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화 (1/115)

1.

01. 나디아 잉그램

나디아 잉그램은 어린아이 치고는 감정 표현이 드문 편이었다. 떼를 쓰지도, 울지도 않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모두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의젓하니 잉그램가(家)의 영애다운 몸가짐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그 평판은 사실과 조금 달랐다. 그녀는 의젓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행동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뿐이었다.

귀찮게 굴지 않으면, 울지 않으면, 품위 있게 행동하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장난치고, 부모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예뻐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싶은 것을 모두 참은 결과는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나디아의 가족들이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주위의 모두가 그녀를 의젓하고 우아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였다.

나디아는 이제 와서 태도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행동들이 애정을 받고 싶어 행했던 몸부림이라고는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잉그램 공작가는 제국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와 권력을 자랑했지만 그게 곧 가족의 화목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 부부는 이 시대의 귀족 대다수가 그렇듯이 완벽한 쇼윈도 부부였다. 그들의 결혼은 정치적 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부는 슬하에 후계자로 삼기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사내아이와 결혼 시장에 내놓기 좋으리만치 아름다운 여자아이를 둔 것으로 서로의 의무를 다했다 여기며 바깥으로 나돌았다.

사랑 없는 결혼의 산물인 나디아가 부모의 사랑을 받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각자 두고 있는 정부가 여럿이며, 부모가 외박을 밥 먹듯이 하는 게 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디아가 열 살 무렵이었을 때였다.

형제와의 우애라도 좋았더라면 조금은 위로가 됐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인 나이젤은 열 살이나 어린 여동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고, 업무를 보고 남는 시간엔 온갖 파티란 파티를 찾아다니며 반반한 얼굴과 차기 잉그램 공작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자를 후리기 바빴다. 공작 부인은 그런 아들을 보고도 사생아만 만들지 않으면 아무래도 좋다며 신경 쓰지 않았다.

툭하면 여러 가지 향수와 화장품 냄새를 뒤집어쓴 채로 술에 절어 들어오는 오라비는 그녀도 사양이었다. 고작 열두 살인 나디아의 눈에도 그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은 한심해 보였다.

그녀는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모두가 자신에게 일말의 애정도 가지지 않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건조하고도 외로운 어른으로 자라나 똑같은 삶을 살다 똑같은 가정을 이루는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디아가 난생처음으로 파티에 가게 된 날이었다.

잉그램 공작가와 제법 가까이 지내는 마르텐 백작가 영애의 여덟 살 생일 파티였다. 늘 그렇듯이 이런 파티는 나름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저들끼리 어울리며 친분을 과시하고 새로운 다리를 놓고 싶어 하고 아이들은 미래의 인맥을 다지는 것이다.

분수대 턱에 걸터앉아 일렁이는 물 표면에 손끝을 담근 채로 시간을 죽이던 나디아가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마르텐 백작이 자신의 여덟 살 난 딸을 답삭 들어 올려 품에 안은 것이었다.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얼굴로 목을 끌어안는 딸을 바라보는 백작과 백작 부인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것을 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디아는 그들에게 다가가 자신도 그렇게 바라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나디아는 머뭇거리며 백작 부인의 곁으로 다가섰다.

“내 작은 천사, 엄마랑 선물 풀어 볼까?”

저를 부르는 게 아님에도 절로 뺨이 발그레해질 만한 호칭이었다. 백작 부인이 엄마라면 그녀도 천사라고 불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그녀에게 엄마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물어볼 작정이었다.

있는 힘껏 발돋움해 백작 부인의 손을 잡으려던 나디아의 자그마한 손을 낚아챈 건 무서운 눈을 한 그녀의 어머니, 공작 부인이었다.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디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을.

“무슨 짓을 하려고 했니?”

“저, 저는….”

나디아는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본능적으로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웅얼거리자 공작 부인은 인내심이 다 했는지 추궁하기를 그만두고는 나디아의 손을 내팽개쳤다.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너한테 신경 쓸 시간 없으니까.”

나디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게 굴면, 그들이 바라는 아이로 있으면 언젠가는 나의 천사라고 불릴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어린아이의 낙관이자, 울어 버리지 않기 위한 자기 기만이었다.

나디아는 강한 척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기껏해야 한껏 턱을 치켜세우고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 정도였지만, 그녀가 그리 행동하는 것은 어느새 당연해져 있었다.

나디아가 도도함과 차가움으로 무장하면 할수록 주위 사람들이 멀어졌다. 가깝게는 항상 붙어 시중을 드는 하녀들부터,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그녀의 가족들과, 멀게는 성년을 맞지 않은 소녀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교 모임인 다과회의 구성원들까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하녀들이 잔뜩 있었고, 손꼽는 권력자 집안의 영애인 나디아에게서 무언가 얻어 갈 것이 없을까 싶어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없는 소녀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정작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얻을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철없이 울고 떼쓰고 뛰어다녔더라면 좀 달라졌을까? 지금에 와서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약한 소리를 터놓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고작 시중이나 드는 하녀들에게 외롭다는 말 같은 건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저를, 잉그램 영애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약한 소리를 했다간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간신히 내보인 약한 틈을 누군가는 파고 들어와 이용하려 하거나, 제가 생각하던 영애가 아니라며 떨어져 나가거나… 온통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낙관도 기울어져 갔다. 강하고 도도하고 품위 있는 잉그램 영애가 되어 버려서 누구도 그녀를 나의 천사라고 부르며 연약한 것을 대하듯 안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변 없이 열일곱 살이 된 외로운 소녀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서늘한 밤바람을 맞았다. 몸이 떨리는 것이 바람 탓인지 외로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

성년을 맞이한 나디아의 사교계 데뷔는 성대하고도 화려하기 그지없게 이루어졌다. 평소에는 나디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던 그녀의 어머니, 엘로이즈는 나디아가 성년에 가까워지자 샤프롱을 자처하며 데뷔탕트 준비를 도맡았다.

이것도 그 ‘의무’의 한 부분이겠지. 나디아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어머니의 관심 한 자락을 얻어 보고자 애쓰던 어린 나디아의 모습은 이제 부스러기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디아는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로 불평 하나 없이 모든 일정을 견뎌 내었다. 새 드레스를 맞추고, 장신구를 고르고, 그동안 수백 번은 반복했을 예법을 점검하고, 최신 유행하는 춤을 발이 부르트도록 연습하는 것과, 친분을 쌓아 둬야 할 힘 있는 집안의 영애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까지.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무도회는 성황리에 막이 올랐다. 그날 데뷔한 일곱 명의 소녀들 중에 나디아는 단연 돋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 모든 관심이 자신의 뒤에 붙은 이름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었다.

눈 색과 같은 푸른색 실크 드레스를 차려입고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맵시 있게 틀어 올린 후 백합과 진주로 만든 장식을 두른 그녀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이 어딜 가든 따라다녔다. 미소와 예의 바른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치를 매기듯 훑는 시선들에 무력하게 노출되던 그녀는 제가 정육점에 내걸린 품질 좋은 소고기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이름들을 뒤에 달고 있는 미혼의 영식 서너 명과 춤을 추며 홀을 뱅글뱅글 돌던 나디아는 자신이 느꼈던 감상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들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이렇게 눈도장을 찍고 자신의 집안에 어떤 결합이 가장 이득이 될지를 생각하며 재고 따져서 하게 될 결혼 생활은 일말의 온기도 없이 냉혹하기 짝이 없겠지. 마치 그녀의 부모인 공작 부부처럼. 절로 몸서리가 쳐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 사회에 속한 모두가 그렇게 살아갈 테니 따르는 수밖에.

성년이 되어 가장 좋은 점은 홀로 하는 외출이 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하녀 한 명과 기사 한 명이 따르긴 했지만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아버지나 오라비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꺼웠다.

속속 날아드는 초대장에 적당히 응하며 인맥을 넓히는 것은 피곤하고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나디아가 최근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비슷한 나이대의 영애들로 이루어진 다과회였다.

이 시기의 여자들의 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자 이야기였다. 차갑고 건조하기만 한 줄 알았던 결혼이나 남녀 간의 관계가 그네들의 입술을 타고 뜨겁고 은밀하며 질척이는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찻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즐기는 것도 좋지만 사생아를 만들 순 없잖아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좌중을 둘러보는 금발 머리의 숙녀는 멜카드 백작 영애로 나디아 보다 두 살이 많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거침없는 성격과 입담으로 자신의 일탈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를 즐겼는데,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난 소녀들이 남사스러워하면서도 차마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적나라한 이야기들에 어느 정도 적응한 소녀들은 은근슬쩍 이야기를 계속할 것을 종용했다.

대부분의 경우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나디아의 몫이었지만 남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단 한마디도 보탤 수 없었다. 나디아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들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도 좋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멜카드 백작 영애의 말에 동조하며 조심스럽게 제 경험담을 풀어놓는 영애가 두엇 정도 더 생기자 이야기가 더욱 다채로워졌다. 당장 결혼을 코앞에 앞두고 있거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는 중인 영애까지도 일탈을 즐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디아는 배 속이 출렁일 지경이었지만 조용히 차를 마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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