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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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나와 이 아이들의 첫 만남은 평범했다. 천진하게 인사하는 이 꼬마들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기가 소설 속 세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분홍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라니.’
이곳은 신전에 딸린 작은 보육원이었다. 그리고 이 몸은 그곳에서 아이들을 보육하는 보육교사였다.
보육원에서 15년을 자란 이 몸의 주인은 사제까지는 되지 못했고, 보육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것은 몸 주인의 기억이 어렴풋이 스며들어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의 첫 출근 날에 이 몸으로 빙의된 것이었고, 귀여운 아이들을 만났다.
“어…… 그래. 안녕? 그러니까 너희 이름이…….”
“마샤요!”
“제레미.”
“이안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활달해 보이는 아이가 마샤.
검은 머리에 개구쟁이 같은 아이가 제레미.
반짝이는 금발에 무표정하고 무심해 보이는 아이가 이안.
아이들의 이름을 듣게 된 한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같아서 기시감이 들었다.
‘한글 이름도 아닌 저런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을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읽었던 한 소설이 뇌리를 스쳤다.
‘나쁜 놈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소설이었지.’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며 친구가 추천한 그 소설은, 반 이상이 피가 낭자하는 폭력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소설 속 주인공들과 이 아이들이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이 아이들은 주인공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일단 소설 속 인물들은 성인의 모습으로만 나왔으니, 귀엽고 말랑말랑한 이 꼬마들이 그 귀신같은 악당들과 겹쳐 보일 리 없었다.
에이, 설마……. 하다가도 문득 아이들의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악당들과 빼다 박은 것처럼 같다는 것과,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보육원 동기였다는 것이 떠오르자 의심이 짙어졌다.
‘맙소사. 정말?’
고민은 짧았다. 결국 그녀는 이곳이 판타지 소설 [찬란한 악당들의 세계] 속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자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 그러니까, 내 이름이…….”
잠깐, 설마 이 이름은…….
“한나 선생님?”
망했다.
그저 평범한 인물에 빙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나’라는 이름의 보육교사라면 아이들을 구박하다가 신전이 박살날 때 가장 먼저 죽임당하는 인물 아니던가?
시체의 조각조차 찾을 수 없게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그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
올망졸망 귀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보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너희가 날 죽일 애들이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하필, 로맨스물도 아니고 힐링물도 아닌 맨날 피가 낭자하는 폭력적인 소설을 읽었을까.
그중에서도 일찍이 죽어 버리는 ‘한나’라는 인물에 빙의한 것일까.
그 소설을 보면서 ‘이게 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이야. 작가가 잘못했네. 애들을 왜 이렇게 키웠담.’이라며 함부로 입을 놀려서일까?
아니면 이 조연과 자신의 이름이 우연히 같아서?
부모님이 지어 준 한나라는 이름 때문이라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현실의 몸은 어떻게 됐지?’
이 몸에 빙의 되기 전, 책을 읽는 도중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며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까맣게 물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후에 눈을 떴을 땐 이 분홍머리의 여자 몸에 빙의한 후였다.
‘설마 그대로 죽어 버린 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책 속으로 빙의된 거라고?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다.
“……맙소사.”
결국 이유야 어찌 됐든, 기절할 뻔했던 첫 만남이었다.
* * *
그날 밤, 한나는 곧장 다시 짐을 챙겼다.
처음에는 정말 진지하게 빙의된 몸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혹시 원작의 내용처럼 죽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했지만 역시 죽는 건 무서웠다.
죽는다고 원래 몸이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아이들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은걸.’
어중간하게 원작도 파괴하고 죽을 바엔, 차라리 이 목숨이나 살려서 떠나는 게 나은 선택이다.
“세상에, 내가 그 악독한 보육원 악당이라니!”
어떻게 빙의를 해도 이런 몸에 빙의를 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이 몸이 아이들을 학대하기 전이라는 거야.’
빨리 이곳을 뜬다면 영원히 그 아이들과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한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짐 챙기기에 박차를 가했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난 진짜 한나도 아닌걸. 여기 있어 봐야 의심만 살 거야.”
영혼이 바뀐 사람이라는 걸 누가 알아차리는 것도 걱정이었다. 여러모로 이곳을 떠나 새 삶을 시작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래. 나가서 기술 하나 배우면 뭐라도 먹고 살겠지.”
두려움과 조급함은 그녀의 입을 쉴 새 없이 만들었다. 짐을 챙기긴 챙겼지만 제 물건이 아니라서인지 챙길 물건이 적었다.
그나마 깔끔한 옷가지와 돈, 값어치 있어 보이는 것을 대충 보따리에 욱여넣는 게 고작이었다.
‘얼른 떠나자!’
그렇게 한나는 어색하게 보따리를 안아 들고 어둠을 틈나 몰래 숙소를 나섰다.
그녀의 방은 아이들의 숙소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이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부디 좋은 선생님 만나서 착하게 자라렴. 이왕이면 악당도 되지 말고, 사람도 막 죽이지 말고, 마을도 불태우지 말아 줘.’
한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갔다.
‘불이라도 가지고 나올걸. 왜 이리 어두워.’
그러고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움직였다.
‘그래도 사직서는 내고 떠나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한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새로운 사람 구할 때까지라도 있어 달라고 하면 어떡해. 정이라도 들거나 그사이에 밉보이면 안 되지. 그냥 냅다 튀는 게 답이야.’
어차피 악의 구렁텅이인 신전 따위 좋게 끝맺음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한나는 살금살금, 계속 전진했다.
“선생님.”
“으억!”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짐보따리도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마, 마샤?”
빼꼼 열린 문틈으로 곰 인형을 안아 든 마샤가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이내 마샤의 옆방에서도 문이 열리고, 제레미가 한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어디 가요?”
“어, 어?”
그에 이안 역시 방문을 열었다. 다들 눈에 잠이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무슨 한밤중의 모임이란 말인가.
얘들은 꼬맹이들이 잠도 없어? 잠귀는 왜 이렇게 밝아?
“그…… 그게…….”
한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샤와 아이들이 바닥을 구르는 짐보따리를 발견했다.
“……선생님…….”
상처받은 눈.
손에 들린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마샤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 들기 시작했다.
“우릴 버리고 가는 건가요……?”
그 순간, 한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버리다니! 말을 왜 그렇게 하니 이 친구야!
마샤의 버린다는 말에 한나의 몸이 움찔 튀었다.
“뭐, 뭐?”
졸지에 그녀는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아니, 그게 맞는 건가? 목숨 건지겠다고 도망가는 건데 아이들을 버리고 가는 매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마, 마샤…….”
“정말 떠나는 건가요?”
이안이 말을 거들었다. 무표정하기만 했던 이안의 얼굴에도 그늘이 져 있었다.
“거봐. 새로운 선생님도 우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제레미가 화를 내며 문을 뻥 걷어찼다. 그렇게 한나는 갑자기 죄인이 되었다.
‘이거, 이대로 신전을 나갔다간…….’
정말 어른이 된 누군가가 버림받은 복수를 하러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저 제레미는 어느 날 잘 자다가 일어나서 개떡 같은 보육원 시절 기억이 났다며 기어코 자신을 찾아서 칼침을 놓을 것 같기도 하고.
“……어…… 음…….”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한나는 마샤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포착하고야 말았다. 아이들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져 있었다.
‘이 아이들…….’
한나가 생각했던 악당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작고, 상처받은, 어린아이는 절대로 그녀가 생각했던 악당들이 아니었다.
“선생님…….”
아무리 아이들이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고 해도, 상처받은 것 같은 눈으로 본다고 해도! 뒤돌아보지 않고 튀어야 했다.
‘하지만…….’
문득,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나!’
10년 전.
생각해 보면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누나! 누나! 같이 슈퍼 가자!’
평소에 함께 슈퍼에 가 달라는 동생의 말을 거절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그날은 유독 피곤했다.
겨우 길 하나 건너면 그만인 가까운 슈퍼를 함께 갈 수 없을 만큼.
울고불고 떼쓰는 동생이 귀찮기만 했고, 얼른 다녀오라며 매정하게 동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동생이 떠났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것은 씻어 내지 못할 멍울이 되었다. 한동안 한나에게는 동생과 비슷한 키의 아이들 뒷모습만 봐도 달려가서 껴안고 펑펑 울 정도로 헤어 나오기 힘들었던 슬픔이었다.
‘누나, 같이 가 주면 안 돼?’
그 한 마디가, 여전히 가슴속 비수로 남아서.
그래서 한나는 제 기억 속에 남은 동생 또래의 아이들에게 유독 약했다.
“이렇게, 우릴 두고 가시는 거예요……?”
마샤가 다시 한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냐.”
아이들의 모습이 동생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그 순간, 매정하게 아이들을 떠나지 못한 것은.
“선생님 어디 안 가. 방이 불편해서 옮기려던 거야. 걱정 마. 응? 마샤, 울지 말고…….”
한나는 아이들이 울면 제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마샤가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선생님, 저희 버리고 가면 안…… 히끅, 안 돼요.”
“응. 선생님 안 가.”
결국 한나는 마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레미와 이안에게 어색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들이 제 동생이 아님을 알지만, 혹은 소설 속 활자로만 존재하는 허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우는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다.
심지어 불쌍한 아이들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이들을 매정하게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내 무덤을 내가 파는구나.’
그래도 다행이라면 조금 남은 이성이 이렇게 된 거 아이들을 착하게라도 키워 보자며 긍정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 * *
[며칠간의 관찰 일지
마샤, 성격이 활달함. 먹는 것을 좋아함. 가끔 화가 나면 폭력적인 경향이 있음. 말을 잘 따르고 스킨십을 좋아함.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와 인형을 좋아함.
제레미, 미운 네 살과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을 정확하게 관통함. 개구쟁이. 남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함. 가끔 당황하게 하는 언사가 잦음. 예) 저 새x, 병x, 미x, Cx.
이안, 무뚝뚝함. 언제나 무표정. 더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함. 어린이용 장갑값이 많이 듬. 지시하는 것에 고분고분 잘 따르나 큰 성의는 없음. 애늙은이.]
관찰 결과, 아이들은 정말 각양각색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니 성격이 안 맞아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가 그래도 왜 정이 안 들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셋이 합심하면 대륙을 불바다로 만드는 게 한결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뭐, 애들은 다 싸우면서 큰다지만…… 음, 근데 얘넨 커서도 싸우잖아?’
한나는 채소밭에서 당근을 캐며 아이들의 자유 활동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샤는 그네를 타고 있었고, 제레미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나무 막대기로 포대 자루를 때리고 있었으며, 이안은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수건을 깔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지간해서 저 나이의 애들이라면 모여서 놀지 않나? 어쩜 저리 다 따로 놀지?’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상극이었다.
제레미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상스러운 말을 할 때마다 이안은 질색을 하며 제레미를 경멸했다.
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마샤뿐이었다. 주로 그들을 멍청이라며 비웃는 것이었지만.
탁. 탁.
당근을 캐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저녁 시간에 맞춰 얼른 채소를 캐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마샤가 한나의 앞에서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아, 마샤. 도와줄래?”
한나는 잽싸게 마샤에게 삽 하나를 꺼내 주었다.
“오늘은 메뉴가 뭐예요?”
고사리손으로 흙을 파내며 마샤가 물었다.
“소고기 스튜로 할까 해. 채소 많이 넣고.”
“흐응, 채소는 많이 안 넣어도 되는데.”
“너희 편식이 심해서 많이 넣는 거야.”
특히 제레미의 편식은 셋 중 으뜸이었다.
한나의 말에 마샤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뭐, 그것도 좋아요.”
인심 쓴다는 듯 마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선생님, 왜 수업을 안에서 안 하고 매일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마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답은 쉬웠다.
한나가 이 세계의 지식이 얄팍하기 때문에 가르칠 것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난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교육관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교육관요?”
“음, 너희를 가르치는 방법. 책을 펴고 어려운 말을 가르치는 것보단 자연과 어우러져 튼튼하게 자라길 바란단다.”
말은 꽤나 그럴듯했지만, 사실 그냥 아는 게 없어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다 이 아이들에게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밝히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뭇 어른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 그렇군요!”
마샤가 열심히 땅을 파내 캔 당근을 들고 방긋 웃었다.
‘……미안해. 그냥 내가 멍청이라서야.’
한나는 오늘은 꼭 자기 전에 이 세계에 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뭐하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제레미가 마샤의 등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그의 손과 얼굴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앞으로 밀려 땅에 손을 짚은 마샤의 시선이 제레미의 발로 향했다. 잠시 침묵하던 마샤가 허리를 펴고 방긋 웃었다.
“지금 더러운 발로 어딜 차는 거야?”
분명 웃으며 말했지만, 말에 가시가 돋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저러면…….’
한나는 손에 삽을 쥔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안 좋은 징조였다.
“너도 흙 잔뜩 묻혀 놓고 뭘.”
제레미는 자신의 손을 털며 비웃었다. 그에 마샤 역시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어차피 더럽긴 해.”
“그럼, 그럼.”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샤가 제레미의 멱살을 쥐며 그를 흙바닥에 내리꽂았다.
“악!”
이 상황에 놀란 것은 한나뿐이었다.
“어차피 더러운 거 아주 제대로 뒹굴면 되겠네!”
마샤가 제레미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악! 야! 안 놔?”
갑자기 패대기쳐져 밑에 깔린 제레미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한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둘을 떼어 놓기 위해 다가갔다.
“망나니 같은 놈이 걸핏하면 신경을 긁지?”
마샤의 어휘력이 상당하다. 특히 화가 났을 때.
한나가 마샤의 팔을 붙잡았지만, 힘이 장사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 마샤. 그만해! 친구는 때리는 거 아냐!”
“그렇죠. 친구는 때리는 거 아니죠.”
한나는 자신의 말이 통한 것인가 싶어 안도하려 했다.
“위아래 모르는 찌질이는 패도 돼!”
하지만 이어진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샤가 제레미를 가격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제레미와 마샤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제는 마샤가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힘으로 나한테 덤벼?”
“제레미!”
신이시여.
한나는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울상을 지었다.
“자, 잠깐만! 얘들아!”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한나의 옆에 이안이 조용히 다가왔다.
“오, 이안, 도와주러 온 거야?”
한나는 이안이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은 한나의 간절한 요청에도 무표정하게 둘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남의 집 불구경하러 온 뒷집 아저씨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마샤와 제레미가 몸부림치느라 흙이 자신에게 튀자, 이안은 읽고 있던 책으로 흙 알갱이를 막았다.
아주 좋은 순발력이었다. 그러곤 미세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
흙 알갱이가 책 표지에 조금 묻어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라면 툭툭 털어 버리고 말 정도의 적은 양이었다.
툭.
하지만 이안은 뒹굴고 있는 둘에게 책을 던져 버렸다.
“악!”
책이 누구에게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안은 그 자리에서 하얀 장갑까지 벗어 냈다. 그것 역시 아이들을 향해 던져 버렸다.
마치 쓰레기통이라도 되는 양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곤 그대로 손을 털며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 모습을 보며 한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내가 뭘 기대한 거람.”
어쩐지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싶었지.
하루하루가 전쟁통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다시 아이들을 말리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만 싸워!”
오늘도 저녁밥은 늦을 것 같다.
* * *
몸에 남은 단편적인 기억들로 인해 신전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생활했던 보육원이라 그런지 신전과 보육원 내부의 정보도 쓸모가 많았다.
이 기억이 아니었다면 대신관의 집무실을 찾는 것도 몰라서 헤맸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보육원은 어떻지?”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흐음. 그놈의 보육원을 빨리 없애야 하는데 말이야.”
시골에 위치한 이 작은 신전은 사실 자금 사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없애다니요?”
“지원금 때문에 유지했던 건데 이번 해부터 지원금이 조정됐어. 애 셋을 돌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야.”
웃기는 소리.
아이 셋을 보육하는 돈이 아니라, 아이 셋을 최소한의 돈으로 보육하면서 뒷돈까지 챙길 금액이 안 되었던 거겠지.
대신관의 말을 들으며 한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당장 없애 버리고 싶지만, 중앙 신전에서 감사가 들어오면 이미 받은 돈도 토해 내야 하니 당장 없앨 수도 없고.”
정말 신관의 자애라고는 일말도 없는 인간이었다.
오로지 돈만 밝히는 쓰레기. 아니, 그럼 보육을 책임지는 이 몸 역시 잘린다는 말 아닌가? 그걸 본인 앞에서 떠들다니. 대신관은 정말 눈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상처받든 말든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는 뜻이겠지.
“그 아이들이 갑자기 어디로 가나요. 한번 정해진 보육원이 사라지면 어지간해서는 다른 곳도 갈 수 없는걸요.”
소설 속 내용을 더듬어 보면 신전의 보육원은 빨리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신관과 한나가 아이들을 학대하기 시작하고, 결국 보육원은 사라져 아이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그 후,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악당으로 자라는 수순이었다. 마법 재능이 있던 마샤는 흑마법사에게 발견되어 좀 미치광이가 되긴 하지만 흑마법사로 잘 자란다.
이안은 버려진 황족이었기에 그를 은밀히 주시하던 귀족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중 제일 불쌍한 것이 제레미였다. 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다 험한 꼴을 많이 보게 된다.
얻어맞고, 겨우 쓰레기통을 뒤져 찾은 음식을 빼앗기고, 아프고 굶어 죽어 가던 때에 뒷골목 암흑가에 심부름꾼으로 발을 디디게 되는데, 그 후로는 더러운 일과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검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암흑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살아남다 못해 자신이 수장이 되니 그가 얼마나 잘 적응하며 살아남았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한나의 입장에서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 자명했다. 대신관과 자신의 목도 뎅강이라는 것은 백프로 확정이고.
그들은 신전을 불사지르며 신관들과 저를 죽일 것이다.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그 정도 돌봐 줬으면 다 키웠지.”
대신관의 말에 한나는 생각했다.
‘겨우 열 살을 채운 이안의 밑으로 아홉 살 아이들이 어떻게 다 키운 건지?’
할 말이 턱 끝까지 치밀었지만 내뱉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최대한 돈을 아끼라고. 식비도 줄여. 고기반찬을 먹었다지? 내가 그러라고 널 보육원에 들인 게 아닐 텐데?”
“하지만…….”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재료나 제대로 주던가!
신전에서 내어 주는 재료로는 죽이나 겨우 쑬 정도의 부실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가 말하는 ‘고기반찬’은 자신이 가불받은 월급으로 사 먹인 것이었다.
왜 남의 월급으로 산 것까지 아니꼬와 하는 건지.
“어릴 때처럼 매를 들어야 말을 들을 텐가?”
대신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자 한나의 몸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한나 역시 어릴 적 학대를 겪으며 자랐었다.
아무리 빙의해서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덜덜,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떨지 마…… 떨지 마.’
그러나 마음과 달리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한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관이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육원 폐쇄 공고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돈을 아껴. 체이슨을 통해 그 아이들을 보낼 곳을 찾아보고 있으니 그때까지 그것들 상하지 않게 잘 관리하고.”
한나는 대신관의 말에 적어도 다른 보육원으로 이관한다는 소식에 화색을 띠었다.
말끝에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 것 같은 ‘그것들’이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아이들이 정상적인 보육원으로 가게 된다면…….’
아이들이 악당으로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부족함이 많은 자신의 돌봄보다는 그게 훨씬 나은 일일 것이다.
“알겠어요.”
“가 봐.”
대신관은 손을 휘휘 저으며 한나를 내보냈다.
* * *
한나가 보육원으로 돌아가자 아이들이 생활관에 모여 있었다.
“난 옥수수 수프가 먹고 싶은걸.”
“난 빵! 달달한 빵!”
“그렇게 단것만 먹으니까 살이 찌지.”
“어디가 살이야? 이거 다 근육인데?”
제레미가 앙상한 팔을 걷어붙였다. 그에 마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안은 애초에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한나는 웃음이 나왔다. 귀여워라.
“선생님은 나를 더 좋아하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해 줄걸?”
“무슨 헛소리?”
아이들에게 다가가던 발걸음이 주춤거렸다. 지금 흘러가는 상황이…… 좀 껄끄러운 방향인데?
“선생님은 날 더 좋아하거든!”
그때였다. 소파를 뒹굴거리던 제레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흥, 멍청하긴. 딱 보면 몰라? 선생님은 날 제일 좋아해.”
“웃기네! 오늘 누가 먹고 싶은 거 해 주는지 내기할까?”
제레미가 소파의 쿠션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먼지 날려.”
이안의 딱딱한 목소리가 제레미에게 날아들었다.
“저 밥맛, 또 시작이네.”
제레미의 볼멘소리에 이안이 답했다.
“제레미, 적어도 넌 아냐.”
“뭐가 아니라는 거야?”
“한나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
“뭐? 그럼 너도 마샤라는 거냐?”
제레미가 언성을 높였다. 얼굴에 심통이 가득했다.
“마샤도 아니지.”
책을 읽던 이안의 내리깔린 시선이 제레미와 마샤에게 천천히 돌아갔다.
“너희 같은 말썽쟁이들을 왜 좋아하겠어?”
“뭐, 뭐?”
“그럼, 넌 선생님이 너를 제일 좋아한다는 거야?”
마샤의 물음에 이안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쟤도 제정신이 아니야.”
마샤가 혀를 쯧쯧거렸다.
도대체 혀 차는 건 어디서 배운 건지. 한나는 갑자기 생활관에 들어온 게 실수였나 싶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야! 그럼 너도 말해! 메뉴!”
“그래. 누구 음식을 해 주는지 내기하자고!”
“난 생선조림.”
세상에, 이안은 입맛도 애늙은이였다.
“오늘 결과로 누굴 가장 좋아하는지 확실히 하는 거다!”
“좋아.”
“유치하긴.”
유치하다고 그들을 타박하면서도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이안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고 살짝…….’
“선생님!”
나가려던 한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으, 응?”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눈을 빛내며 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빵! 달달한 빵이 먹고 싶어요! 만들어 주세요.”
“선생님, 옥수수 수프요! 수프!”
“생선조림.”
큰일이다.
오늘도 시험에 들고 있었다.
여기서 누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간…….
‘그때 왜 내 수프가 아니었죠? 화염구에 사라져 버려!’
불타서 죽는 건 많이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오, 수프 만들어야겠다.
‘선생님은 십 년 전 그날, 제 빵을 만들어 주지 않았어요.’
독이 묻은 날카로운 단도가 목을 베는 건 그나마…… 아니지, 악독한 제레미라면 고문 끝에 처절하게…… 아. 빵 만들어야겠다.
‘황제가 될 나의 생선조림을 만들지 않다니. 목을 잘라 성벽에 걸어라.’
단두대에서 인생을 마감…… 와, 생선 잡으러 강으로 뛰어가야겠는데.
“……얘들아.”
한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네? 선생님? 확실히 해요!”
“오늘 점심, 뭐로 할 거죠?”
“선생님.”
……너네 나한테 왜 이래?
지금 한나는 누구보다도 크게 울고 싶었다.
* * *
“선생님. 빵은요?”
뚱하게 굳은 제레미의 눈꺼풀이 반쯤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다. 그는 언뜻 심통난 고양이 같았다.
“선생님, 이건 수프가 아닌데요.”
마샤 역시 팔짱을 끼고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선…….”
이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들아.”
한나가 침착하게 아이들을 식탁 의자에 한 명씩 앉혔다.
“사실…….”
그러고는 각자 자리를 잡고 앉은 아이들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선생님은…….”
그리고 그녀 역시 아이들의 앞에 앉았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단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 샐러드와 어제 사 온 고기 조림이 차려져 있었다.
그 흔한 빵도 수프도 생선도 없는 식탁이었다.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한나에게 꽂혔지만 한나는 꿋꿋하게 포크를 들었다.
“편식하지 말고 먹어야지?”
아이들은 툭 튀어나온 입을 넣지 못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제발 나한테 시련을 주지 마. 얘들아.
한나는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 * *
하지만 그날 오후, 결국 한나는 시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낮에야 대충 넘겼다지만 혹시 아이들이 상처받았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궁핍한 재정에 먹고 싶은 걸 다 해 주지 못할까 봐 마음이 쫄깃한 장 보기였다.
“최대한 열심히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지.”
그리고 혹시 정말 아이들이 악당으로 자랄지도 모르고, 언제 자신을 미워할지 장담할 수가 없지 않은가?
겨우 이런 일까지 신경 쓰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소설 속 악당 삼인방은 정말 극악무도한 녀석들이라는 거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픽픽 죽이는 인간들인데 어릴 때 원한 같은 건 절대, 절대로 좋지 못하다!
“이 생선, 얼마인가요?”
한나의 장바구니에는 빵과 옥수수, 채소들이 들어 있었다.
“1실버만 주고 가져가.”
“그렇게 저렴하게 주셔도 되나요?”
“보육원 아가씨 아니여? 애들 먹이는 건데 싸게 싸게 줘야지.”
“감사해요!”
한나는 신전에서 지급하는 재료로는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날부터 자신의 월급을 보태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한나에게 이것저것 베풀어 주기 시작했다.
“이것도 같이 가져가 봐. 살살 구워 먹으면 맛있어. 가시도 많이 없어서 애들이 먹기에도 좋아.”
“앗, 그럼 그것도 계산할게요.”
“아니야. 이건 그냥 가져가. 얼마 전에 애들 보니 뼈밖에 없던데.”
“아…….”
보육원 안에만 있기 답답할까 봐 아이들을 몇 번 데리고 나왔는데, 그때 앙상한 아이들을 본 가게 주인은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못 파는 생선이라며 한나의 장바구니에 잘 포장한 생선을 툭 하고 넣었다.
하지만 눈 씻고 봐도 상할 기색 없는 싱싱한 생선이었다.
“그맘때 애들은 잘 먹어야 해.”
“네. 제가 잘 챙길게요.”
한나가 배시시 웃자, 생선가게 주인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보육원에는 흉흉한 소문이 많았는데, 그녀가 보기에 새로 온 보육교사는 썩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며 한나는 다른 재료들을 사기 위해 시장을 누볐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식재료를 가득 담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고되기보단 유쾌했다.
“흥흥, 얼른 가서 맛있는 저녁 만들어야지. 룰루…… 응?”
그런데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체이슨?’
으슥한 골목 옆, 가게 간판도 제대로 없고, 언뜻 보아도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앞에서 체이슨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신전의 하급 신관이었다. 대신관의 종이나 다름없는 체이슨은 주로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오늘도 무슨 심부름을 나온 건가.’
사실 워낙 구린 구석이 많은 신전이라 그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가 않았다. 한나는 체이슨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하고 든든한 장바구니를 손으로 퉁퉁 두드렸다.
‘이 정도면 오늘 저녁도 호사스러운 식탁이 되겠지?’
지갑은 비었지만 마음은 넉넉했다.
‘그런데 가불받은 월급은 어쩐다.’
무엇보다도 당장 다음 달이 걱정이라는 생각에 한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험체로 팔면 값은 두 배로 뛰지. 근데 그게 기준이 깐깐해. 너무 어려도 좀 곤란한데.”
“얼마나 받을 수 있는데?”
“두당 500골드는 챙길 수 있지.”
“셋이면 조금 더 안 쳐주나?”
길을 지나는 한나의 귓가에 뭔가 이상한 대화 내용이 들렸다.
‘두당? 실험체?’
한나는 힐끗 체이슨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있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딱 봐도 ‘나 나쁜 놈이오.’ 광고를 하고 있었다.
한나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이내 그녀는 길가의 나무 뒤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일단 바로는 안되고 감사가 끝나면 연락하지.”
“병든 곳이 있으면 안 돼. 명심해.”
“걱정 말라니까.”
“그 보육원 애들인가?”
보육원이라는 말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바구니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걸 간신히 붙들었다.
‘설마…….’
갑자기 대신관의 말이 떠올랐다.
‘체이슨을 통해 그 아이들을 보낼 곳을 찾아보고 있으니…….’
미친. 미친. 미친!
그가 말한 아이들을 보낼 곳은 다른 보육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실험체로 팔아넘기려는 흉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니!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신전이 아무리 쓰레기라지만, 이렇게까지 개쓰레기라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쓸며 한나는 곧바로 보육원으로 달렸다.
* * *
“앗! 옥수수 수프잖아!”
“빵이거든?”
“생선.”
아이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자신이 원하던 메뉴를 찾고는 즐거워했다.
“에이, 빵이랑 생선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선생님도 참.”
마샤의 얼굴에 귀여운 보조개가 패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게 분명했다. 마샤가 총총 걸어와 한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비볐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선생님은 누굴 더 편애하지 않아.”
“흥, 그래도 내 빵이 제일 먹음직스러운걸.”
제레미가 사과잼이 들어간 빵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들은 더 이상 누굴 더 사랑하냐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사실 한나는 아이들을 보며 애써 웃고 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낮에 들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험체…… 팔아넘겨…….’
끔찍한 생각에 얼굴이 구겨졌다. 아이들 앞이라 애써 감추기를 수차례, 하지만 긴 한숨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 * *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데.’
잠옷을 입고 보육원에 딸린 숙소 침대에 누운 한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까슬거리는 이불보다 낮의 일이 더 신경 쓰였다.
“후…… 난 겨우 쥐꼬리만 한 월급 받는 처지인데…… 이마저도 곧 잘릴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데리고 나가서 살아야 하나…….”
수중에 돈은 없고 자신은 보육원을 갓 벗어난 사회초년생인데 아이 셋을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이 세계의 지식조차 알량했다.
최대한 보육원을 아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유지해야 한다.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침착하게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과거 이야기는 짧게 지나가던 서술이었지만 그나마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억이 남아 있었다.
‘신전의 횡령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야.’
신전의 자금은 신도들의 헌금과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 추가로 보육원이나 노인시설이 있으면 따라오는 추가보조금이 있었다.
과연 그 여러 갈래의 돈 줄기를 장부 없이 기억할 수 있을까?
“천만에.”
모름지기 악역들은 굳이 들켜 버릴 장부를 만들어 놓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었다.
이대로 아이들을 내버려 둔다면 나쁜 곳에 끌려갈 것이 뻔했다.
그것을 두고만 보는 것은 나중에 자신을 원망해서 죽여 버리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간적인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 봐야 자신과 아이들은 굶어 죽을 것이 자명했다.
답은 하나다.
‘찾는다, 장부. 협박한다, 대신관.’
당장에라도 어둠을 틈타 대신관의 집무실을 뒤지러 가고 싶었지만 아이 셋을 돌보는 하루는 너무 고단했다.
‘에라, 일단 자자…….’
한나는 끔뻑끔뻑 감기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 * *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네!”
“뭘요?”
마샤와 제레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가 오는 날엔 뭘 써야 할까?”
“우산요?”
“우비!”
대답은 참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그걸 왜 쓴다고 생각하니?”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요!”
“그렇지?”
한나는 잔뜩 젖어 있는 마샤와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우산도 우비도 있는데 왜 이렇게 젖어 있을까?”
“그치만, 비 오는 날 흙탕물을 마구마구 밟으면 재미있는걸요!”
“맞아요! 첨벙첨벙 소리가 난다구요!”
“음…….”
한나는 흙탕물이 튀어 분홍 드레스가 완전 갈색으로 변해 있는 마샤를 한 번, 웃통은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머드팩을 하고 있는 제레미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더러워진 드레스는 그렇다 쳐. 상의는 어디에 버리고 온 거니? 응?
“그러다 감기 걸리면 많이 아프단다. 너희가 아프면 선생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니.”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아이들의 들뜬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프면…… 안 되는데.”
마샤가 침울하게 답했다. 마치 귀가 있다면 푹 접힌 것처럼 순식간에 기가 죽어 버리자, 연기를 했던 한나도 조금 당황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어도 돼!
“흠흠.”
한나는 급히 목을 가다듬으며 제레미와 마샤의 팔을 쓰다듬었다.
“다음부터는 비 오는 날 비 맞지 않기로 하는 거야. 알겠지? 얼른 따뜻한 물에 씻으러 가자.”
마샤와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너도 같이 씻으러 가자.”
이안은 더러운 몰골의 마샤와 제레미를 보며 왈칵 구겨진 표정으로 싫다는 표현을 했다.
하지만 한나는 단호하게 ‘얼른.’이라고 이안을 재촉했다. 깔끔한 것도 좋지만 도가 지나치면 사는 데 불편한 법!
얼른 이안의 결벽증도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 제레미와 이안은 저기, 남자 욕탕으로 가고, 마샤는 이리 와.”
비누와 수건을 제레미와 이안에게 전해 주자 아이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마샤도 멀뚱히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왜 그러니?”
뭐 더 필요한 게 있나? 한나는 목욕 바구니를 뒤적였다.
“……그, 선생님…….”
“목욕은 싫어도 해야 해. 특히 마샤랑 제레미는 지금 병균 범벅이라고. 자, 얼른 와.”
한나가 마샤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레미! 꼭 꼼꼼하게 씻어야 한다! 제대로 안 씻으면 선생님이 씻길 줄 알아!”
“선생님, 그!”
“얼른 들어가! 감기 걸려!”
아이들이 씻기 싫다고 떼를 쓸까 싶어 한나는 순식간에 마샤를 데리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제레미는 한나와 마샤가 사라진 욕탕 입구를 멍하니 바라봤다.
비단 제레미뿐만 아니라 이안의 표정도 벙찐 모습이었다.
“마샤…….”
“……저 도라이.”
제레미와 이안은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자 욕실로 들어갔다.
* * *
신전의 뒤편에는 온천수가 흐르고 있었다.
‘세상에 이 세계에서 온천욕이라니 무슨 호화스러움이람?’
한나는 흥얼거리며 목욕용품을 늘어놓았다.
“마샤. 옷 벗자.”
마샤는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한나는 그런 마샤에게 다가가 드레스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여간, 마샤도 제레미도 씻기 싫어하는 고양이 같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아이들을 씻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스스로 하는 게 익숙해서인지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마샤의 옷을 벗겼다. 아니, 벗겼다가 다시 올렸다.
‘……내가 뭘 본거지.’
한나는 손등으로 제 눈을 비비고, 다시 마샤의 옷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올렸다.
“…….”
“…….”
마샤와 한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마샤…….”
한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왜 마샤에게 그것이 있는 거지?!’
크게 뜨인 눈꺼풀 밑으로 동공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저 작고 귀여운 고…… 아니, 코끼리는 뭐냐고!’
“너, 너…….”
“음…… 선생님…….”
마샤가 몸을 베베 꼬며 귀밑을 긁었다. 얼굴이 조금 발그레 변해 있었다.
“너 남자였어?!”
한나의 우렁찬 목소리가 욕탕에 울렸다. 아마 옆의 남자 욕탕까지 넘어갔으리라.
“하하.”
와중에도 해맑게 웃는 마샤를 보며 한나는 입을 떡 벌리고 경악에 젖어 있었다.
분홍 드레스를 좋아하는 마샤.
양갈래 소라머리가 귀여운 마샤.
귀여운 인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마샤.
매일같이 소꿉놀이에서는 엄마 역할을 했다고!
그런 마샤가 남자아이였다니? 여보세요, 작가 양반?
“가, 가자.”
자신이 몰랐던 마샤의 비밀을 알게 된 한나는 마샤를 남자 욕탕으로 옮겨주면서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긴 머리카락을 통통 튕기며 ‘남자’ 욕탕으로 들어가는 마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너 왜 여장을 하는 거니……?’
한나는 온천에 앉아 몸이 빨갛게 익도록 마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래. 아직 어려서……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아니! 쟤 어른 되고도 여자라고 표현됐다고!”
그녀가 벌떡 일어서자 온천물이 출렁이며 범람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미치광이 흑마법사! 심지어 요염했다니까?”
한나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귀여운 여자아이였는데……. 여자아이…….
갑자기 뇌리에 코끼리가 스쳤다.
‘흑흑, 속았어.’
이 세계, 보기보다 비밀이 많은 곳이었다.
* * *
그날 밤, 혼란의 도가니에서 겨우 빠져나온 한나는 마샤를 평범한 남자아이처럼 바로 잡아 줘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마샤, 편한 바지를 입어 볼 생각은 없니?”
마샤의 이부자리를 만져 주며 은근히 질문하자 마샤는 인형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음…… 하지만 바지는 예쁘지 않은걸요.”
“드레스, 불편하지 않아?”
“전 이런 프릴이 좋아요. 레이스도 좋고요!”
분홍색 곰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마샤가 웃었다.
“그, 그렇구나…….”
어떡해……. 자기가 좋다는데…….
한나가 마샤의 시선을 피해 울먹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세상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취향이 있다.
마샤의 취향이 조금 독특하긴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니까. 아이들을 양육할 때 어떤 편견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된다.
암암.
한나는 품속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아이들의 성, 바른 가치관, 양육, 이대로 괜찮은가?]
서점에 가서 살 책들을 추렸다.
“선생님.”
“응?”
그런 한나를 마샤가 조심스레 불렀다.
“제가 이런 모습이라 싫은가요?”
한나를 올려다보는 마샤의 눈빛이 촉촉했다. 마치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물풍선 같기도 했다.
‘설마…….’
밝기만 했던 마샤가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한나는 혹시 저도 모르게 마샤에게 껄끄러운 내색을 한 건지 걱정이 됐다.
잠시 고민하던 한나는 마샤의 침대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마샤의 빨간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샤. 난 네가 여자아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제가 징그럽지 않으세요?”
불안이 깃든 목소리.
평소의 마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네가 여자여서, 남자여서가 아니라 그저 너라는 자체를 좋아하는 거니까.”
“선생님…….”
최대한 눈물주머니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마샤가 찔끔 눈물을 흘리며 안겨 들었다.
‘악당들도 어릴 땐 그저 불안정한 아이구나.’
한나는 안겨든 마샤의 등을 토닥였다. 마샤가 쫑알쫑알 좋아하는 프릴 드레스에 대해 30분이 넘도록 이야기하는 것도 끈기 있게 들어 주었다.
“저는 제국식 드레스도 좋지만, 공국의 말끔하게 떨어지는 드레스도 좋아해요!”
“으응, 그렇구나.”
마샤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욱 마샤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제 아이들을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마샤의 성별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웃지 못할 일이었다.
독자로서 그들의 미래 모습을 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지금의 이 아이들은 그 악당들이 아니다. 그저 작고 여린 보호해 주고 아껴줘야 하는 꼬마들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나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마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럼 속옷은 여자아이용이어야 하는 걸까, 남자아이용이어야 하는 걸까.’
차마 직접 물을 수 없는 심각한 고민이었다. 한나는 오늘도 화염구 엔딩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
* * *
세상에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악독한 대신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려니 한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또 가불?”
월급을 쪼개서 당겨 받는 것도 두 번째였다.
“네…….”
상황이 껄끄러운 와중에도 대신관의 시선을 피해 은근슬쩍 집무실을 훑어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항상 잘 정리돼 있었다.
장부 같은 게 숨어 있을 장소는 어딜까.
“돈 관리가 안 되나? 신전에서 먹고 자면서 월급은 어디다 탕진하는 거지? 어디 길거리에서 술이나 먹고 허튼 곳에 쓰겠지.”
대신관이 혀를 끌끌 찼다.
‘그거 너무 선입견이 강하신 것 같은데…….’
원래 이 몸의 주인이 그런 성격이었던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대신관의 시선에 한나는 억울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부족한 의식주를 메꾸기 위해서라고 변명해 봐야 좋은 소리가 날아올 리 없었기에 그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쯧, 챙겨 둘 테니 있다 찾아가.”
“네. 감사합니다.”
퉷. 퉷. 퉷! 속으로 침을 세 번 뱉었다.
“애들은 잘 있겠지?”
“잘 있어요.”
이 쓰레기 같은 대신관이 묻는 잘 있느냐는 말이 선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파렴치한 늙은이, 저러다 지옥에 떨어지지.
“그래. 그럼 나가 봐.”
“네. 그럼.”
한나는 문을 나서면서도 벽에 걸린 액자와 책장등을 유심히 살폈다.
탁.
문이 닫히고 복도로 나서자 익숙한 얼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체이슨 신관님.”
“네. 한나 양. 보육원은 어떤가요.”
저 물음도 보나마나 애들 팔아치우려고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한숨이 나왔다.
여기엔 정상적인 어른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괜히 책의 이름이 악당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여기도 저기도 죄다 나쁜 놈들투성이다.
“뭐, 잘 굴러가고 있어요.”
“아이들은 아픈 곳은 없나요?”
요것 봐라. 아주 노골적이네.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 인간이 정말 아이들 걱정을 하는 줄 알았을 것 아닌가?
“비를 맞아서 영 입맛이 없어 하긴 하던데……. 잘 먹어야 건강할 텐데, 신전에서 배급되는 재료가 너무 형편없어서……. 뭐 그건 이미 아시겠죠?”
한나가 일부러 안타까운 표정으로 체이슨을 올려다보았다.
“한 명이라도 감기에 걸리면 금방 다 옮을 텐데……. 휴, 요즘은 감기가 잘 떨어지지도 않고, 아이들 몸이 워낙 약하니 자칫 큰 병으로 퍼질지도 모르고……. 음…….”
일부러 아주 심각한 척 이야기하자, 체이슨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약이 필요합니까?”
아무래도 비싸게 팔려면 건강해야 하는데 제법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약보다는 건강식품이 필요할 것 같아요.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도 마음껏 먹으면 좋으련만.”
“필요한 것을 따로 적어 주세요.”
“어머, 정말요?”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체이슨은 아이들의 건강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물론 그 내막은 추악한 이유였지만.
“그럼 저녁까지 전달할게요.”
“예, 그럼 전 대신관님을 만나러.”
“네, 네. 수고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끼익, 탁.
집무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잘 걸어가던 길을 슬금슬금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피고 집무실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알아봤나?’
‘두당……. 그런…….’
‘언제…….’
‘감사가……. 여름이…….’
‘중앙 신전에서 연락이…….’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지만, 대충 앞뒤 단어로 문맥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중앙 신전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보육원 감사를 끝으로 아이들을 팔아치우겠다는 내용이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무조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쉽게도 장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한나는 더 이상 필요한 정보가 없다는 판단에 후다닥 몸을 일으켜 발길을 돌렸다.
* * *
“와!”
다음 날, 보육원에는 큰 수레가 도착했다. 한나는 하루 종일 머리를 짜내 영양식단에 필요한 재료와 면역력을 위한 새 침구, 새 옷을 요구했다.
다행히 체이슨 신관은 아이들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는 원대한 꿈에 젖어 이 정도 지원을 기꺼이 해 주었다.
‘흥, 멍청한 놈.’
그들의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선생님, 이게 다 뭐예요?”
“너희들이 착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 줘서 신께서 보낸 선물이란다.”
개똥의 신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와! 드레스도 있어요!”
“잘 어울리겠는데?”
“선생님, 이거 먹어도 돼요?”
제레미는 또 달달한 간식을 들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간식 제한 없이 마음껏 먹으렴.”
그녀는 아이들이 단것을 너무 많이 먹어 제한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기분도 좋겠다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 이불, 세탁해서 깔아 주세요.”
이안이 유독 하얗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세상에, 간식과 새 옷보다 이불을 좋아하다니.
특이하긴 하지만 너무 귀엽잖아!
“좋아. 좋아. 그럼 이제 다 같이 옮기자!”
드디어 자신의 월급이 탈탈 털리는 불상사를 막을 방도가 생겼다는 생각에 한나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나쁜 놈들 돈 털어먹는 건 왜 이리도 즐거운지.
“흥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 *
유독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몰래 움직이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한나는 촛대를 들고 슬쩍 신전으로 향했다.
훔쳐갈 것 없는 신전에는 경비 또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있었다. 한나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몰래 대신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끼익.
‘돈도 많이 횡령한 놈들이 문짝에 기름칠 좀 하고 살 것이지.’
끼긱거리며 열리는 문의 소음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 초상화, 저기 서랍, 저 책장 뒤.’
평소 의심스러웠던 장소를 우선적으로 훑었다. 초상화는 만질 일이 없을 텐데도 항상 삐뚜름했고, 서랍은 항상 열쇠로 잠겨 있었다.
사실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책장이었는데, 대신관은 까막눈인가 싶을 정도로 무식한 티를 내면서 어려운 책들을 줄줄이 책장에 꽂아 뒀기 때문이었다.
뭐 하나 의심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단 책장부터.
한나는 촛대에 의지해 책들을 슬쩍 들었다 빼며 비밀 공간이 없는지 확인했다. 책 위에 쌓인 먼지로 보아 딱히 자주 만진 것 같지는 않았다.
“콜록.”
신관이 청소를 보이는 곳만 하나 보다. 책장은 금방 포기하고 서랍으로 향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꽉 잠겨 있었다.
그래서 잠기지 않은 다른 서랍들을 열어 보았다.
잉크, 펜, 메모지, 호두는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옷핀으로 자물쇠 따는 기술이나 배워 둘걸.
전생에 하던 고시 공부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어라?’
작은 서랍의 천장 부분에 열쇠가 붙어 있었다.
‘이걸 왜 여기다 붙여 놔? 설마 껌 같은 건 아니겠지?’
찾아서 기쁘긴 했지만 물컹한 뭔가에서 떨어지는 열쇠로 인해 조금 찜찜했다. 그리고 작은 불안감이 들었다.
‘본디 일이 쉽게 풀리면 의심이 가는 사람인지라…….’
달칵.
열쇠가 돌아가자 서랍이 열렸다. 깊이가 제법 깊은 서랍 속엔…….
“변태 새끼.”
야한 그림책이 가득했다.
‘아!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더라!’
혹시 눈속임일지도 몰라서 그림책을 하나하나 들춰 보았다.
‘눈속임은 개뿔. 이런 걸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눈살이 찌푸려지는 수위에 서랍을 탈탈 털어 뒤지다 도로 넣어 놓았다.
‘돈에 미친 대신관이 변태이기까지 하다니. 꼭 조심해야겠다.’
다시 서랍을 잠근 후 열쇠도 제 자리에 붙여 놓았다.
“역시…….”
금고는 뭐니 뭐니 해도 그림 뒤에 있어야 제맛이지. 대신관이 뭘 아는가 보다. 한나는 마지막 의심 지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그림을 슬그머니 들췄다.
“응?”
결론만 말하자면 그림 뒤에는 금고가 없었다. 그냥 벽이 있었고, 대신 뭔가 이상한 것이 그려져 있었다.
‘신전의 문양……? 아닌데.’
붉은색으로 표시된 문양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그란 원안에 숫자 몇 가지가 겹쳐져 있는 것 같았다.
‘2? 5? 8?’
어지럽게 얽혀 있어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한나는 일단 초상화를 다시 제대로 걸어 놓았다.
자신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핀 후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나왔다.
비록 허탕이었지만 일단 한 곳을 확인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문양은 뭐였을까?’
* * *
다음 날, 아침부터 아이들이 소란스러웠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부스스한 머리를 제대로 정리도 못 하고 생활관으로 달려온 한나는 이번엔 마샤와 제레미가 투닥거리는 게 아니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악! 적당히 하라고!”
“침 튀어. 입 닫아.”
제레미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고, 이안은 비스듬히 앉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왜, 왜 저러니……?”
슬금슬금 구석에서 인형을 만지고 있는 마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이안이 자꾸 제레미가 하는 일에 시비를 걸어요.”
“뭐 때문에?”
“뭐 장난감이 어지럽다거나, 아침에 일어나서 안 씻어서 더럽다거나, 말할 때 침 튄다고도 뭐라고 해요.”
“음…….”
아이들이니 어른들처럼 깨끗하게만 지낼 수는…….
아니. 어른들도 이안의 깐깐한 기준에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안은 자신에게 누가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더러운 환경을 참지 못했다.
항상 챙기는 것은 장갑과 손수건.
저런 성향은 타고 나는 것일까?
“이안은 언제부터 저렇게 깔끔했어?”
“원래 그랬어요.”
“한 번도 더러웠던 적이 없어?”
“전에는 좀 덜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날이 갈수록 더한 것 같아요.”
마샤는 인형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얘기했다. 딱히 저 사태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였다.
“흐응.”
깔끔한 성격이야 좋지만 과하게 집착하게 되면 인생을 사는 데 많이 피곤해질 텐데.
“두고 볼 수만은 없겠어.”
이안의 결벽증을 타파해야 한다!
* * *
“이안, 우리 모래 놀이 하러 갈까?”
그날 오후 한나는 삽과 작은 통을 들고 이안에게 다가갔다.
“모래…… 놀이요?”
잔뜩 찌그러진 눈썹이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책 읽어야 해요.”
이안이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흔들며 말했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음, 그럼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방향을 바꿔야겠다. 이안이라면 놀이는 거절하지만, 도와 달라는 부탁까지 거절할 성격이 아니었다.
“……뭔데요.”
“내가 채소밭에서 감자를 캐야 하는데……. 휴, 팔이 너무 아파서 삽질을 할 수가 없어.”
한나가 멀쩡한 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감자……. 흙…….”
이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탁…… 해도 될까?”
한나는 결정타로 아이들에게 배운 초롱초롱 눈빛 공격을 그에게 사용했다.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내 읽던 책을 덮고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가요.”
오! 역시, 이건 통할 줄 알았지. 한나는 이안을 데리고 텃밭으로 향했다. 조금씩 흙도 만지고 더러운 것도 접하다 보면 평범까진 아니더라도 청결에 덜 예민해지겠지.
그녀는 삽을 꺼내며 감자를 심어 놓은 곳 앞에 앉았다. 그러자 이안이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음. 삽은 여기 있고, 바구니는 여기……. 응? 뭐하니 이안?”
고개를 들어 이안을 보자, 이안은 장갑을 겹겹이 끼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니 도대체 장갑을 몇 겹이나 겹친 거야? 이안의 손은 구부릴 수도 없을 만큼 통통해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감자를 집을 수나 있을까?”
“네.”
“네 손이 감자보다 통통한데?”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갑을 둘둘 에워싼 손을 꼼지락거렸다.
“해 볼게요.”
안 될 것 같았지만 일단 스스로 불편함을 깨달을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이안이 옆에 놓인 삽을 집으려 했지만 자꾸 삽이 튕겨져 나갔다.
그러길 수차례, 답답해진 한나가 삽을 들어 이안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넣어 주었다.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네.”
이안은 꿋꿋하게 불편한 자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색한 자세에 흙은 잘 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자가 나올 때까지 끈기 있게 땅을 파는 것이 이안도 정말 굽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외골수 성격이 폭군이 되는데 일조하는 건가.’
작은 의심이 싹텄지만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편견 없는 보육! 틈만 나면 그걸 잊어버린다.
“엇, 감자 나왔다.”
그때, 흙으로 덮인 뽀얀 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도 감자를 발견하고 잔뜩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다치지 않게 살살 털어 가면서 빼야 해.”
퉁퉁한 손이 어눌하게 감자가 주렁주렁 달린 뿌리를 잡아들고 흙을 털었다. 이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한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눌러 삼켰다.
“이것 봐. 흙 속에서 맛있는 감자도 나오는걸. 더럽지 않지?”
“……씻어서 먹잖아요.”
“에이, 나 사실 엄청 대충 씻어. 이거 다 네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이안이 털어 낸 감자를 하나씩 한나가 바구니로 옮겼다.
“왜……. 깨끗이 씻지 않아요?”
“응?”
이안의 목소리가 뭔가 이상해 한나가 고개를 들자, 그녀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동자에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라, 잠깐만. 왜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건데?
“이, 이안?”
“죄송해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이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기……. 이안?”
그러곤 건물로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안…….”
멀어지는 이안을 바라보며 한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감자 좀 박박 안 씻었다고 그렇게 배신감 느낄 일이야?
혹시 정말 이 세계에서 감자를 박박 씻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악인 걸까?
흙 묻은 감자를 한 손에 든 한나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저기 이안, 이것도 좀 먹어 봐.”
슬쩍 이안이 직접 캔 감자로 만든 샐러드를 앞에 내밀었다. 이안은 보육원에 들어오자마자 목욕재계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는데, 꽉 여민 단추들이 여느 날보다 숨 막혀 보였다.
“됐어요.”
한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이안이 말했다.
단단히 삐졌네.
“어, 응. 먹고 싶을 때 먹어. 얘들아, 이거 이안이 캔 감자란다. 맛 좀 보렴.”
아이들에게 익히 감자 샐러드를 권하자, 마샤는 포크로 감자 샐러드를 쿡쿡 찌르며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도 감자 캐고 싶어요.”
“응, 다음엔 마샤랑 제레미도 같이하자.”
“아, 과자도 나무에 열리면 좋을 텐데.”
제레미가 입가에 고기 소스를 잔뜩 묻힌 채 말했다.
“너 같은 돼지들이 다 털어먹겠지.”
“근데 저 이안이 어쩌다 흙을 만진 거예요? 그런 거 할 놈이 아닌데.”
맞다. 그런 거 괜히 시켰다.
“자연과 친해지길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을 담아……. 체험 학습?”
“더럽게 깔끔 떨어서 그런 거죠? 하여튼, 남자답지 못하게 예민하게 구니까 그렇지.”
제레미가 신랄하게 이안을 공격했다.
“내 앞에서 남자다움 그런 말 하지 말아 줄래?”
불쾌하다는 듯 마샤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제레미는 그런 마샤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여기 나 빼고 다 이상해.”
제레미의 광역딜이 식탁을 강타했다.
맙소사. 오늘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입안을 채운 밥알이 이렇게 꺼끌할 수 없었다.
“제레미, 그런 말 하면 못써.”
한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레미에게 말하자 제레미는 입술을 쭉 빼며 말했다.
“저런 녀석 신경 써 주지 마요, 선생님. 차라리 그 시간에 나랑 놀아 줘.”
“많이 놀아 줄 테니 그렇게 말하지 마. 친구에게 예쁘게 말해야지?”
제발 제레미 너도! 눈치라는 게 좀 있어라!
“맨날 나만 뭐라 그래.”
이윽고 제레미도 삐져 버렸다. 개판이었다.
* * *
“자, 우리 그림 놀이해 볼까?”
한나는 종이와 물감을 양손에 들어와 아이들 앞에 펼쳤다.
“그림! 좋아요! 우리 손도장 찍어요!”
제레미가 손뼉을 치며 발을 굴렀다.
“오! 좋은 생각이야. 우리 다 같이 손도장 찍어 볼까?”
“전 빨간색요!”
마샤가 빨간 물감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나는 바닥에 종이를 넓게 깔았고, 마샤와 제레미가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는 빨간 물감통을 열어 마샤의 앞에 덜어 주었다.
“제레미는?”
“초록색요!”
“오오, 초록색도 예쁘지!”
제레미의 손에 초록 물감을 덕지덕지 붓으로 발라 주자, 제레미가 간지러운지 꺅꺅거리며 자지러졌다.
“선생님! 제 손모양 보세요!”
마샤가 종이에 찍힌 자신의 빨간 손도장을 보며 깔깔 웃었다. 종이에 찍힌 손도장은 참 작기도 했다.
한나는 그 귀여운 손자국에 배시시 웃었다. 제레미도 초록 물감이 칠해진 손을 종이에 꾹꾹 찍기 시작했다.
“저기 제레미.”
“네?”
“왜 손가락을 다섯 개 다 찍지 않니?”
유독 그렇게 중지만 찍어 놓으면……. 보는 사람 기분이 상당히 이상해지는데.
“이렇게 저렇게 다 찍어 볼래요!”
“그, 그래……. 파이팅.”
그래, 얘가 뭘 알겠어. 한나는 제레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방구석 의자에 앉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같이하지 않을래?”
한나가 아직도 심통이 나서 멀찍이 앉아 있는 이안을 향해 말하자, 이안은 흘깃 종이와 물감을 보고는 팽하니 고개를 돌렸다.
‘흐음.’
이안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기에 한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안, 우리 같이 손도장 찍자~”
노랗고 예쁜 물감을 들고 이안에게 다가갔다.
‘내가 오늘 저 장갑 꼭 벗긴다!’
한나는 결의에 차 있었다.
“으응? 저엉말 재미있는데.”
달랑달랑 노란 물감을 들고 다가가는 한나를 눈치챈 이안은 상체를 뒤로 쭉 뺐다.
“왜 그래 이안? 우리 재미있게 놀자. 이안 손도장만 없으면, 슬프잖아.”
한나가 웃으며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장갑부터 벗어 볼까?”
한나의 손이 이안의 장갑으로 향했고, 이안은 펄쩍 뛰며 몸을 물렸다.
“어머, 이안! 선생님이 도와줄게!”
한나가 장갑에 손을 대자, 이안이 필사적으로 장갑을 지키기 위해 잡아당겼다.
“선생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의 한나라면 당연히 멈췄겠지만, 지금 한나는 살짝 이성의 끈이 느슨해져 있었다.
저 장갑! 벗기고 말리라!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한나는 드디어 이안의 장갑을 낚아챘다. 그리고 힘껏 당겼다.
“성공!”
“왜 이래요!”
한나가 물감을 제 손에 묻혀 이안의 손에 슥 하고 발랐다.
“…….”
이안은 노랗게 물든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후후후.’
의기양양하게 허리춤에 손을 올린 한나의 모습은 흡사 소년만화의 악당 같았다.
“와……. 선생님 악독한 표정 좀 봐.”
“그러게. 이안 어떡해?”
뒤에서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한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너무 심했나? 여전히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이안은 말이 없었다.
“저…… 이안?”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푹 숙인 이안을 불렀다.
“……어요.”
“응?”
작은 목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선생님, 정말 싫어요.”
“헙!”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한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 이안?”
여전히 목석같은 이안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자 이안이 한나의 팔을 쳐 냈다.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고개를 든 이안의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이안은 분노에 찬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한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버렸다.
“저런. 완전히 화났네.”
“그러게. 저녁 간식 먹으러도 안 올 것 같은데? 내가 먹어야겠다.”
“그런데 선생님, 우는 거야?”
그대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은 한나를 보며 아이들이 속닥거렸다. 한나는 자신의 팔에 찍힌 노랗고 작은 손자국을 보자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처받은 이안의 눈빛이 지워지질 않았다.
* * *
똑똑.
이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기, 이안……. 문 앞에 따뜻한 우유랑 과자 놔뒀어. 아까는 선생님이 미안해……. 용서해 주렴. 널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과했어. 네가 싫다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
문 앞에 쟁반을 내려놓은 한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복도를 다시 돌아가면서 계속해서 뒤돌아보았다. 혹시 문이 열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우유가 식기 전에 먹어야 할 텐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답답한 마음에 바깥바람을 쐬러 나간 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이 낮은 산 위에 있어 보육원의 앞마당도 넓은 동산이었다. 뻥 뚫린 산을 바라보자 그나마 꼬여 있던 속이 느슨해졌다.
“양육이라는 거, 너무 어렵다.”
세상에 이렇게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사실 한나는 전생에도 아이라고는 친척 조카를 잠시 보는 것 외엔 육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올바른 양육법인지 알지 못했다.
어른으로서 안 좋은 버릇은 교정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건만, 아이들을 어른들의 기준에 일률적으로 맞추는 게 과연 맞는 행동일까.
“휴, 모르겠다. 모르겠어!”
깊이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팠다. 결국 한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보육원 앞 큰 마당을 미친 사람처럼 뛰었다.
한참을 뛰어다니던 그녀가 두 팔을 하늘로 벌리고 외쳤다.
“아버지, 정답을 알려 줘!”
와그작. 와그작.
잠들기 전, 몰래 숨겨 둔 과자를 아작아작 씹으며 창문 밖을 내다보던 제레미가 그런 한나를 보며 혀를 찼다.
“정말 여긴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봐.”
한참 한나를 구경하던 제레미는 촛대의 초를 입으로 훅 불었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 나간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한나도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방 책상 앞에 앉은 한나는 차분하게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음. 그럼 일기…… 를 쓰기 전에 오늘은 다른 걸 쓰자.”
한나는 서랍장에서 일기를 꺼내다 말고 흰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경건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펜에 잉크를 적셔 종이 위로 가져갔다.
‘유…… 언장.’
그녀가 쓰고 있는 것은 유언장이었다.
“혹시 나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면 유언장은 미리미리 남겨야지.”
한나는 세 가지 죽음 루트 중 단두대를 떠올렸다. 적어도 한 명한테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 * *
당연히 이안의 문 앞 쟁반은 그대로였다. 그것을 제 손으로 버리는 한나의 마음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휴…….”
“선생님, 오늘 한숨이 몇 번째예요?”
아마 숨 쉴 때마다?
“그냥 내버려둬요. 그 정도로 삐지는 게 멍청이지.”
결국 이안은 아침도 거르겠다고 했다. 애써 채소를 빡빡 씻어 가며 준비한 아침 식사는 결국 이안의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은 야외 수업할까?”
“비 오는데요?”
“비 오는 날도 겪어 봐야지……. 언제나 인생이 화창하기만 한 건 아니란다…….”
저도 모르게 우울한 소리를 늘어놓던 한나가 깜짝 놀라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아! 그게 아니라, 비 오는 날 달팽이 구경도 하고! 뭐, 그러자는 얘기였어!”
“흐응…….”
아이들의 눈이 좁아 들었다. 시무룩한 한나의 기분 상태를 잘 아는 아이들은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난 좋아. 달팽이 끈적끈적, 매끈매끈 좋아.”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제레미는 한없이 밝았다.
“맞아. 비 좋지. 비……. 비?!”
한나가 갑자기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요, 선생님?”
“이안 이불!”
이안의 새 이불을 동산 위 볕이 제일 잘 드는 곳에 널어놓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었다.
“미친!”
아이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상스러운 말과 함께 한나가 허겁지겁 튀어 나갔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한나를 보며 마샤와 제레미가 눈을 맞췄다.
“와. 이안이 알면…….”
“눈 뒤집어져서 거품 물겠는데?”
“어떡해. 선생님 불쌍하다.”
마샤가 보슬보슬한 빵을 베어 물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흐려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나의 미래처럼 깜깜했다.
찰박찰박.
신발을 적시는 물소리와 땅을 때리는 빗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으악!”
한나는 이미 잔뜩 물을 머금고 축 늘어진 새 이불을 보며 찔끔 눈물이 났다. 워낙 때려 붓는 비 때문에 티도 안 났지만.
“엉엉. 난 이제 단두대 확정이다.”
어기적어기적 이불을 걷어 낸 한나는 묵직해진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다. 하필 이불은 솜이 가득 들어가 덩치도 토실토실했다.
뒤뚱뒤뚱 이불을 가지고 걷는데 이불에 시야가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으어어!”
미끄러운 진흙탕 물에 미끄러진 한나의 몸이 발랑 넘어갔다.
“악!”
꼬리뼈를 타고 알싸한 고통이 찌릿찌릿 올라왔다. 이불은 이미 진흙탕 위를 뒹굴고 있었다.
“……망했어. 다 망해 버려라.”
한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어쩌다 여기에 와서 이 꼴이 된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서러워 죽겠네! 빗물 때문에 눈이 뜨이지 않았다.
‘난 다 엉망이야.’
그냥 눈 감은 채 이대로 흙으로 사라져 버리길 바랐다. 그런데 그때, 이마와 뺨을 때리던 빗줄기가 뚝 그쳤다.
‘뭐지. 비가 갑자기 그쳤나.’
한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노란색이었다.
“……이안?”
그곳엔 이안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우산을 들고 있었다.
“왜……. 여기에.”
비라면 질색을 하는 이안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흙탕물을 뒹구는 한나에게 한 번, 흙범벅이 된 자신의 이불에 한 번 닿았다.
그때마다 한나의 몸이 긴장으로 움찔거렸다. 모든 상황을 확인한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감기 걸려요.”
무표정하게 던진 한마디에 한나의 마음이 울컥했다. 이안이 우산을 쥐지 않은 손을 한나에게 뻗었다. 그 손은 평소와 달리 맨손이었다.
“……나 더러운데.”
한나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옷이며 머리, 손까지 흙탕물 범벅이었다.
“알아요.”
한나는 자신에게 뻗어진 하얗고 작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 하얀 손에 제 더러운 손을 가져갔다.
순간 이안의 손이 움찔, 했지만 이안은 손을 빼지 않았다. 손에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그 순간 한나를 괴롭히던 서러움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이안…….”
차가운 빗물에 뜨거운 눈물이 섞여 뺨을 타고 흘렀다.
“가요.”
이안이 제 우산을 한나에게 넘겨주려 했지만 우산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나가 이안을 꽉 끌어안아서였다.
“이안. 엉엉……. 내가 얼마나……. 으엉.”
한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이안은 자신의 몸을 더럽힌 흙탕물에 잔뜩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엉엉 우는 한나의 등을 토닥였다.
비가 잦아들었다. 땅에선 생명을 머금은 푸릇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 * *
와작. 와작와작.
창문가에 붙어 이안과 한나의 한 편의 드라마를 관람하던 제레미와 마샤가 과자를 깨물었다.
“네가 말해 줬어?”
“뭔 소리래. 보나마나 비 오는 데 밖에 있는 자기 이불이 걱정돼서 보고 있었겠지.”
마샤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이안에게 선생님한테 왜 그러냐며 오지랖을 떨 때까지만 해도 그가 이렇게 선생님을 애정하는지 전혀 몰랐다.
“별일이네.”
항상 얼음장 같던 이안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면서까지 위로를 하러 가다니.
“아아. 선생님은 나만의 선생님이어야 하는데.”
턱을 괴고 창밖의 모습을 보던 마샤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와작. 와작.
시큰둥하게 밖을 바라보는 제레미는 말이 없었다.
* * *
“콜록, 콜록.”
결국 한나는 감기에 걸렸다. 장대비 속에서 바닥을 뒹굴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쿨럭, 이안, 선생님 괜찮아. 감기 옮아. 가 봐.”
다음 날, 죽 당번은 이안이었다. 물론 한나가 만든 죽을 데워 오는 것이 고작었지만.
그는 죽이 든 쟁반을 한나의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은 아직 뜨거워 보였다.
식탐 많은 선생님이 허겁지겁 먹다 입천장이 다 까지기 좋은 온도였다. 이안이 한나의 침대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오늘 이안의 손에는 또다시 장갑이 덮여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이제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병균 옮는다니까.”
“선생님.”
한나의 걱정을 뒤로하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리깔린 눈은 한나의 이불 꽃무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시선이었다.
“전 더러운 게 싫어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한나는 긴장했다. 역시, 그때의 일을 탓하려는 걸까.
“사람들은 절 더럽다고 했어요.”
이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원망이 아니었다. 그의 상처받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였다.
“깨끗한 것들 사이에 낀 불순분자.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때부터 더러운 것이 싫었어요.”
한나는 숨죽이고 이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깨끗해지고 싶었어요. 더럽지 않고 싶어서 닦고 또 닦았어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더러움이 내 손발이나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안은 황가의 버림받은 자식이었다. 미천한 코르티잔의 배를 빌어 태어난 그는 황실의 수치였다.
분명히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황궁의 유령.
그것이 이안이었다.
“차라리 피를 다 뽑아내면 그땐 날 깨끗하다 해 줄까 생각했어요.”
“이안…….”
“알아요. 다 소용없다는 거. 하지만 그걸 알게 되고도 이 강박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는 누군가에게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한나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한나는 이안을 위로하기 위해 손을 올리다 멈칫했다.
겨우 제 손길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사실은 선생님 싫어하지 않아요.”
“……알아.”
엄청 좋아한다는 것도.
“절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미워해.”
“선생님은 제가 더러워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넌 안 더러워. 이안.”
한나의 손이 이안의 새하얀 장갑 위에 닿았다.
“넌, 절대 더럽지도 밉지도 않아.”
이안의 눈을 마주하는 한나의 눈빛은 더없이 진실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야. 넌.”
누구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선생님이 널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누구보다 귀하게, 소중하게.
이안이 얼굴을 숙였고, 반짝이는 슬픔이 떨어져 내렸다. 한나는 이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아야 했다.
이렇게 여리고 상처받은 영혼이, 어떻게 악당이 되는 거지.
“우린 모두 널 사랑해.”
가져온 죽이 다 식도록 이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게 떨리는 이안의 어깨에 한나의 손이 닿아도, 이안은 더 이상 몸을 굳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