만들면 되겠네요!”
“……뭐라고요?”
“장신구는 저쪽에 있는 금고 안에 넣어 주세요. 아! 저 중 장밋빛 새틴 드레스를 제일 먼저 만들어서 보내 주셔야 해요! 수치는 제가 지금 재서 곧장 보낼게요.”
“알았어요, 샐리.”
샐리가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자 시종들과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