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6/23)

Chapter 5.

얼마 지나지 않아 레미아 마을에 전염병이 일단락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수라는 것이 마을에 돌았는데,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성수를 가지고 빈민촌부터 마을의 아픈 이들을 찾아가 치료했다.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돌았다.

덕분에 레미아 마을은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빈민촌 골목에는 시체나 아픈 이가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인해 마을은 소외된 계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선한 영향력이었다.

마을이 평화롭고, 신전이 평화로우니, 보육원도 안 평화로울 수 없었다.

“꼬꼬야! 그건 먹는 거 아니야!”

마사가 다급히 외쳤다.

오랜만에 바깥에서 소풍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챙겨 온 샌드위치 가방을 꼬꼬가 통째로 들고 튀고 있었고, 마샤는 그런 꼬꼬를 쫓느라 바빴다.

“쟤들은 또 왜 저래.”

한나를 도와 주스를 가지고 나오던 제레미가 답했다.

“뭐긴 뭐예요. 점심 털리는 장면이죠.”

제레미가 주스를 잔디에 놓고 꼬꼬를 잡으러 합류했다.

“전 쿠키로 때울래요.”

꼬꼬를 쫓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이안이 말했다.

이안은 꼬꼬가 날 수 있음에도 굳이 저렇게 뒤뚱뒤뚱 뛰어서 요리조리 도망치는 것이 자기들을 놀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일찍이 눈치챘다.

요망한 새가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말세야.”

“에고……. 꼬꼬 고기도 챙겨 왔는데, 우리가 꼬꼬 음식을 먹어야 하나.”

한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도대체 쟤는 왜 저리 사람을 못 괴롭혀서 난리인지.

“꼬꼬야! 고기랑 바꾸자!”

한나가 고기를 손에 들고 붕붕 흔들자, 꼬꼬가 샌드위치 바구니를 툭 하고 바닥에 뱉어 내고 한나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으아! 천천히 와! 부리! 부리 조심하라고!”

꼬꼬의 빠른 속도에 겁먹은 한나가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꾸륵!]

한나의 걱정과 달리 꼬꼬는 귀신같이 한나의 앞에 멈춰 서서 한나의 손에 들린 고기만 달랑 뽑아 갔다.

“휴. 제발 그렇게 달려오지 마. 네 발톱에 깔리면 난 죽고 말 거라고! 너 그러면 분명 신전이든 마탑이든 잡혀가서 해부당한다.”

한나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마는 건지 꼬꼬는 고기를 쩝쩝거리며 뒤뚱뒤뚱 걸어갔다. 그러곤 자신이 좋아하는 볕이 잘 드는 닭장 옆으로 이동했다.

“……쟤 점점 무서워. 더 커서 나도 먹으면 어쩌지.”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슥삭 하죠.”

“아주 매정하구나.”

이안의 말이 진심은 아니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매일 투덜거려도 자신이 없을 때 시간을 맞춰서 꼬꼬의 밥을 챙겨 준 것은 노느라 정신없는 마샤가 아니라 이안이었다.

이안은 매사 냉정한 듯 보여도 잔정이 많은 타입이었다.

“선생님! 샌드위치 찾아왔어요!”

“그래도 점심 굶진 않겠다. 얼른 자리 깔고 앉자.”

한나는 기분 좋게 자리를 펼쳤고, 한나와 아이들은 빙 둘러앉았다. 아이들이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먹자 한나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밥을 먹으면서도 한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없이 혼자서도 입을 닦아 가며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짙어졌다.

언제 이렇게 잘 자란 건지.

매일 보고 있을 땐 모르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아이들이 성장했다는 것이 훅하고 다가올 때가 있었다.

“선생님, 왜 안 먹어요?”

“응? 먹을 거야. 근데 너희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네.”

이렇게 저를 걱정도 하고 말이다.

“돼지 같은 제레미가 다 먹기 전에 얼른 드세요.”

이안이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이안의 결벽증도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장갑이야 습관처럼 끼고는 있지만 이제 어지간해서는 더럽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다 컸네. 다 컸어.”

괜히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이야. 떼거리로 몰려왔군.”

세자르의 감상은 이랬다.

“교황님의 서신입니다.”

그의 앞에 종이봉투를 내미는 이는 다름 아닌 중앙 신전의 신관이었다.

“겨우 이 종잇조각 하나가 무거워서 이렇게 줄줄이 온 건 아닐 테고.”

세자르가 교황의 서신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 그의 가벼운 행동에 신관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소식 하나 전한다기엔 정성스럽게도 열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여차하면 무력행사라도 하겠다는 건지, 다양하게 공격계열 신관까지 보낸 것이 아닌가.

“내가 요즘 글자를 너무 많이 봐서 말이야. 짧게 추려서 말로 해 주지 그래.”

“이번 전염병 사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곳에 치유계열 신관이 있다고.”

“없는데?”

세자르는 신관을 말을 들으면서 종이봉투를 책상 위로 굴리며 손장난을 쳤다.

“신관이 아닌 누군가라도 있겠죠. 전염병을 치료한 성수의 출처가 레미아 신전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중앙 신전 신관은 이미 신전 내부에 대한 조사가 끝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세자르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망상이 지나치군.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이러시면 저희가 직접 조사 와 심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자르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신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커티스. 대화는 내가 하지.”

“예.”

중앙 신전 신관의 불손한 태도에 커티스가 발끈하려 했지만 세자르가 가볍게 저지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쪽 말은…….”

느릿하고 가벼운 말투였으나 신관들은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맹수의 앞발에 눌린 듯 생사를 오가는 진득한 공포감.

“내 신전을 조사해 누굴 데려가겠다?”

“이곳은 개인의 것이 아니오.”

개중 어느 신관이 용기를 냈다. 그에 세자르가 내리깔려 있던 눈을 치켜떠 신관을 바라보았다.

“윽.”

말을 꺼낸 신관이 갑자기 땀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지금 무력을 행사하시는 겁니까!”

다른 신관 하나가 놀라 무릎을 꿇은 신관을 일으키려 몸을 굽혔고, 이내 그조차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중압감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내 신전에서 내 사람을 데려가겠다……. 그런 방자한 말을 들으니 힘 조절이 안 되어서 말이야.”

“중앙 신전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것입니까?”

“여기,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있던가?”

감히 대신관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있는 세자르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이는 교황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내 신전에서 내 사람은커녕,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가져갈 수 없을 거야. 그건 굳이 입 아프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고.”

세자르가 조소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군다면……!”

“내가 원래 개차반인 걸 모르는 신관도 있던가? 더 더러운 꼴 보고 싶지 않다면 곱게 사라지는 게 나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억울하기까지 한 지경이었다.

“평화를 지키는 게 신관의 일 아닌가? 나도 내 신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지.”

세자르는 이 상황의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황님의 서신이라도 읽어 주십시오.”

결국 신관은 오만한 태도를 다 버린 채 부탁했다. 중앙 신전의 힘 같은 건 세자르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뭐, 시간이 남으면 버리기 전에 읽어는 보지. 늙은이에게 안부나 전해.”

“……가 보겠습니다.”

순식간에 신관들을 둘러싸고 있던 중압감이 사라졌고, 숨을 토해 낸 신관들이 주춤거리며 집무실을 떠났다.

달칵.

문이 닫히고 정적이 흘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사라지자 커티스가 입을 열었다.

“이만큼 내 의사를 전했으면 알아듣겠지. 그도 아니라면 그 늙은이 얼굴이나 한번 보는 거고.”

별일 아니라는 듯한 세자르의 태도에도 커티스는 불안감을 느꼈다.

세자르는 손에 치이는 편지 봉투를 찢어 편지를 꺼냈다. 슬렁슬렁 대충 또르륵 구르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편지를 다 훑었다.

[3년간 조용한 곳에서 잘 쉬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아마 모르겠지. 워낙 세상사 관심이 없는 녀석이니.

특히 북쪽 사막에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말이야.

네 무거운 엉덩이를 떨어지게 할 방법이 영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뭐 어쩔 수 없이 신전은 어정쩡한 공격계열과 치유계열 신관을 대거 영입해 그 살벌한 곳으로 보내야 할 실정이란다.

떼죽음을 당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특히 치유계열은 구하기 힘드니 제국 내를 샅샅이 뒤져 찾아야 하겠지. 아주 이 잡듯 들쑤셔서 말이야.

뭐, 그렇다는 얘기다. 부담은 가지지 말거라.

모쪼록 우리 신관들은 멀쩡히 돌려보내 주면 좋겠구나.

나의 아이의 무탈을 빌며.]

세자르가 코웃음과 함께 편지를 구깃구깃 구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으로 종이뭉치를 던졌다.

“하여튼, 우리 영감. 머리는 참 좋아. 그렇지?”

커티스는 내용을 보지 않았음에도 세자르의 잔뜩 구겨진 이마근육을 보며 교황이 머리를 잘 썼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세자르는 고민했다. 한나의 정체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질 것이었다.

어쩌면 교황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다른 마을의 전염병도 일단락되어 가는 이때에 굳이 한나를 싫다는 신관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관이 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지금 바로 아이들과 떨어지게 만드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한나를 생각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이 대신관으로 있는 레미아 마을을 구해 준 은인에 대한 보답 같은 마음이기도 했다.

결국 세자르는 미간을 문지르며 커티스에게 입을 열었다.

“방금 나간 신관들에게 전해. 조만간 내가 간다고.”

“……예.”

* * *

아이들을 재우고 시원한 온천에 몸을 풀고 우유를 마시며 보육원으로 돌아가던 한나는 커티스를 만났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한나 양. 신력 검사를 받으셔야 할 듯싶습니다.”

“저요?”

오늘 낮, 유난히 신전에 신관들이 드글거린다 싶었는데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 아마 곧 중앙 신전 신관이 준비를 해 올 겁니다.”

“……저, 혹시 그거 받으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조금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소식에 한나는 걱정이 밀려왔다. 분명 그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빠르게 오다니!

“본래는 중앙 신전으로 인도돼 신관이 되는 과정을 밟겠죠.”

“저도 여길 떠나게 될까요?”

“선생님은 바로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커티스가 걱정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인가요?”

머릿속에 자신이 떠나고 남게 될 아이들이 스치자 한나는 조급해졌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퇴소하는 열다섯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그대로 지내실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건가?

한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치유계열 신관을 못 구해서 안달인 신전이 자신을 배려하는 것인지.

소문으로는 거의 죄수 포박하듯 데리고 간다던데. 물론 이건 한나의 망상이 덧붙여진 생각이긴 했다.

“세자르 님이 거래를 하셨습니다.”

“거래요?”

“한나 양이 아이들을 무사히 퇴소시킬 때까지 신전에서 건드리지 않기로 말이죠.”

새삼 한나는 세자르가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는 것에 놀랐다. 남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거래라고 하신 건…….”

한나는 부탁도 아니고 굳이 거래라는 단어 선택이 어딘지 찜찜했다.

“아. 대신 세자르 님이 검은 사막의 마수 토벌에 참여하시기로 했습니다.”

“네?”

마수라거나, 토벌, 검은 사막이라는 무서운 단어들의 향연에 한나는 절로 몸이 움츠렸다.

“설마 저 때문에……?”

순간 자신 때문에 세자르가 억지로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세자르 님이라면 한나 양 일을 차치하더라도 불려갔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래도…….”

왜인지 한나는 세자르에게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쪼록 검사만 미리 하는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아, 네. 감사해요.”

커티스가 한나의 팔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걸어가는 커티스를 보던 한나는 이상하게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 * *

똑. 똑.

“세자르 님, 계세요?”

“……들어와.”

한나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 박자 늦게 세자르의 답이 들려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자르는 등불을 켜 둔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시긴 하네요.”

한나가 중얼거렸다.

졸리는 건 성력 때문이고 원체 일을 잘 안 하는 타입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세자르에게는 의외의 면이 많았다.

“무슨 일.”

시큰둥하게 답해 오는 저 말투가 왜 갑자기 다정함이 묻어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건지.

한나가 입술을 뗐다.

“그……. 저 때문에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얘길 들어서요.”

“아니야.”

단호한 대답이었다.

“내가 고작 너 하나 위해서 그 고생을 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세자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웬 근거 없는 자신감이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물론 세자르 님은 대단한 성자셔서 제국민들을 구하러 가시는 거겠지만…….”

한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 네 감사 같은 거 안 받아도 이미 배 터지게 존경받고 있으니, 어쭙잖은 인사라면 넣어 둬.”

거참, 인사하려던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말만 골라서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말에도 한나는 빚진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야. 거기에 거저 얻은 이득이니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물론 아이들을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한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가 보육원을 생각해 준 마음을 꼭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도 세자르가 있는 3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일단은 예산 걱정도 없었고, 아이들 외적인 일에 대한 것은 일절 신경 쓸 필요 없게 보육원의 재정이며 운영에 신경을 써 주었었다.

물론 그게 커티스인지 세자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거였다.

“그럼 언제 떠나시는 건가요?”

“글쎄. 중앙 신전 일정에 맞춰야겠지.”

“너무 빠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나가 말을 흐렸다. 그동안 세자르에게 너무 해 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삼시 세끼 다 얻어먹고 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있는 핀잔 없는 핀잔 다 줬던 것도 갑자기 미안해졌다.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탈나.”

게다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업신여겼으면 이런 반응인지.

“대신관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꼭 후세까지 알릴게요.”

“얼씨구.”

세자르가 가볍게 한나의 말에 비웃음을 던졌다. 하지만 지금 한나는 그 모습마저 미워 보이지 않는 ‘고마운 분’ 필터가 씌워져 있었다.

“동상이라도 세울 기세군.”

“이참에 하나 세울까요?”

“선생 월급으로?”

“아니 뭐……. 좀 소박하게? 음, 이 정도 크기로?”

한나가 자신의 양팔을 벌려 아래위로 크기를 표현하듯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래 봐야 작은 크기였지만.

“싱거운 소리 할 거면 나가. 일해야 해.”

혼자만 감동 모드지! 혼자만!

세자르의 입에서 떨어진 축객령에 한나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하여튼, 심술은. 어찌 됐든 감사해요. 꼭 보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어.”

또 얄미운 손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그럼 가 볼게요.”

한나는 더 이상 세자르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다소 성의 없는 반응에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차라리 으스대는 성격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뭔가 감사 인사 치고 찜찜하게 끝난 것 같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한나는 시무룩하게 돌아서서 들어왔던 문을 당겼다.

“아. 그런데 말이야.”

막 문이 열리려던 그때, 세자르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한나의 귀에 날아들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뒤돌아보자, 내내 서류에 꽂혀 있던 세자르의 푸른 눈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하나 정정해 둘 말이 있어서.”

“뭔데요?”

“이거 아이들을 위한 거 아니야.”

“네?”

그는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손가락으론 툭툭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보다 심드렁한 표정이 또 있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애들이나 제국민 때문이 아닌 것 같다고.”

“제가 이해력이 조금 부족한데…….”

정말 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한나가 되물었다.

“고작 너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나는 문을 열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깜박거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제가 뭘……?”

순간, 불과 몇 분 전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 때문에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얘길 들어서요.’

‘내가 고작 너 하나 위해서 그 고생을 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 아까까진 아니라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떤……?”

“잊히고 싶지 않다는.”

한나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어떻게 3년을 같이한 사람을 잊는단 말인가?

“미안한 마음에 가끔 떠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역시 성격이 그렇게 좋진 않은가 보다.

한나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뭐……. 노력해 볼게요.”

차라리 동상을 세워 달라고 말을 하지.

“가 봐.”

세자르는 다시 얄밉게 손짓했다.

“아, 예.”

한나는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내내 대화 내용을 곱씹자 기분이 이상했다.

세자르가 아닌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마치, 다른 뜻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에이, 늘 그렇듯 심술부리는 거겠지.”

한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 * *

“꼬꼬야! 우리 오늘은 같이 잘까?”

오늘은 마샤가 꼬꼬를 몰래 방으로 데려온 날이었다. 어릴 적엔 종종 방에서 함께 자곤 했는데, 꼬꼬가 조금 크고 나자 한나가 함께 자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어쩜 이 검은 깃털은 이렇게 반들반들할까?”

마샤가 꼬꼬의 깃털을 하나씩 건드리며 말했다.

꼬꼬는 마샤의 방 포근한 담요 위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덩치가 산만 해서인지 방이 가득차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

마샤가 꼬꼬의 몸에 얼굴을 비볐다.

[끄륵.]

꼬꼬 역시 기분 좋게 제 날개를 파득거리며 마샤의 옆에서 잠들었다. 마샤 역시 꼬꼬의 일정한 숨소리를 들으며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새근. 새근.

둘의 간헐적인 숨소리가 방을 메우고 있었다. 단단히 창을 가린 커튼으로 인해 달빛 한 점 없는 방 안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 * *

해가 밝자 한나는 마샤를 깨우기 위해 방문을 열었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샤? 꼬꼬……?”

바닥에 자고 있는 둘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마샤!”

마샤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한나가 마샤를 안아 들어 몸을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잠결에 뭔가를 중얼거리는 마샤였는지만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마샤의 상태를 살피던 한나의 시선이 꼬꼬에게 닿았다.

“너……. 꼬꼬 맞지?”

[그륵.]

꼬꼬의 모습이 이상했다.

분명 어제까지는 덩치 큰 타조 같던 녀석이 하룻밤 사이에 몸집은 두 배로 불어나 있었고, 눈꼬리는 매섭게 찢어졌으며, 뿔은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부드럽던 깃털이 흉기처럼 단단해 보였다.

“……이게…….”

“저게 뭐야?”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제레미가 방문을 열고 한나처럼 굳어 버렸다.

“선생님……. 이거 꼬꼬인가요?”

“응…….”

[그륵.]

평소의 귀엽던 하이톤의 울음소리도 낮게 긁히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

“일단 마샤부터 봐야겠어. 제레미, 신관님에게 의원을 불러와 달라고 해 주겠니?”

“알겠어요.”

꼬꼬의 변한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제레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신전으로 향했다.

한나는 마샤를 침대에 눕혔다. 마샤의 이마에서 또르륵 땀이 흘렀고, 숨소리도 가빠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샤. 잠시만 기다려. 의원이 올 거야. 나도 얼른 차라도 끓여야겠다.”

한나가 몸을 일으켰고, 다시 멀뚱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꼬꼬와 눈이 마주쳤다.

“…….”

얜 어떻게 하지?

얼추 보았을 때, 문으로 통과가 될까 싶은 꼬꼬의 크기에 한나는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문은 두 쪽 다 떼어 내요.”

결국 차를 끓이고, 물수건을 준비해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이안이 한나에게 해결책을 주었다.

“저건 왜 저렇게 된 건가요.”

이안이 거대해진 꼬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분명 어제까진 멀쩡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왜 둘 다 이렇게 된 건지.”

한나는 따뜻한 물에 적신 물수건으로 마샤의 식은땀을 닦아 내며 답했다.

“휴, 그런데 문은 누구에게 부탁하지?”

마샤의 땀을 다 닦아 낸 한나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신관님을…….”

쾅!

“…….”

“…….”

그 순간 문짝이 둘 다 복도로 날아갔다. 한나와 이안은 멍하니 날아간 문짝과 뻥 뚫린 입구를 보았다.

에이. 설마…….

“설마 네가 한 거니?”

“저 여기 있었는데요.”

이안은 아니라 하고.

그렇다면 이 방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잠들어 있는 마샤……. 그리고…….

“꼬꼬. 설마 네가 한 거야?”

정말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륵.]

한나의 말에 답하듯 꼬꼬가 날개를 떨었다.

“맙소사.”

설마설마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일단……. 닭장으로 가 줄래?”

이 말도 알아듣고 움직일까 하는 생각으로 뱉은 말이었다.

쿵. 쿵. 쿵.

그런데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꼬꼬가 문을 걸어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응. 알아……. 나도 봤어.”

꼬꼬가 말을 알아듣고 마법을 쓰는 믿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한나와 이안은 멍하니 뜯어져 나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건 단순 열 감기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런 거죠?”

“마법사를 부르셔야겠습니다.”

의원에 진단에 한나가 되물었다.

“마법사요?”

“마력의 문제입니다. 심장 쪽에 탁음이 가득해요. 오랜 의사 생활하면서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건 처음입니다.”

“마력…….”

설마 꼬꼬와 관련이 있는 일일까.

“봐주셔서 감사해요. 마법사분을 찾아볼게요.”

“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그녀가 꾸벅 인사를 건네자 의사는 청진 가방을 챙겨 방을 나갔다.

“어떻게 된 일인데.”

팔짱을 꼰 채 벽에 기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자르가 말했다.

“마법사부터 찾아야겠어요.”

“커티스.”

“네.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세자르의 눈짓에 커티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문이 훤히 뚫려 있어 커티스는 손 하나 쓰지 않고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차는 이미 먹여 봤는데 소용없었어요.”

“마력이 문제라면 신력은 당연히 효과가 없겠지.”

“어떡하죠?”

한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럼 꼬꼬 때문에 마샤가 이런 건가요?”

창문에 찰싹 붙어 닭장 옆의 꼬꼬를 관찰하던 제레미가 말했다.

“아무래도 관계가 없진 않은 것 같아.”

한나가 한숨을 내뱉었다.

“저 녀석이 하룻밤 사이에 이상하게 자랐고, 마샤는 마력이 얽혀 쓰러졌다라.”

세자르가 중얼거리자 한나는 말을 보탰다.

“여태 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이럴까요?”

“원래 마력이란 게 언제 터지듯 나올지 모르는 거지. 신력도 마찬가지니까.”

한나는 초조함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꼬꼬가 위험했던 걸까요.”

“여태 잘 지냈으니 의심할 수가 없었겠지.”

한나의 타는 속도 모르고 창문 밖에서 꼬꼬의 그륵거리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진작에 마법사에게 보였어야 했는데…….”

마샤의 침대에 두 팔을 올린 채 한나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또 제가 문제네요.”

아이들을 잘 보호하려 했던 날들에 왜 이리 실수와 아쉬움이 많은 것인지.

쉽게 지나쳐 버린 날들이 후회가 됐다.

* * *

커티스가 모셔 온 마법사는 무려 마탑의 마법사였다. 커티스가 어떻게 일 처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스크롤을 찢고서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마력이 맞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다. 마샤가 흑마법사가 된다는 미래를 알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치료 방법 같은 게 있나요?”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됩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제대로 마력이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빠져나가서 그런 것 같군요. 아이가 뭘 했죠?”

“그냥 평소처럼 생활하다가 잤……. 아.”

한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조금 이상한 일이 있긴 했어요.”

“뭡니까.”

마법사가 자신의 수염을 슥슥 쓸며 대꾸했다.

“키우는 새가 한 마리 있는데……. 아니, 타조……. 음. 이제는 타조라기도 조금 뭐하긴 한데…….”

한나가 횡설수설하자 그를 지켜보던 세자르가 혀를 찼다.

“저기. 창밖의 저놈. 저놈을 끌어안고 잔 뒤로 이 녀석은 이 모양으로 아프고, 저놈은 밤새 몸이 두 배로 자랐습니다.”

세자르의 손가락을 따라 마법사의 시선이 옮겨갔다.

“……흠.”

눈을 좁히며 창밖을 보던 마법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가까이서 봐야겠군요.”

마법사가 몸을 일으키자 방 안의 모두가 그를 따라나섰다.

“아니. 한 명은 마샤를 지켜야지!”

“제가 있을게요.”

엉덩이가 무거운 이안만 빼고 말이다.

* * *

닭장으로 이동한 모두가 꼬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네. 저도요.”

“당연한 반응이지.”

마법사가 꼬꼬에게 다가갔고, 꼬꼬는 잔디에 엎드린 채 눈만 힐끗거렸다. 사람들이 몰려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호…….”

꼬꼬의 빛이 나는 뿔에 바짝 다가간 마법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아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알에서 부화했어요.”

“누가 부화를 시켰죠?”

“마샤요.”

마법사의 손이 뿔에 다가갔다.

[그륵…….]

그 손길을 느낀 꼬꼬가 낮게 소리내며 그를 위협했다.

“허, 살아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뭔데요?”

“뭡니까.”

마법사가 마력을 발현해 꼬꼬에게 흘려 넣었다. 꼬꼬는 획하고 고개를 돌려 마력을 튕겨 냈다. 마법사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흔히들 고대 마수라고 하죠.”

“마수요?”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뻔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정체가 이렇게 만천하에 까발려지다니.

“그렇게들 부르니 마수라고는 하지만, 일반 마수와 비교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 위험한 존재는 아닌 건가요?”

“위험할 수도 있지요. 고대 마수의 힘은 어마어마합니다. 제도 하나쯤 날려 버리는 건 성체에게 식은 죽 먹기일 테니.”

“그렇다면…….”

모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위험해지기 전에 꼬꼬를 슥삭 하려 하거나 잡아가거나, 혹은 꼬꼬를 부화시킨 마샤까지 곤욕을 치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마 그 아이를 부모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주인요?”

“그 옛날 고대 마수를 부리는 자들이 있었다고 전해지죠. 그런데 이 녀석을 부화시키는 데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었을 텐데……. 그 아이, 인간은 맞습니까?”

늙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됐다. 반짝이는 눈이 몹시 신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맞아요. 마력이……. 그렇게 대단한 정도인가요?”

“대단?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지요. 고대 마수의 주인이라니!”

일단 고대 마수니, 뭐니 하는 꼬꼬에 대한 것도 문제지만 한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샤의 안전이었다.

“마샤는 괜찮을까요?”

“이렇게 마수를 키워 내고도 겨우 앓아눕는 정도라면 그 아인 멀쩡할 겁니다.”

“더 위험한 경우도 있나요?”

“이 늙은이라면 이미 생명력까지 탈탈 털었어야 했을 겁니다.”

생각보다 위험한 것 같은 설명에 한나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 옛날 우연히 알을 주웠던 날들, 마샤가 알을 품었던 날들, 같이 뛰어놀던 멜론만 하던 꼬꼬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 아이, 마법을 배워 본 적 없지요?”

“네? 네.”

“마탑으로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본격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지금보다 훨씬 몸에 위험한 일 없이 마수를 키워 낼 수 있을 겁니다!”

“마탑……. 이요?”

말로만 듣던 마탑에 마샤가 간다고?

한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세자르를 보았다. 세자르는 마법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대 마수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 아이가 안전하게 마력 운용하는 법을 배울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런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마탑뿐입니다.”

“그렇겠죠.”

한나의 시선이 마샤의 방 창문으로 향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별의 기로에 놓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 마샤의 결정이 우선이에요. 그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저에겐 결정권은 없어요.”

“마력이 얽힌 것을 갈무리하고, 몸이 나아지면 함께 의논해 봅시다.”

일단 꼬꼬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속이 시원했다. 고대 마수니 뭐니 하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궁금증 하나는 풀린 순간이었다.

“이제 푹 자고 나면 정신이 돌아올 테고……. 여기 이 약들을 달여 먹이면 좋을 것이외다.”

정신을 잃은 마샤를 한참이나 붙잡고 마력을 안정시킨 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종이에 약초들의 이름을 적어 한나에게 건넸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삼 일 후에 이곳에 다시 들리지요. 아이에게 이 상황에 대한 설명과 마탑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아, 물론이에요. 마샤에게 잘 설명할게요.”

마법사는 설명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꼬꼬를 한 번 더 관찰한 후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간단하게 마법 스크롤을 찢고 사라졌지만 말이다.

“세자르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묵하게 있는 세자르에게 한나가 물었다.

“나쁘지 않은 기회지. 마탑은 마법사들이 못 들어가서 안달인 곳인데. 더군다나 보육원 퇴소 후를 생각하면 적성에 맞는 곳으로 가는 게 낫지.”

“그렇죠. 하지만 마샤는 아직 어리기도 하고, 다른 곳에 보낸다고 생각하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언제까지 그대가 그 아이들을 다 끼고 살 것 같아?”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세자르가 시큰둥하게 말을 던졌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품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그리고 원작을 생각한다면 흑마법사의 길로 빠지는 것보단 마탑으로 가는 게 훨씬 긍정적인 미래였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얘기를 해 봐야겠어요.”

세자르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흔들며 신전으로 향했다.

* * *

한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마샤의 곁을 지키며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레미. 제레미는 기사 학교에 갈 거야?”

“당연하죠. 모이세이 님이 추천서 써 주신다고 했어요. 가면 제가 제일 센 기사가 될걸요?”

“그럼, 그럼. 제레미는 대단한 기사가 되겠지.”

다행히 제레미는 퇴소 후 진로를 이미 정한 것 같았다. 역시 모이세이에게 제레미의 검술 수업을 받게 한 선견지명은 탁월했다.

신체적 능력이야 원작에서도 검증된 부분이었는데, 그런 제레미가 정식으로 검술을 배우고 기사가 된다면 위대한 검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유명한 기사가 되면 선생님 이름 한 줄 남겨 줘.”

“푸하하하.”

제레미가 우스운 농담을 한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진심인데.

거 어디 자서전에 한 줄 정도는 남겨 줄 수 있지 않나?

“이안은? 뭐 되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거 없어?”

어른들도 읽기 어려운 책을 술술 읽는 이안이라면 뭔가 대단한 걸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을까?

“없어요.”

단호한 대답이었다.

“잘 생각해 봐. 넌 그렇게 똑똑한데 세상에 궁금한 거 많지 않아?”

천재들은 지식을 탐구하고 싶어 하지 않나?

평생을, 아니 생을 두 번이나 평범하게만 살아 봐서 알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말이다.

“전혀요.”

그러나 여전히 이안은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밍숭맹숭한 반응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봐. 그냥 단순히 좋아하는 공부 같은 것도 상관없어.”

“생각해 볼게요.”

고분고분 생각해 보겠다고는 했지만, 저건 분명 자신의 말을 듣기 귀찮아서 하는 대답이 분명하다는 것을 한나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은 아이들이 열다섯이 되는 날까지가 전부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 한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 * *

“선생님?”

“음……. 음? 마샤!”

아이들이 떠난 후 마샤의 침대에서 그대로 잠들었던 한나가 마샤의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하세요?”

왜 자기 방에서 자고 있느냐고 눈을 끔뻑거리며 묻는 말에 한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며칠을 누워 있었는 줄 알아?”

“네? 제가요?”

마샤는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아마 그날 이후 기억이 아예 없는 듯싶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음, 일단 창밖의 꼬꼬부터 볼래?”

마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창밖을 보았다.

“저건 뭐예요?”

“뭐긴 뭐야. 꼬꼬지.”

“…….”

멀뚱히 창밖의 어마어마하게 자라버린 꼬꼬를 바라보던 마샤가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아얏,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고개를 흔들 때마다 붉은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와.”

“꼬꼬가 네 마력을 먹고 저렇게 자랐대. 마법사님이 다녀가셨어.”

“마력요?”

“사실 꼬꼬가 고대 마수……. 마수라고 하기엔 너무 흉흉한 표현이다. 전설 속 동물 같은 거래. 네 마력으로 깨어나고 성장했다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네가 며칠간 앓아누웠던 거야.”

“와…….”

마샤는 꼬꼬가 신기한 듯 창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창문에 얼마나 얼굴을 들이댔는지 코와 입이 잔뜩 눌릴 정도였다.

암암. 신기하겠지.

아직도 한나와 신관들도 틈만 나면 꼬꼬 구경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니 말이다.

“밥 엄청 많이 먹겠네.”

고개를 끄덕거리던 한나가 멈칫했다.

잠깐, 감상이 겨우 그거냐?!

* * *

“마탑요?”

한나의 구구절절한 설명에 마샤가 창틀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답했다.

“너한테 어마어마한 마력이 있대. 그걸 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이번처럼 앓아눕지 않을 거고, 꼬꼬도 보호받으려면 마탑에 가는 게 좋겠지.”

“꼬꼬를 해부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걸 당할 녀석이야? 꼬꼬가 우리 생각보다 아주 강한 존재래.”

“흐응…….”

마샤가 입술을 쭉 빼고 고민에 빠졌다.

“거기 돈은 많이 준대요?”

“마탑이 괜히 마탑이겠어? 아니, 근데 넌 어린애가 무슨 돈을 그렇게 밝혀?”

“돈에 어리고 늙었고가 어디 있담.”

마샤가 낄낄 웃자, 한나도 따라 웃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선생님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근데 거기 깐깐한 할아버지들만 있는 곳 아니에요?”

“무슨 소리. 젊은 마법사들도 많을걸?”

“난 재미없는 곳은 싫은데.”

그래도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평소 마샤 성격으로 봐선 정말 싫었으면 이미 진작에 경기를 일으키며 말도 말라고 했을 테니까.

“마법에 관심 없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해요. 손에서 불도 나오고 얼음도 나오고 죽은 것도 막 살리고 그러지 않아요?”

응. 마지막 그거는 아니야. 얘는 또 겁나게 왜 이러는 거야?

“죽은 거 살리는 것만 빼고 다 가능할 거야.”

“에잉, 그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리 해골이 살아 움직이면 얼마나 귀엽겠어요.”

마샤가 침대 옆에 고이 모셔 둔 해골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응. 아니야.”

한나가 고개를 젓자 마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한나가 펄쩍 뛰는 반응을 즐기는 마샤였다.

“그럼 저, 떠나는 거예요?”

“당장은 아니지. 네가 가고 싶을 때 가면 돼.”

“일단 들어나 볼래요. 그 마법사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는지.”

사실 마샤 또한 자신이 또 쓰러진다거나, 꼬꼬가 이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평범한 짐승의 영역에서 벗어난 꼬꼬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모두 흩어지겠지만, 가장 먼저 떠나는 사람이 저는 아니었으면 좋겠거든요.”

마샤의 말에 한나는 조금 놀랐다.

설마 자신처럼 아이들도 보육원을 떠나는 날이나 이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곳을 나간다고 우리가 모두 남이 되는 건 아니야. 마샤.”

“알아요. 선생님이 무슨 얘기 하려는 건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마샤였지만, 한나는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 * *

“그걸 다 준다고?”

“선생님. 쟤 덩치를 봐요. 이거 가지곤 간식도 안 될걸요?”

마샤가 큰 보따리에 빵과 채소, 과일을 잔뜩 올려 두고 말했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이러다가 정말 거덜나기 딱 좋겠는데?

“거 뭐, 다음에 또 마탑 아저씨들 오면 지원 좀 해 달라고 하죠?”

“그건 좋은 의견이야.”

한나가 마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마법사 할아버지는 다시 보육원에 왔었다. 마샤와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샤는 의외로 진지하게 그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이어서인지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 한나는 한시름을 놓았다. 적어도 마샤가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니까.

결국 마샤는 마탑에 가기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 시기는 마샤가 다시 쓰러지거나 꼬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가 아니라면 보육원의 퇴소에 맞춰서 가는 것으로 말이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일이 잘 풀렸다.

“전 이거 주고 올게요!”

“마샤! 혹시 모르니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고!”

“푸핫. 저 꼬맹이가 절 잡아먹을까 봐요?”

한나는 슬쩍 창밖을 보았다.

……과연 저게 꼬맹이라는 귀여운 지칭이 어울리는 존재인가.

“흠흠, 하여튼 부리에 손 조심하고!”

“네네!”

한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마샤가 보따리를 들고 뛰어나갔다.

동산으로 나간 마샤가 꼬꼬를 와락 껴안는 모습까지 보고 한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

하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했다.

* * *

“네? 편지요?”

그날은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저한테요?”

“보육원 앞으로 온 것이니, 그대 소관이지.”

세자르가 툭 하고 책상 위로 편지를 건넸다. 그동안 복잡한 일이라면 신전이 알아서 처리한지라 어디서 연락이 올 일이 없던 보육원이었다.

“누가 편지를 보냈지.”

성질 급한 한나가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었다.

“연애편지는 아니고?”

“푸하하하,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호탕하게 웃는 한나를 보며 세자르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자르는 저 편지를 뜯은 한나가 놀라거나, 슬프거나, 당황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혼란스러울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보통 연락 올 곳 없는 보육원에 갑작스레 날아들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일 확률이 적었다.

“세상에.”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고 있었다.

“뭔데?”

“대…… 대공 저하의 편지인데요?”

“대공?”

한나는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 명칭에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여기서 만나는 높은 사람이라고 해 봐야 낮은 귀족이나, 신전의 신관들이 다였으니까.

“그……. 이안을 후원……. 하겠다는…….”

한나의 말이 지나치게 느리고 답답했다. 세자르는 한나의 손에서 편지를 가로챘다. 편지가 손에서 사라져도 한나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자르는 빠르게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오랫동안 북방을 떠돌다 돌아온 대공이 이안의 소식을 접했고, 아이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것.

“하여튼 그 동네는 핏줄이 문제야.”

황제를 말하는 건지, 대공을 말하는 건지 모를 세자르의 낮은 중얼거림이 한나의 귀에 꽂혔다.

“……이안을 데려가려는 거겠죠?”

“그렇겠지.”

“왜 갑자기 그럴까요?”

“이제야 황실 상황을 알았나 보지.”

세자르는 이안의 배경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가 신전으로 오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신전 내부 사람들의 조사였으니.

“이안에게 좋은 일일까요?”

원작에서도 이안이 대공에게 가서 황제가 되었던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쎄. 적어도 책이나 읽고 낮잠이나 자면서 사는 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황족들은 서로 연대하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권력 한 자락 때문에 대공은 사막 너머의 땅을 얻으러 야만족들을 정복하러 갔으니, 그 치열한 정글에서 황제의 사생아인 이안을 데려가 할 일이라곤 크게 좋은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좋은 소식은 아닌 거죠?”

“그댄 그리 이안을 모르나.”

“이안은 똑똑하고, 착하고, 아. 아이답지 않게 잘생기기도 했고…….”

한나가 이안에 대한 정보를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그 아인 절대 평범하지 않아. 그 두툼한 장갑 밑엔 발톱을 숨기고 저 높은 곳에 대한 열망은 무심한 눈동자 아래에 숨기고 있지.”

“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대신관님이 이안을 뭘 안다고…….”

한나는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아이가 읽는 책들을 본 적 있나?”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제목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던 것 같기는 한데.

“제국의 통치, 왕의 역사, 군주의 신념, 신제국, 공포정치.”

제목을 들어도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 한나와 다르게 세자르는 유독 심각했다.

“어쩌면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같은 걸까요.”

한나가 말을 덧붙였다.

어떤 이유에서 이안이 욕심을 가지든, 그것이 비극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길 바란다.

“겨우 그런 것으로 오르려 한다면 금방 나뒹굴겠지.”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나뒹군다는 게 몸인지 처지인지, 혹은 머리를 말하는 건지.

“하지만 그러기엔 그 녀석은 지나치게 똑똑하잖아?”

“그렇죠.”

“분명 생각이 있을 테지.”

“이 소식은 전해야겠죠.”

사실 한나는 이안이 평범하게 살길 바랐다.

마샤와 제레미도 원작과 다른 길을 가는데 이안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저 평범하게 산다면 좋을 텐데.

“우리가 그런 것처럼, 그 아이도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겠지. 숙명이란 것 말이야.”

“그것도 신의 뜻인가요?”

“제법 신관처럼 말을 하네.”

“뭐……. 예비라고 해 두죠.”

세자르가 피식 웃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게 누구의 뜻인지는.”

세자르는 때로 이렇게 알다가도 모르게 말을 하곤 했는데, 한나는 그럴 때마다 속이 답답했다.

“이안에게 전해야겠네요.”

한나는 오늘도 세자르의 깃털같이 가벼운 손인사를 받으며 방을 떠났다.

* * *

이안에게 소식을 전할 때 한나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이안이 많이 놀라거나 당황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말을 하는 도중에도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한나의 걱정과 달리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읽던 책을 조용히 덮으며 고개를 들고 한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겨우 이 대답이 전부였다.

대공이 누구냐, 왜 이제 자신을 찾느냐, 자신을 데려갈 것이냐, 후견인이 무엇이냐, 예상했던 그 어떤 질문도 날아오지 않았다.

덤덤하게 소식을 잘 들었다는 반응이 전부였다.

“그럼, 잘 생각해 봐.”

그래서 한나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던 책을 탁상에 올려놓았다.

‘군주론.’

책의 제목을 본 순간, 한나는 생각했다.

이안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등골을 타고 저릿한 전류가 흘렀다.

* * *

“반갑습니다.”

중앙 신전의 사제는 한나에게 아주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한나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네. 반갑습니다.”

하지만 한나에게 중앙 신전은 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들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건 알지만, 자신을 빌미로 세자르를 마수 사냥에 앞장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이 갈 수가 없었다.

“검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간단합니다. 저희가 가져온 도구에 손만 올리시면 순식간에 끝납니다.”

“그렇군요.”

신관들이 큰 궤짝에서 무언가를 끙끙거리며 꺼냈다. 그것은 수정구 같은 물건이었는데, 그 크기가 어린아이 몸만 하니 대충 보아도 무거워 보였다.

그저 투명하기만 한 커다란 수정구로 신력을 검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자, 여기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네.”

준비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한나는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천천히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 그동안의 짐작은 다 망상이었고 자신에게 신력이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수정구 안에서 시작된 작은 빛무리가 휘몰아치듯 투명했던 수정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밝아지던 빛이 이내 전구라도 켜 놓은 듯 눈부시게 빛을 뿜어냈다. 한나는 눈이 시려 눈을 찡그렸다.

“과연…….”

“이렇게 강한 빛이라니!”

신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신관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기까지 했다.

“제 신력이 검증된 건가요?”

“네.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요.”

“반응을 보아하니 제 능력이 제법 좋은가 보네요.”

“제가 이 일을 맡은 지 수년째인데 이렇게 강한 반응은 처음입니다.”

신관의 말에 한나는 앉아 있던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내리깐 눈이 다소 건방져 보이도록 의도해서 말이다.

“그럼 대화가 쉬워지겠네요.”

“예?”

갑작스러운 한나의 변화에 신관들은 어리둥절했다.

“설마 신전은 능력 있는 사람을 거저 데려가나요?”

“신관이 된다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세간에 큰 대우를 받고…….”

한 신관이 신력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고배를 마시며 떠나간 숱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신관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나는 그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마치 세자르가 하는 건방진 손짓과 닮아 있었다.

“스카우트를 하려면 그에 걸맞는 조건을 제시해야죠. 제가 이 보육원 선생으로 있으면서 얻는 만족과 행복이 커서 말이죠.”

“어떤 조건을 말씀하십니까?”

“돈은 말할 것도 없죠. 제도의 큰 저택 창고가 가득찰 만큼의 금은보화를 원해요.”

신관의 월급이 절대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신관이 되는 데에 금은보화를 달라고 청한 사람은 없었기에 담당 신관은 지금 아주 당황한 상태였다.

“주에 40시간 이상은 일하고 싶지 않고요.”

한나는 오래 생각해 온 듯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제 개인 연구실도 원해요.”

그것은 대신관들이나 가능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신관은 꾹 참고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귀족들을 위한 치료는 저 말고 다른 신관이 했으면 좋겠고요. 출장은 제가 원하는 때에만 갈 거예요. 아 참.”

“또 있습니까?”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감겨 있던 한나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면책권을 원해요.”

“면책권이요?”

생소한 단어에 신관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면책권. 교황의 권한으로 제국에서 통용되는 면책권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중 하나를 저에게 주길 바라요. 이걸 준다면, 앞선 요구 사항들 중 한두 가지 정도는 조절해드리죠.”

신관은 마치 여태까지 늘어놨던 그녀의 말들이, 모두 이 요구를 위한 밑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가볍게 덧붙인 것처럼 들렸지만 면책권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무거운 뉘앙스를 쉬이 흘려 버릴 수 없었다.

“그런 것이 필요할 일이 있습니까?”

치유계열 신관에게 면책권이 필요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왜 한나가 그런 것을 원하는지 신관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에 한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관들은 보통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죠?”

“무슨……?”

궁금증을 품은 신관들에게 한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신의 계시라고 해 두죠.”

얄미운 그 말은 신관들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 * *

결국 신관들은 한나의 무리한 요구를 잔뜩 적어 중앙 신전으로 떠나야 했다. 한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자르를 만났다.

“꽤 발칙한 조건을 걸었던데.”

“아, 면책권이요? 원래는 신관이 되고 나서 살짝 얻어낼까 했던 건데, 신력 검사를 하고 신관들 표정을 보자마자 ‘아, 이거다. 이건 된다!’ 하는 느낌이 오더라구요.”

한나는 마치 무용담을 말하듯 낮의 일에 대해 늘어놓았다.

“재미있네.”

“재미있으셨나요? 보통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그런 걸 요구했냐고 묻지 않나요?”

“살인 예정이라도 있나?”

“푸핫. 제가 누굴 죽여요?”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는 듯 한나가 세자르의 팔을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세자르의 진지한 시선이 한나의 시선과 얽혔다.

“반란이라도 꾀하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와.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면책권을 겨우 사탕 하나 훔치고 쓰기엔 아깝지.”

세자르가 신전 옆 정원으로 발길을 옮기자 한나도 따라 걸었다.

“인생이란 모르는 거잖아요.”

“치유능력으로 죄짓고 사는 게 더 힘들 것 같은데.”

“거 뭐, 높은 분 치료하다가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써먹죠.”

가볍게 웃고 있었지만 사실 한나는 아주 깊은 고민 끝에 내건 조건이었다.

교황이 자신에게 면책권까지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 한나는 그것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혹 꼬꼬가 어느 날 마을 하나를 날려 버린다든가, 이안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잘못된다거나, 제레미가 흑화해서 정말 암흑가의 수장으로 진로를 바꾼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걱정되는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교황이 면책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세자르는 보통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부분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견문이 넓어서요.”

한나의 대답에 세자르가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피식 비웃었다.

“그렇게 비웃을 것까진 없잖아요.”

한나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얻길 바라.”

세자르는 이유가 뭐든, 한나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녀의 천성이 착하고 어질다는 것은 신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나쁜 의도로 면책권을 원할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세자르 님은 신전에 사기 취업 당한 거예요. 세상에 신력 있다고 추켜세우면서 홀랑 잡아다가 부려먹는 게 어디 있어요?”

“그대 같은 생각으로 접근하는 신관은 이 제국에 없을 거야.”

“일은 일이죠.”

한나는 뼛속까지 현대인이었다.

신이니 명예니 선망이니 그런 거 다 개수작이라고!

“세자르 님의 연봉협상 같은 게 있을 때 절 불러 주세요.”

“마치 계속 보고 지낼 것 같은 말이군.”

세자르는 미래를 그리는 말에 자신과 한나가 나란히 있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중앙 신전으로 가면 한솥밥 먹는 거 아닌가요? 지금처럼.”

“지금처럼…….”

북부의 검은 사막으로 가는 일만 생각했지 그 후의 일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자르는 새삼, 자신이 돌아올 때쯤엔 많은 것이 변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뒷짐을 지고 하늘하늘 걷고 있었다.

정원의 푸른 향이 상쾌했다. 요 며칠간 혼란했던 감정들은 점차 정리되고 있었다.

변화는 두렵고, 미래는 안개 속의 빛처럼 흐릿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니 나쁜 것이 없었다.

마샤는 마탑으로 가 흑마법사가 아닌 어엿한 마법사가 될 것이고, 제레미는 원작처럼 뒷골목을 구르지 않아도 되었다.

아픈 손가락이라면 이안이었지만, 그동안 한나가 지켜본 이안은 원작처럼 냉혈한 인간이 아니었다.

대공가로 간다면 같은 제도이니 지속적으로 연락할 수도 있을 테고, 필요하다면 이안을 위해 대공가를 드나들 용의가 있었다.

이별이라고 해 봐야 조막만 한 제도 내에 갈라져 있는 것인데 뭐.

“다만 세자르 님에겐 조금 미안하네요.”

“뭐가?”

“사막으로 가는 일이요. 지금이라도 보내지 말라는 조항을 넣을까요?”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라니까.”

세자르는 아직도 그 얘길 하냐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한나와 아이들의 일이 아니라도 사막으로 갈 것이었다.

세자르도 자신의 성력을 언제까지고 사막에 둘 수는 없었다. 겸사겸사, 사막의 일을 마무리 지을 때였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그는 필연적으로 사막으로 향하게 된다.

“신전에서 저렇게 고분고분 기다려 주고 제 말을 들어주는 게 세자르 님의 입김이 있었다는 걸 알아요. 감사해요.”

“귀에 딱지 앉겠군.”

세자르가 손가락으로 귀를 파내며 말했다.

그놈의 감사하다는 말은 몇 번째인지.

“아마 일주일 후면 난 여길 떠나게 될 거야.”

“그렇게 빨리요?”

“그나마 늦춘 거야.”

“아…….”

한나는 말끝을 흐렸다. 막상 세자르가 떠난다니 마음 한구석이 휑하게 비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떠나는 건 그대가 마무리해야겠군.”

“원래 제 일인걸요.”

“이안이 대공가에 연통을 했어.”

“이안이요?”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연락을 하다니. 어딘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안도 곧 떠나게 되겠지.”

“다들 제 길을 떠나네요.”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보는 한나를 보며 세자르는 침묵했다.

“영원하지 못할 거란 건 알았지만, 마음 한편에선 마냥 아이들과 함께 지낼 줄 알았나 봐요.”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푸른 달빛보다 쓸쓸해 보였다.

“보육원 선생님은 제 적성이 아닌 게 분명하네요. 이렇게 정이 들어서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진짜 보육원 선생님이었다면 분명 버티지 못했을 감성이었다.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한나가 물었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신관의 기도요.”

문득 한나는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기왕이면 신에게 직행으로 닿는다면 더 좋지 않은가.

그에 세자르가 답했다.

“뭐, 간단해. 간단하지만 뭇 인간들은 할 수 없기도 하지.”

“뭔가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기도 하나만을 바라는 거지.”

“그건 너무 어려운데요? 저처럼 욕심 많은 사람은 절대 불가예요.”

세상에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버리고 하나만 바란단 말인가?

“음…….”

하지만 한나는 어쩌면 아주 짧은 순간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번 해 볼까요?”

한나가 발걸음을 멈추고 싱긋 눈을 접으며 말했다.

“그러든지.”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곧장 눈을 꾹 감았다.

겨우 10초 남짓, 욕심을 털어 내는 건 해 볼 만하지!

그렇게 한나가 눈을 감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바람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는 집중했다.

“…….”

세자르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정원에서 달빛을 받으며 기도를 하는 한나의 모습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많이 달랐다.

반질반질한 이마 밑으로 조금 찡그려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마 잡념을 털어 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아래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 같이 안쓰러웠다.

집중을 할 때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버릇은 오래 같이 지내며 발견한 습관이었는데, 오늘도 빼놓지 않고 아랫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세자르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저렇게 손까지 경건하게 포개고 바라는 기도가 무엇일까.

“와!”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세자르는 심장이 멎을 듯 놀라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빛나던 사람이었나.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별빛을 담아 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기도라는 거 완전 어렵네요!”

“……뭘 빌었는데.”

질문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잇자국이 박힌 아랫입술에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세자르의 그런 시선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한나가 샐쭉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세자르 님이 사막에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달빛에 홀렸을까.

그 환한 미소에 세자르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느릿한 손이 한나의 뺨을 감싸고, 세자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한나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내리깔린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한나의 얼굴이 가득차 있었다.

그의 동작이 멈췄고, 내뱉는 숨마저 조심스러워졌다. 바짝 다가온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축복은 어떻게 내리는지 알고 있나?”

“네? 축복? 어떻…….”

어떻게 내리냐는 한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자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깜박. 깜박.

한나의 눈꺼풀이 빠르게 움직였다.

‘뭐지?’

뒤늦게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고, 뇌도 정지된 것 같았다.

이윽고, 세자르의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한나는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여전히 세자르의 손은 한나의 뺨과 목을 받친 상태였다.

“축복은 키스로 전하지.”

……잠깐만. 그건 손이나 이마 아닌가요?

한나는 이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밤새 한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 * *

“커티스 님.”

“네. 한나 선생님.”

“축복은 키스로 전한다는 거 알고 계세요?”

“신관의 축복이라면 맞습니다만…….”

커티스는 한나가 말하는 키스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키스와 조금 다른 물음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제국 사람들은 원래 조금 개방적인 편인가요.”

“……세자르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커티스의 입에서 나온 세자르라는 이름에 한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실 한나는 지난 며칠 동안 그날 밤 있었던 일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 심장은 자진모리장단을 때리고 있는데 지나가면서 만난 세자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어.’ 인사하며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심각했던 건 자기뿐이었다는 생각에 허탈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대답이었다.

“뭐. 방식이야 여러 가지니까요.”

커티스는 가련한 세자르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커티스가 세자르를 보필하면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축복’ 따위를 내리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본 역사가 없었다.

받는 건 더더욱.

“그렇죠? 그래. 그런 거지! 참 나, 내가 무슨 생각을. 호호.”

잠시 고민하던 한나가 속 시원한 듯 호탕하게 웃자, 커티스는 어째서인지 세자르가 불쌍해졌다.

세상 불쌍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존재에게 동정심이 들다니.

“……여러모로 안타깝네요.”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첫 이별이었다.

정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말이다.

부패한 신관들을 떠나 보내던 과거의 날과는 확실히 다른 이별이었다.

“밥 잘 챙겨 먹어요.”

“어어.”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래.”

“죽지 말고.”

까딱까딱. 그쯤 했으면 됐다는 듯 세자르가 손을 저었다.

“편지하세요.”

한나는 세자르를 보내면서 걱정이 많았다.

사막이 그렇게 위험하다는데 저 어리버리한 대신관이 또 꾸벅거리다 마수에게 한입거리가 되진 않을까, 뭐 그런 걱정 말이다.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한나는 앞치마로 눈가를 쓸었는데, 멀리서 보는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절절한 이별이야?’

흡사 오해하기 딱 좋은 그림이었다.

“선생님.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함께 배웅 나온 마샤가 해골을 뱅뱅 돌리며 말했다.

“너흰 선생님 마음 몰라. 사실 대신관님은 보육원 네 번째 식구와도 같은 느낌이었거든. 너희를 보내는 것만큼이나 슬프단다.”

한나가 조곤조곤 설명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이 피식 웃으며 세자르를 보았다. 그에 세자르가 발끈한 듯 한마디 거들었다.

“내가 애야?”

“아니 뭐……. 매일 같이 밥 챙겨 주고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세자르의 미간에 줄이 갔다.

“너희도 인사해야지.”

한나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건강히 다녀오세요.”

“마수 같은 거 다 없애 버려요!”

“살아서 돌아오시길 바라요.”

마샤, 제레미, 이안은 각자 성격대로 인사를 했는데, 세자르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자 어딘지 가슴 한편이 찡해졌다.

‘애들 두고 출정 가는 가장 같군.’

세자르는 이상한 기분에 목 뒤를 긁으며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던 세자르가 획 뒤돌아 한나에게 말했다.

“마지막 축복 같은 건 없어?”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한나는 얼굴을 구겼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까랑까랑한 한나의 대답에 세자르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낮은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하얀 물결이 산을 따라 내려갔다.

하얀 신관복도, 성기사들의 하얀 갑옷도 이제는 너무 눈에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올 때는 그렇게 신전을 떠들썩하게 채우며 들어섰던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지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라는 안다더니.”

그들이 떠난 자리는 너무도 표가 났다. 특히 아이들과 다시 들어선 신전은 서늘한 기운이 가득해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한나는 괜히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아이들도 자기처럼 휑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

* * *

그날 밤 한나는 동산에 앉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신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진 신전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그런 한나의 곁으로 이안이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아요?”

“이안, 아직 안 잤어?”

“자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혼자 나와 있길래요.”

한나는 이안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뉘집 자식인지 참 인성이 좋지 않은가?

“슬퍼요?”

어느새 한나의 옆에 앉은 이안이 물었다.

“누군가 떠난 뒤엔 빈자리가 허전하잖아. 그냥, 그래서 그래. 슬프긴.”

“대신관님을 좋아했어요?”

“콜록.”

이안의 말에 마시던 우유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뭐, 무, 무슨 말이야?”

이안은 한나의 그런 생생한 반응에 살짝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냥 던진 말에 그렇게 반응하면 기분이 나쁜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그러지.”

어색한 웃음이 뒤따르자, 이안이 제 무릎 위로 비스듬하게 턱을 괴고 한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떠나도 많이 허전할 것 같아요?”

“말이라고. 내 생의 한 부분을 떼어 내는 느낌이겠지.”

한나의 대답에 이안의 시선이 신전 방향으로 내려앉았다.

“저 잊지 마요.”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목소리.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잊을 사람이 따로 있지!”

세상에 어떻게 자식 같은 아이를 잊는단 말인가?

한나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혹시 이안……. 가기 싫은 거면 더 함께 있자.”

이안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떠나기 싫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에 이안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신관 아저씨가 부럽더라고요.”

“응? 왜?”

대신관이라서? 매일 일은 안 하고 낮잠만 자서? 잘생겨서?

아, 이건 아니지. 우리 이안이 어려서 그렇지 절대 빠지지 않는 외모인걸.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잖아요.”

“엥?”

그 이야기가 왜 갑자기 나오는 건지 한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찍 떠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엔 그런 마음도 있어요.”

“어……. 음. 미안, 이안. 내가 너처럼 똑똑하지 않아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한나의 솔직한 말에 이안이 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면 선생님 말고 이름으로 부를래요.”

“뭐?”

하극상……? 아, 아니지.

하긴 어차피 영원히 선생님일 수는 없다.

이안이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이 이안에게 황제 폐하, 하고 납작 엎드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상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땐 친구 하면 되겠다.”

한나의 발랄한 대답에 이안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잘게 웃었다.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랏빛 눈동자에는 별빛을 받아 하얗게 눈이 부신 한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좋아요.”

* * *

결국 가장 먼저 보육원을 떠나게 된 아이는 이안이었다.

“이안, 선생님이 대공저까지 같이 가 줄까?”

이안을 태워 가기 위해 대공가에선 으리으리한 마차를 보냈는데, 한나는 그 마차를 보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금을 치덕치덕 바르고 보석으로 장식한 마차는 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안락했지만 이안이 혼자 타고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장난기 많은 마샤와 제레미도 이안이 떠나는 날은 어째서인지 말이 많이 없었다.

이안이 챙긴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좋아하던 책 몇 권과 간단한 옷가지가 전부였는데, 그 작은 손에 들린 가방을 보자 한나는 또 눈물이 터졌다.

“……네가 좋아하는 장갑 많이 넣어 뒀어.”

그동안 함께한 시간 동안 이안에게 준 것이 이리도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그런다.”

한나가 눈물샘이 터진 것은 이미 이안이 대공가로 떠나기로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된 그날부터 계속되었던 일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툭, 이부자리를 챙겨 주다가도 툭, 하다못해 동산에서 볕을 쬐는 이안을 보면 또 툭!

툭하면 터지는 눈물샘 때문에 이안은 차라리 얼른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한나의 눈이 언제까지 퉁퉁 부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이안, 절대 기 죽지 마. 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야.”

괜히 대공가에서 눈칫밥을 먹진 않을까 싶어 한 말이었다. 한나는 짐가방을 들고 오도카니 서 있는 이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깔끔하기로는 세계 최고인 이안에겐 사실 오히려 거슬리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멀쩡한 제 옷깃을 두 번, 세 번 만지는 한나의 손길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살짝살짝 스치는 한나의 손 온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괴롭히면 선생님한테 연락해.”

“선생님이 혼내 주려고요?”

한나의 아무 말에 이안이 웃으며 답했다.

“아무렴. 동네방네 소문내. 너한텐 성격 안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 함부로 하지 말라고.”

“무섭네요.”

“우리 이안 못 보는 사이에 훌쩍 커서 선생님이 못 알아보면 어쩌지.”

이미 한나는 애써 말린 눈시울이 또 젖어 들고 있었다.

“저 죽으러 가는 거 아닌데요. 선생님.”

“알지, 알아. 좋은 곳 가는데……. 미안. 선생님이 이별에 약한 편이야.”

이안이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에 끼워진 장갑을 벗어 냈다. 그의 손이 한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걱정 말아요. 우리 다시 만날 테니까.”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응.”

다시 만나자는 흔한 말이 무어라고 한나는 꺽꺽거리며 울었다. 한나가 이안의 몸을 껴안자, 이안은 조용히 한나의 등을 토닥였다.

언젠가 비 오는 날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안의 옷이 한나의 눈물로 뜨끈하게 젖어 들고 있었지만,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안은 한나의 등 너머로 괜히 돌멩이를 툭툭 차며 입을 내밀고 있는 마샤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

이안의 인사에 마샤가 끙, 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그러곤 이안을 안고 있는 한나와 이안을 동시에 껴안았다.

팔이 짧아 다 감싸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나 역시 마샤를 함께 껴안았다.

“참 나.”

그 모습에 제레미는 무슨 대단한 이별이라고 저렇게 난리냐며 툴툴거렸다.

그러면서 괜히 찡하게 달아오르는 제 코를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잠시, 이별이었다.

* * *

“들고 갈 물건이 그것뿐이야?”

제레미는 기사 학교 입학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나는 달랑 검만 집어 드는 그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어차피 가면 다 주는걸요!”

“그래도 정든 물건은 챙기지…….”

“선생님이 정리해 주세요!”

쾌활한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슬프게 들렸다. 그나저나, 제레미가 떠난 자리를 홀로 정리해야 하다니.

“무섭지는 않아?”

“뭐가요?”

“낯선 곳에 간다는 게.”

“전 그런 거 안 무서운데요?”

제레미는 늘 그렇듯 자신감이 넘치고 당찼다.

“너의 그런 성격이 좋긴 하다만…….”

“선생님은 선생님 걱정이나 해요. 그렇게 매번 슬퍼서 어떡해.”

한나의 힘이 없는 목소리에 제레미가 혀를 쯧쯧 찼다. 제레미는 떠나는 자신보다 혼자 청승을 떨고 있을 한나가 걱정이었다.

“선생님! 제 4호 해골 못 보셨어요?”

“그건 어제 가방에 넣었잖아. 마샤.”

그에 비해 마샤는 자신의 물건을 아주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1호부터 7호까지의 해골모형과 인형들, 꼬꼬의 장난감에서 간식까지 알뜰살뜰 가방에 욱여넣고 있었다.

덕분에 가방은 무려 3개가 되었다. 자기 속옷 하나 안 챙기겠다는 제레미와 비교하자면 정말 극과 극이었다.

“같은 밥 먹고 자랐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둘의 극명하게 다른 성격이 신기했다.

“마샤! 그것도 넣을 건 아니지?”

“왜요?”

“마탑에선 드레스 안 입어!”

마샤가 자신의 옷장에서 드레스를 하나씩 꺼내자, 한나는 기겁하며 만류했다. 이 옷들까지 다 챙기면 가방 3개가 웬 말인가, 10개는 거뜬히 찰 텐데!

옷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마사갸 프릴과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좋아하는지라 부피를 많이 차지했다.

“거기선 정해진 옷만 입는대. 마샤. 아쉽지만 옷은 최소한만 챙기자. 어차피 금방금방 자라서 못 입게 될 텐데.”

“힝.”

아쉽다는 입술을 내미는 마샤를 보며 한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건 아닌 거야!

어쩌다 보니 마샤와 제레미가 떠날 날이 같아졌다.

사실 마샤는 더 여유 있었지만 제레미가 떠나고 나면 저도 슬퍼질 것 같다며 일정을 당겼다.

한나의 의견도 같았다. 마샤가 혼자 남아 슬플 바에는, 함께 퇴소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오늘 우리 그러면 파티하는 거예요?”

“응. 동산에서 구워 먹을 고기도 잔뜩 사 놨어. 선생님 이제 장작 준비하러 가야겠다!”

통돼지까지는 아니라도 두툼한 고기를 구워 동산에서 먹을 계획이었다.

아이들이 유난히 좋아하던 고기 파티.

이럴 줄 알았으면 월급을 탈탈 털어서 매일같이 고기 파티를 해 주었어야 했는데.

또 못 해 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짐 싸고 있어! 선생님 저녁 준비할게!”

“네에.”

“네.”

두 아이가 밝게 대답했다.

* * *

타닥타닥.

조금 늦은 준비 때문에 동산에 모였을 땐 이미 하늘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둘렀어야 했는데. 미안해.”

날이 쌀쌀해지고 있어서 괜히 밖에서 고기 파티를 한다고 한 건 아닌지 한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게 더 분위기 좋은데요?”

“나도!”

제레미가 감자를 장작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 순간, 툭 하고 던져진 감자를 보자 이상하게 이안이 생각났다.

“이안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 녀석 걱정하는 시간이 아까워요. 세상에서 제 앞가림 제일 잘할 녀석인데.”

“그렇긴 하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의 말이 다 맞았다. 이안이라면 어디서든 똑 부러지게 잘 지낼 텐데.

하지만 이안이 대공가로 간 이후, 잘 도착했다는 짧은 서신 이후로 이렇다 할 소식이 없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적응하느라 바쁘겠지.”

한나는 얼른 이안에 대한 생각을 털어 냈다.

오늘은 제레미와 마샤를 위한 시간이니까.

“고기 맛있어요!”

제레미가 접시 위에 썰어 놓은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꼬꼬도 한입!”

마샤가 이제 큰 덩치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꼬꼬에게도 고기를 던져 주었고, 꼬꼬는 공중에서 고기를 낚아채 오물오물 씹어 넘겼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한나는 볼이 터져라 고기와 채소를 밀어넣는 아이들과 꼬꼬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이렇게 제 음식을 잘 먹어 줄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 내 정신 좀 봐. 얘들아 먹고 있어!”

한나는 급히 보육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깜박하고 챙겨 나오지 않아서였다.

“음? 뭐지?”

“또 새로운 음식 개발한 거 아닐까?”

아이들은 한나가 마지막까지 음식 모험을 하려나 생각했다.

“얘들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보육원을 가로질러 상자를 가지고 나온 한나가 방긋 웃으며 아이들을 불렀다.

“그게 뭐예요?”

마샤의 질문에 한나는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붉은 천으로 싸여 있는 긴 무언가와 네모난 물건들이 있었다.

“선생님 선물이야.”

“와! 선물!”

제레미가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옷에 슥슥 닦아 내며 달려와 상자 앞에 앉았다.

“제 건 뭐예요? 이건가?”

“응.”

제레미는 기다란 물건을 집어 들었다. 사실 제레미는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것의 정체를 이미 파악했다.

“헤…….”

제레미가 헤벌쭉 웃으며 붉은 천을 거둬 냈다. 천 안쪽에는 검이 있었다. 장식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검집과 손에 쥐기 편해 보이는 손잡이가 제레미의 눈길을 끌었다.

마치, 제 손에 딱 맞춘 것처럼 적당한 크기였다.

아마 이 검을 사면서 몇 번이고 자신의 손 크기를 가늠했을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와.”

“제레미의 첫 검은 선생님이 선물하기로 했었는데, 모이세이 님이 먼저 선물하긴 했지만 나도 챙겨 주고 싶었어.”

“선생님…….”

“선생님이 박봉이라 그렇게 좋은 건 아니야. 그래도 연습하기에 나쁘지 않을 거야. 아주 튼튼하고 견고하다고 했거든.”

한나의 말처럼 검은 귀족들이 뽐내기 위해 장식하는 것과 달리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제레미는 그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소담한 것이 마치 한나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도 새겨 뒀으니 잃어버릴 일도 없을 거야!”

“으…….”

제레미가 검을 꽉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진짜 너무 좋아요!”

기분이 한껏 좋아진 제레미는 양팔을 벌리고 달려와 한나를 끌어안았다. 마샤처럼 살갑게 달라붙는 편이 아닌 제레미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니 한나는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내 선물은 뭐려나?”

제레미의 반응에 마샤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응? 이건…….”

마샤가 연 상자에는 알이 굵은 보석 반지가 들어 있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석을 가공한 보석이 있으면 마력을 운용하기 편하다고 해서 사 봤어. 상급은 아니지만, 네가 연습용으로 사용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야. 네 머리색처럼 붉은 걸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한나는 마샤의 선물에 자신이 있었다.

저렇게 예쁜 보석 반지를 어떻게 싫어하겠는가!

“대애박……. 그럼 이건요?”

반지의 옆에는 줄이 긴 목걸이가 있었다.

“꼬꼬 목걸이.”

거기엔 꼬꼬의 목에 넉넉하게 맞는 튼튼한 줄로 만들어진 붉은 보석 목걸이가 있었다.

[그륵!]

마치 자기 선물인 것을 아는 양 꼬꼬가 그릉거리며 마샤의 옆에 섰다. 그런 꼬꼬를 보며 한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걸어 달라는 거야?”

“음. 꼬꼬 주기 아까운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꼬꼬 목걸이를 네가 달겠다고?”

한나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륵!]

그 말도 알아들은 것인지 꼬꼬가 짧게 그릉거렸고, 마샤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목걸이를 꼬꼬의 목에 걸어 주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더니.”

“예쁘기만 한데? 꼬꼬! 한층 멋있어졌어!”

[그륵!]

꼬꼬를 보며 방방 뛰는 한나를 지켜보던 마샤가 반지 위로 손을 올렸다. 보석을 작은 손가락으로 쓸어 보곤 다시 상자를 닫았다.

그 모습을 본 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해?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바꿔 줄까?”

“……아껴 둘래요.”

마샤의 말에 한나는 조금 놀랐다. 마샤라면 냉큼 손에 끼고 신난다며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닐 줄 알았는데.

겨우 보잘것없는 작은 선물을 아낀다는 말에 어딘지 쑥스러워졌다.

“마샤, 그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야. 마탑에 가면 더 좋은 것도 많이 생길 거야. 연습용으로 써.”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걸 그렇게 써요.”

“세상에는 더 예쁜 게 많다니까?”

마샤의 반응에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감동스러워하는 건지.

“그럼 두 번째로 예뻐졌을 때까지만 아낄래요.”

“손에 끼고 아껴 주면 안 될까?”

아끼면 똥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저러다 마력석 효과가 똑 떨어져 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음……. 그럼.”

결국 마샤는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조금 헐렁한 크기였지만 말이다.

“너무 잘 어울린다.”

마샤가 제 손을 보며 웃자, 한나도 덩달아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고마워요. 선생님.”

“너희가 좋아해 주니 내가 더 기쁘다.”

사실 한나는 아이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해야 했다.

특히 마력석은 상급이 아니라도 그 가격이 어마어마했기에 주머니를 열면서 손을 덜덜 떨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큰마음 먹고 산 것인데! 뽕을 뽑아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 아닌가?

“선생님! 제가 기사 돼서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줄게요!”

제레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말? 선생님 밥도 많이 먹고 사치도 심한데?”

“그 정도는 제가 먹여 살려야죠!”

“네가 왜 선생님을 먹여 살리냐?”

마샤는 시큰둥하게 제레미에게 대꾸했다.

“그야 내가 선생님이랑 결혼할 거니까?”

“응?”

“미친.”

그 말에 한나도 마샤도 당황했다.

결혼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선생님이 우릴 책임졌으니, 나도 선생님을 책임져야지!”

……응, 아니야. 그런 거.

“제레미,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는 거란다.”

“알아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제레미가 코웃음을 쳤다.

“가족 간의 그런 사랑 말고, 음……. 남녀 간의…….”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켜 줬어야 했나.

“뭐, 크면 알게 되겠지.”

잠시 고민하던 한나는 픽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원래 아이들은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커서 엄마랑 결혼할 거야! 그러지 않는가?

제레미의 행동도 딱 그 정도의 선이라고 생각했다.

뭐, 저맘때 아이들은 다 그렇지. 하여튼 순진하고 귀엽다니까.

“네 눈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계속 선생님이면요? 전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예쁜데요?”

제레미의 말에 한나는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몇 년만 지나 봐. 선생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걸.”

한나는 제레미의 말을 재롱부리는 아이의 말처럼 넘기며 장작으로 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쁘다는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후후. 눈은 높아서. 하여튼.”

한나의 말에 마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별이 떨어지는 동산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나와 아이들은 밤이 늦도록 떠들었다. 오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언제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겠지만 이야기를 보태고 보태어도 아쉬움은 털어지지 않았다.

장작이 타고, 꺼지는 긴 시간 동안 동산은 떠들썩했다. 이날을 끝으로, 해가 뜨자마자 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각자의 인생을 찾으러 떠나는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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