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공작의 후처가 되었다 7화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정원 밖으로 나온 그레이스는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샐리의 말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운 날씨였다. 그레이스는 장갑을 낀 손을 호호 불어 순식간에 얼어 버린 제 얼굴에 가져다 대며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어 정원으로 걸어갔다.
샐리는 어제와는 달리 무언가 찾는 듯 이상하게 두리번거리는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찾으시는 분이나 장소라도 있으세요?”
“아, 네. 뭐, 좀…….”
그레이스는 샐리의 물음에 건성건성 대답하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기를 몇 분. 결국 어제 레온을 만난 곳까지 온 그레이스가 레온이 숨을 만한 작은 풀숲을 살피고 있던 그때였다.
“에그머니나, 공자님! 여기서 대체 뭘 하세요?”
샐리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그레이스는 얼른 몸을 돌려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샐리가 서 있는 작은 수풀 뒤에, 어제와 똑같이 검은 코트를 뒤집어쓴 레온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얼른 그 곁으로 다가가 시선을 맞춰 앉으며 말했다.
“안녕, 레온. 좋은 아침이야.”
“……안녕하세요, 레이디.”
그레이스의 인사에 잠시 머뭇거리던 레온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얼마나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손끝이 빨갛게 얼은 레온을 걱정스러운 듯 살피고 있자, 샐리가 놀랍다는 듯 그레이스를 향해 물었다.
“어머, 마님! 레온 공자님을 어떻게 아세요?”
“어제 우연히 만났어. 그렇지?”
“……네.”
샐리의 물음에 답한 그레이스가 웃으며 레온에게 되묻자, 레온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그레이스는 어제와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아이의 가려진 눈과 시선을 맞추듯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나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아니긴. 이렇게 손이 빨갛게 얼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나와 볼걸 그랬어.”
그레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꽉 주먹 쥔 레오의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포개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따뜻한 제 입김을 불자 가면 속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혹시 싫었던 걸까.’
적잖이 놀란 듯한 아이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당황해하며 아이의 손을 놓고는 물었다.
“왜, 왜? 싫었어? 미안해. 멋대로 손 만져서.”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저주, 저주받을지도 몰라요.”
혹여 다시 그레이스가 자신의 손을 잡아 올 새라 두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레온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또다시 울 것 같은 시선으로 고개를 떨군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 다섯 살 남짓, 이 어린아이에게 매인 저주라는 굴레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자신 또한 앨버튼 가문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고 태어났어야 할 ‘마법 능력’이 없어 냉대와 무시를 받으며 자라 왔기에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싸늘한 시선에 상처 받고, 홀로 설움을 삼키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알기에 더더욱.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레온, 내가 어제 했던 말 기억나?”
“……어떤 거요?”
“누가 너에게 저주 운운하거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했던 거.”
“……아.”
“잊어버렸다면 또 말해 줄게. 레온, 자비로운 신께서 너같이 귀여운 아이에게 저주를 내리실 리가 없어. 그렇죠, 샐리?”
“그럼요! 마님 말이 전부 옳아요!”
그레이스가 동의를 구하듯 제 뒤에 선 샐리를 돌아보며 묻자, 샐리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가면에 가려진 아이의 오드아이가 매달리듯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요?”
“그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랬어요. 나는 저주받았다고…….”
그러나 그레이스의 거듭된 부정에도 레온은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그레이스는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하긴, 고작 이런 말 몇 마디로 마음에 난 생채기가 사라질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아이가 더 이상 자신의 앞에서 스스로의 저주에 대해 언급하며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던 그레이스는 곧 번개처럼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그레이스는 웃음을 갈무리하듯 짧게 헛기침을 한 후,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줄곧 레온과 맞추고 있던 시선을 휙 피하며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런, 곤란하게 됐네.”
“……네? 뭐가요?”
“오늘 귀여운 레온이 곧 생일을 맞았다고 해서 선물을 준비해 봤는데. ……그런데 레온은 자기가 저주받은 아이라고 그러네?”
“……!”
“어쩔 수 없네. 기껏 생일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이건 그냥 다른 아이에게 줘야겠어.”
그레이스는 일부러 보란 듯 품속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 레온의 앞에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선물 상자를 발견한 가면 너머 레온의 두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레이스의 손에 든 선물이 뭔지 받고 싶은데,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자니 굳게 세뇌된 저주받은 아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레온에게 그레이스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레온이 저주받은 아이라는 말을 취소하면 줄 수도 있는데.”
“……진짜요?”
“그럼!”
“……그럼 저 취소할래요. 나, 레온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에요.”
“잘했어.”
그레이스는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구하듯 간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의 손에 벨벳 상자를 올려놓았다.
레온은 조심스럽게 제 두 손바닥 위에 올라온 선물을 꼭 쥐고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레온을 다정히 바라보며 말했다.
“안 열어 볼 거야?”
그레이스가 넌지시 재촉하자, 레온은 머뭇거리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순간 어두운 벨벳 상자에 감싸인 연하늘색 토파즈 목걸이가 은은히 반짝였다. 그레이스는 이제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목걸이를 바라보는 레온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에 레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더니 누가 뺏어갈 새라 다급히 상자 안에서 목걸이를 빼내더니 그것을 두 손에 꼭 쥐며 말했다.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진짜?”
“……네! 이건 누가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예요!”
목걸이를 쥔 두 손을 탐욕스럽게 제 품 안에 끌어들이며 대답하는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활짝 미소 지었다.
잔뜩 신나 들뜬 아이의 모습에 그녀의 기분 또한 밝아졌다. 그 모습을 줄곧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던 샐리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들뜬 레온을 향해 말했다.
“레온 공자님, 선물이 마음에 드시나요?”
“응!”
“그럼 마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는 하셨어요?”
“아, 참. ……감사합니다, 레이디!”
“나도 기뻐해 줘서 고마워.”
뭇 기사들처럼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레온의 모습에 그레이스 또한 살짝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샐리는 레온을 향해 넌지시 충고하듯 말했다.
“이런, 레온 공자님. 레이디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하셔야지요.”
“……형수님?”
그 말에 레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샐리는 허리를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네. 레온 공자님의 앞에 계신 마님은 형님이신 펠릭스 공작님의 아내이시니, 당연히 형수님이라고 하셔야지요.”
“……형님의…… 아내라고요?”
샐리가 그렇게 말한 순간, 레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미소가 걷히고 불안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떨구는 아이의 모습에 덩달아 그레이스의 얼굴 또한 흐려졌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여 레온과 억지로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레온? 응?”
“…….”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순 없을까?”
그레이스의 물음에 레온은 머뭇거리며 몇 번 입을 벙긋거리더니, 곧 잔뜩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 약속해 주실 수 있어요?”
“응?”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세요?”
“……어?”
레온의 대답에, 그레이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혹시 아이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대해 눈치챈 걸까.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레이스는 지레 정곡이 찔려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레온이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레이디 엘렉트라랑 앞으로 형님의 아내가 될 거라고 했던 레이디들은 전부, 전부 떠났단 말이에요. ……레, 레이디 엘렉트라는 저랑 오래 함께 있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
“그런데 레, 레이디도 형수님이라고요? 그럼 이제 레이디도 나중엔 다른 분들처럼, 멀리 떠나 버리는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온은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 절박하고 간절한 시선이 와닿자, 그레이스는 그 시선을 피하고만 싶었다. 레온의 애원하는 듯한 시선이 가슴 아파서, 레온이 원하는 대로 대답해 주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수한 눈을 두고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대답 대신, 레온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것이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라 알아들은 듯, 레온이 짧은 두 팔을 활짝 펴 그레이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레이스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꽉 끌어안은 레온의 등을 다정히 토닥였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아니에요. ……샐리는 아무런 잘못 없어요.”
그리고 그레이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사과하는 샐리의 말에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처럼 샐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물론 불안해하는 레온에게도 잘못이 없었다.
‘……아서 펠릭스 공작, 그 사람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닐 수도.’
아서의 말처럼, 어쩌면 자신은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으로 아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자신은 ‘저주’를 이용해 이곳을 떠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인데.
그레이스는 마음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