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캐서린은 눈을 끔뻑거렸다. 페레타 1세? 내가 그런 사람을 안다고? 헬렌가의 여주인은 누굴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눈을 멍하니 끔뻑거리던 캐서린은 불현듯 몸을 떨었다.
“이제야 기억난 거냐?”
페레타가 작게 웃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요?”
“죽었으니 여기 있지.”
맞다. 그녀는 죽었다. 세이렌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칼을 맞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이 죽음으로 헬렌은 오랜 기간 이어졌던 전쟁을 끝맺었다. 작은 희생을 끌어안긴 했어도, 헬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캐서린은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럼 이제 진짜 사라지나? 죽으면 끝날 줄 알았더니…….
‘나는 왜 여기서 혼자 있을까?’
캐서린이 고독함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어둠 속 공간이 점점 밝아졌다. 먹물처럼 어둡기만 하던 공간이, 꼭 심연의 바다처럼 푸르게 일렁였다.
“너무 슬퍼 말아라.”
캐서린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페레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지.”
페레타 1세. 페레타 왕국의 초대 군주이자 설인에게 잡아먹혔던 소년.
“네가 아는 페레타가 맞는지 의심 중이라면, 내가 맞다. 너희를 늘 지켜보고 있었어.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 내느라, 너희가 고생이 많았지.”
“그럴 리가…….”
“북부의 가호가 남아 있어서 짧게나마 대화할 기회도 오는구나.”
캐서린은 두 눈을 의심했다.
“혹시, 야만족이 처음 등장할 때 있던 소년이 진짜…….”
“그게 나다. 지겨운 싸움을 이어 나갔지. 페레타 왕국은 많은 희생 속에서 만들어졌다. 성벽을 올릴 때부터 왕국을 건국하고 이어 오기까지, 조금도 평탄했던 적이 없었지. 낯선 적들과 싸운다는 건 그만큼 어려움도 많은 법이거든.”
페레타는 눈앞의 여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잘 버텼다.”
페레타는 노쇠한 노인이 아니었다. 중년의 사내는 얼굴에 주름이 졌을지언정, 약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갑주를 입은 모습은 단단하고 올곧았다.
“나도 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만, 북부의 가호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어렵겠어. 네게 인사할 시간을 얼마 허락받지 못했거든. 야만족의 저주가 사라졌으니, 북부의 가호도 곧 사라질 거다.”
저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북부에서 천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두 대립이 진짜로 끝났다. 야만족을 옭아맸던 저주도 끝났다.
야만족은 이 땅에서 사라졌고, 야만족으로부터 북부의 주인을 보호하던 가호도 유명무실해졌다.
“북부는 마음에 드냐?”
“좋은 곳이에요. 춥지만 사람들도 따뜻하고요.”
“그래. 좋은 곳이지. 살았을 적에는 살갗을 찌르는 추위가 싫었는데, 죽으니까 때때로 그립기도 했어.”
페레타는 살아 있을 적의 추억거리라도 떠올리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캐서린에게는 너무 먼 존재였지만, 북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서일까? 이 영혼이 가진 무게감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환생을 못 한 건가요?”
“환생해서 어딘가에서 살고는 있겠지. 미련이라는 게 남았을까? 북부를 이대로 놔두고 눈을 감아 버리기에는 이것저것 눈에 밟히는 게 많았다. 그래서 영혼의 반을 잘라 내서 이곳에 머물렀지. 긴 시간을 보내고 보니까, 어느덧 북부의 가호에 스며들어 북부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고 있더구나.”
캐서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현실감이 없다. 무언가 머리를 툭― 한 대 건드린 기분이었다.
“왜, 불가능한 것 같으냐? 시간을 돌려 죽은 사람도 살려 내고, 천여 년 가까이 설원을 지켰던 설인도 있는데. 내 영혼을 반쪽으로 갈라 북부의 가호에 묶어 두는 것도 어려울 건 없지. 그리고, 북부의 가호도 끝났으니 나도 이제 떠날 시기가 왔고,”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들은 끊김 없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멍해졌다.
설화나 금서에서나 봤던 페레타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마지막 남은 설인이 설원과 북부에 작은 선물을 할 듯하니까, 나는 네게 작은 선물을 할까?”
페레타가 캐서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어렸다. 푸르른 물결처럼 눈빛이 일렁거렸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페레타는 캐서린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작게 웃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일렁이던 빛이 캐서린에게 서서히 스몄다. 머릿속이 희게 물들었다.
“됐다.”
페레타는 남은 미련을 떨쳐 버린 듯 후련해 보였다.
긴 서막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떠날 때가 도래했으니, 남은 마지막 힘까지 모두 긁어모았다.
“가거라.”
물결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캐서린을 감쌌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무의식 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간 너 자신을 잃는다. 지금은 북부의 가호가 네 영혼을 보호한다지만, 이 가호도 불안정해.”
대화를 오래 이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 같았다.
“네 영혼을 붙들어 두느라 내 힘도 거의 소진됐어. 이제는 진짜 떠날 때가 온 것 같구나. 그래도 가기 전에, 얼굴 한 번쯤은 봤으면 싶었는데 말이지.”
페레타는 감았던 눈을 떴다. 물결이 일렁이듯 한 번 출렁거리더니, 누군가 물결을 밟고 섰다. 긴 은발이 날렸다. 페레타는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을 보고 핀잔했다.
“그래. 저 얼굴 말이다. 저 얼굴 한 번 보기 너무나 힘들었지.”
극적인 재회를 떠올렸는데, 뎐트는 심드렁했다. 그는 말없이 고요히 페레타를 응시했다. 너무 먼 기억이었을까?
뎐트는 페레타를 못 알아본 것 같기도 한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던 모양이다. 뎐트가 한결 풀린 표정으로 답했다.
“뭐 보기 좋은 얼굴이라고 기다리고 서 있나?”
뎐트는 페레타와 캐서린을 번갈아 봤다.
“벌써 자아를 잃었으면 어쩌나 하고 왔더니…….”
“북부의 여주인이니 내가 마지막까지 지키는 게 맞지. 그리고 또 이 영혼을 붙잡아 두면, 너와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
페레타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아쉬움까지 내려놓은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갑옷을 재단장하고 검을 갈무리하는 게, 앞으로는 싸울 일이 없다는 뜻 같았다.
“얼굴 봤으니 됐다.”
페레타의 잔상이 점점 흩어졌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던 게 아닌가?”
뎐트가 되묻는 이야기에 페레타는 답했다.
“천여 년 가까이 북부를 지켜 온 네게 무슨 말을 할까?”
“…….”
“이제는 자유로워져라. 너무 긴 시간 고통받았잖아.”
한때는 원망한 적도 있었다.
“네 잘못도 아닌 일로 천여 년 가까이 벌을 받았으니, 자유로워질 때도 됐지.”
너를 원망할 일이 아님을 안다. 설원에서 내려온 야만족과 싸울 때, 수년간 왜 이런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다 끝났으니 그거로 된 거다.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 봤으니 됐어.”
“…….”
“다시 또 인연이 닿거든 보자.”
누구를 위한 다툼이었고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이 긴 시간 속에서 다툼에 휘말린 여러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페레타도 그중 하나였다.
설인에게 잡아먹혔던 소년은 힘없는 피해자였다. 소년을 잡아먹었던 설인은 저주를 받아서 멸했지만, 같은 설인이라는 이유로 뎐트가 놈의 죄를 짊어졌다.
설인이 죽은 자리에서는 야만인이 태어났고, 인간들은 야만족과 싸웠다.
‘그 시작을 함께 했던 사람이라…….’
페레타는 북부와 늘 함께였다.
‘페레타.’
캐서린은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넨시는 주인마님의 침소에 우두커니 앉아서 시트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내성 성벽에 헬렌을 뜻하는 월계수 깃발이 꽂혔다. 보통 때라면 붉은 깃발을 쓰지만, 주인 내외의 부고 소식을 알릴 때는 흰 깃발을 썼다.
넨시는 마지막으로 캐서린의 손등을 더듬었다.
‘차가워.’
몸에는 차가운 한기가 어렸고, 생전의 온기를 찾기 어려웠다. 넨시는 시트를 다시 단정히 정돈하고 침실에서 나왔다.
그쯤, 뻣뻣하게 굳었던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 * *
공기는 산뜻했다. 향냄새인가?
‘꽃향 같기도 하고 분향 같기도 하고.’
시야가 너무 밟았다. 뻣뻣한 손가락을 움직이려는데, 몸이 굳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캐서린이 숨을 어렵게 터트리는데, 사르륵― 하며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침대 캐노피가 얕게 일렁거렸다. 캐서린은 침대 시트를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깼나?’
무겁기만 하던 몸이 점차 가벼워졌다. 시야도 점차 또렷해졌다. 캐서린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뻐근해.’
그녀가 부스스한 머리칼을 헝클이며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뻣뻣하던 몸이 점점 개운해졌다. 침대 캐노피 밖으로, 침실 전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캐노피를 젖히자 빛이 쏟아졌다. 캐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몸의 모든 감각이 서서히 살아났다. 그간 몸이 이 정도로 가벼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캐서린은 맨발을 내려다보고 보들보들한 융단을 밟았다. 그녀는 익숙한 전경을 눈에 담아내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날씨가 유독 맑다. 헬렌에서는 눈이 오기 전이면 꼭 날씨가 맑던데, 조만간 눈이 또 쏟아지려나?
‘칼 맞은 건 괜찮나?’
어디에 칼을 맞았더라. 캐서린은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그녀가 흰 침의를 들춰 보는데, 침의 아래로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죽었다 살아나는 게 두 번째인가?’
어째서인지 삶이 억지로라도 캐서린을 이 땅에 붙잡아 두려는 것 같았다.
캐서린은 침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복도로 나왔다. 침실 밖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