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족들의 행실을 내심 한심하다 여기고 있었기에 반대로 더욱 꼿꼿하고 정숙한 여인이 되자 생각했거늘, 아무리 딴청을 부려도 재잘거리는 말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만큼 추한 게 없다는 말이나 사내들은 애를 태울 만큼 태워야 금방 질려 하지 않는다는 둥, 잠자리를 쉽게 가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해 줄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경험도 없으니 사실인지 아닌지를 함부로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벽 한쪽에 버티고 선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자 나디아는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급기야 잠자리 이야기로 넘어가 혀를 어째야 한다는 둥 허리를 어떻게 하는 게 좋다는 낯 뜨거운 화제로 뜨거워졌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먼저 일어나 보겠어요. 즐거운 이야기 나누시길.”
필사적으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뺨이 화끈거렸지만 빨개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나디아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자리가 거북했는지 굳은 낯을 한 영애 서너 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각자 인사를 하고 타고 왔던 마차에 올라 떠나가는 것을 보며 나디아도 하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진정해 가던 나디아는 불현듯 떠오른 충동에 입술을 깨물었다. 참기 힘든 호기심이 그녀를 충동질했다. 답지 않게 한참을 망설이던 나디아는 그녀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하녀 수잔을 시켜 마부에게 상점가로 가자는 말을 전하게 했다.
이리도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입술을 뗐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큰 잘못을 저지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책을 사려는 것뿐.
간혹 들르곤 하던 서점 근처에서 내린 그녀는 아닌 척 주위를 둘러보고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올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 사이를 살펴보던 나디아는 어렵지 않게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살 생각이 없었던 시집이나 철학책까지 구입한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노려보다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밋밋한 표지의 책들 사이에서 제법 화려한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오늘 이야기가 나왔던 연애 소설이었다.
나디아는 제 행동에 실소했다. 그리도 관심 없는 척해 놓고 바로 달려가 집어 온 것을 보라. 망설임은 여전했다. 하지만 유혹이 더 컸다. 그녀는 책을 펼쳤고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
책을 구입하기 위한 외출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하녀와 기사를 줄줄이 이끌고 가던 외출이 그녀 혼자 하는 외출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말리던 하녀들도 그녀의 고집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나디아는 언제나처럼 밋밋한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걸음을 서둘렀다. 여인 홀로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녀가 읽는 책을 들킬 경우를 상상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책을 사다 읽고, 다음 책을 사러 올 적에는 읽었던 책을 되팔았다. 나디아도 이런 짓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그러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책을 처분하고 제법 마음에 드는 글을 쓰던 작가의 책을 두 권 구입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늘 그랬듯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읽을 생각을 하면 즐거워졌다. 그리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네들이 주고받던 음담처럼 저도 모르게 귀 끝이 달아오를 만한 일들을 언젠간 자신도 겪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삯 마차를 타기 위해 급하게 골목길을 지나치던 나디아는 모퉁이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졌다. 들고 있던 책이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고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얼얼하게 아팠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야지, 아가씨.”
커다란 덩치와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내가 을러대자 나디아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제야 조금 후회가 되었다. 하녀들이 기사를 대동해야 한다고 할 때 들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일어섰다.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 내다 자잘한 상처가 난 것을 발견했다. 넘어지며 바닥을 짚느라 쓸린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바빠서… 별문제 없다면 이만.”
그녀는 은근슬쩍 사내의 옆길로 지나치려 했다. 그가 조금 전의 사과에 만족했기를 바라며. 하지만 기대를 배반하듯이 사내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냥 가려고? 사람을 쳐 놓고?”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디아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그녀는 혀를 씹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다, 당신은 다치지 않았고, 내가 사, 사과도 했으니까, 힉!”
“그래서 그냥 가시겠다?”
사내가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지저분한 얼굴에서 불쾌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치긴 뭘 안 다쳤다는 거야? 이거 안 보여?”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며 들이미는 팔뚝에는 족히 한 뼘은 되어 보이는 자상이 나 있었다. 반쯤 아물어 가는 그 상처는 누가 보아도 그녀와 부딪혀서 난 게 아니었다. 나디아는 사내가 저를 순순히 보내 주지 않을 속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하는 게 뭐죠?”
“치료비.”
제 앞으로 내밀어진 두툼한 손바닥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디아는 계속되는 사내의 재촉에 돈주머니를 그 위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은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열어 보던 사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디아는 조금 안심했다. 이 정도로 끝나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떠나길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떠나는 대신 나디아의 모자를 집적거렸다.
“목소리가 귀여운데, 얼굴 좀 보여 주지?”
“그럴 이유 없어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나타나서 이 무뢰한을 쫓아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이 무뢰한이 함부로 나디아의 모자를 낚아채 갔을 때 새로운 인물이 그자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녀는 떨면서도 그가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에 도움을 줄 만한 인물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눈을 키웠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새빨간 머리카락에 무뢰한보다도 한 뼘은 더 큰 키를 가지고 있었고 옆구리에는 커다란 검을 달고 있었다. 나이젤과 나란히 세워도 부족하지 않을 법한 준수한 얼굴은 잠시 그녀를 설레게 했지만 뺨을 가로지른 커다란 흉터는 그 외모의 이점을 죽이기에 충분할 만큼 흉악해 보였다.
남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나디아는 아주 잠깐 그가 무뢰한과 한패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야 했다.
“이봐,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넌 뭐야?”
한껏 인상을 쓰며 돌아보던 무뢰한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는지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적어도 한패는 아닌 듯해 안심했던 나디아는 무뢰한이 주먹을 휘두르자 눈앞에서 치고 박는 싸움이 벌어질 줄 알고 한껏 긴장했다. 하지만 상황은 남자가 무뢰한의 팔을 이상한 방향으로 꺾는 것으로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나디아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는 반대로 꺾인 채 덜렁이는 팔을 붙잡고는 커다랗게 욕설을 내뱉으며 골목 밖으로 달아났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구해 준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밤마다 몰래 읽던 로맨스 소설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 부럽지 않을 일이였다. 그리 생각하자 흉터를 보며 느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이국적이고 준수한 외모에 대한 감각만 남았다.
나디아는 그가 부드럽게 ‘괜찮으십니까, 아가씨?’라거나 ‘숙녀분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같은 정중한 말을 건네어 주지는 않을지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모자만 넘겨주었을 뿐이었다.
나디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건 이 나름대로 괜찮아. 그녀는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띠우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덕분에….”
“제정신입니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쩡하니 굳어 버렸다. 남자는 나디아가 새카맣게 잊고 있던 책들을 주워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뒷골목을 여성분이 혼자 다니는 건 먹잇감이 되고 싶다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디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얌전히 수긍했다. 그녀는 방금 정말로 위험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반성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삯 마차를 타는 곳까지 데려다드릴 테니 다음부턴 조심하십시오.”
“…네.”
나디아는 모자를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제가 들게요. 주세요!”
그의 손에 들린 연애 소설책을 보며 안절부절못하자 역효과가 났는지 그가 흘끔거리며 책 제목을 읽었다. 아가씨와 기사…. 남자의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이 착각이기를, 나디아는 간절히 바랐다.
친히 마차까지 잡아 준 남자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괜스레 다급해진 나디아는 자신이 그의 옷자락을 주름이 가도록 꽉 붙잡은 것을 깨닫고 제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용건이 남았습니까?”
“아, 그게… 그, 음….”
지나치게 충동적인 행동이었던지라 용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짜던 나디아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마차 삯이 없어서… 아까 그 남자한테 돈을 다 빼앗겼거든요, 그래서… 빌려주시면….”
하필이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쥐구멍 같은 데가 있으면 숨고 싶었다. 간신히 떠올린 그를 붙잡을 구실이 고작 이런 거라니.
나디아가 부끄러워하거나 말거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붉은 머리 남자는 의외로 흔쾌히 돈을 빌려주었다. 나디아는 갚지 않아도 괜찮다는 남자에게 한사코 돈을 갚겠다고 우겼다.
그리 해서 얻은 것은 아실이라는 남자의 이름과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