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타일로는 잠든 아이의 뺨을 가만히 만졌다. 차갑지만 보드랍다.
너는 언제 이 정도로 큰 거냐?
아빠가 너를 품으로 안아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먼저 보내야 한다고?
“하늘이 내게 이래선 안 된다.”
네가 내게 그래선 안 됐어. 캐서린. 아가. 캐서린……. 제발. 타일로는 잠든 아이의 눈을 더듬거렸다. 고요히 잠긴 눈은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숨이 멎었지만, 코밑에서는 언제라도 가냘픈 호흡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아닌 거냐?’
타일로는 당혹감으로 손끝을 떨었다.
이 아이가 아니다. 내 아이가 아닐 거다. 내 아이는 밀던가에 잘 있을 거야.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아이의 얼굴을 보면 그런 마음이 죄악스러워졌다. 네게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빠 오래 기다렸지?”
타일로는 보드라운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어. 헬렌으로 가면 너부터 찾아가야겠다고 늘 다짐했었고. 얼굴이라도 봐서 다행인 걸까?”
아빠가 늦은 거냐?
아니면 제때 온 거냐?
“아빠는 잘 모르겠다.”
타일로는 숨을 죽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 * *
로렌디스는 헬렌 내부를 순찰했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일상은 이어졌다.
지반이 곧 무너질 수도 있다는 기사단의 보고대로, 현실은 참혹했다.
땅이 불안정했다. 작은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게 떨리는 웅웅― 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지반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대책은 강구됐나?”
“지반을 보수하는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성벽이고 뭐고 버텨 줄지가 의문입니다. 설원에 파묻힌 전사자의 주검들도 수습해야 하고…….”
로렌디스는 뻐근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지반을 보수하는 작업부터 서둘러. 지금 당장 성벽이 무너진들, 북부를 습격할 만한 머저리는 없을 거니까.”
부기사단장은 숨을 멈췄다. 그의 주군이 요즘 말이 점점 험악해지는 것 같았다.
‘예민해지셨군.’
부기사단장은 로렌디스의 지시를 머리에 기입하고 되물었다.
“야만족은 진짜 사라진 겁니까?”
“부기사단장도 눈으로 직접 봤을 것 아니야?”
“직접 보긴 했는데 현실감이 안 듭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 아버지 세대에도 헬렌은 설원을 지켰으니까요.”
길게 이어 온 전쟁이 끝났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는 허무함이 더 컸다.
진짜 이대로 끝인가?
모든 게 끝났다고?
쿵― 지반이 한 번 더 울렸다. 지반이 이런 식으로 계속 흔들리다간 설원에 쌓인 눈에 쏟아져 내려오면서 헬렌을 덮칠지도 모른다.
‘무엇 하나 쉽게 해결되는 일이 없어.’
로렌디스는 최소한의 인원만 이끌고 설원을 찾았다.
설원에서는 전서자의 시신을 한창 수거하는 중이었다. 흰 눈이 내려앉았던 시신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됐다.
로렌디스는 현장을 한 번 살펴보고 주둔지 일대를 훑었다. 그가 묵묵히 설원을 살피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부가 단체로 겁을 상실했어.”
로렌디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뎐트가 설원에 서 있었다.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여기서 기웃대고 있어?”
로렌디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지금도 서서히 메말라 가고 있었다.
“죽은 이들을 두 번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이런 미련한 것들 같으니라고.”
뎐트는 뒷짐을 진 그대로 웃었다. 로렌디스는 그런 뎐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할 시간은 되나?”
“헬렌의 공작께서 직접 독대를 요청하는데, 한낱 미물이 무슨 수로 거부하겠나?”
뎐트가 먼저 앞서 걸었다. 로렌디스는 부하들에게 하던 일을 계속하라 해두고 뎐트를 따라갔다. 로렌디스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한 번 더 물었다.
“그간 어디 있었지?”
“어디긴. 나야 늘 설원에 있지.”
뎐트는 로렌디스를 돌아보며 작게 손짓했다. 그는 호리병 모양을 손짓으로 보여 주며 ‘이게 맞나?’라는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이런 호리병에 담겼던 거 기억하나? 왜 그대가 주둔지에서 내게 줬던 쓴맛 나던 술 말이다.”
“독주?”
“그래 그거. 그때 줬던 독주 아직도 있나?”
“여기서 먹겠다고?”
“설인이 설원을 지키는데, 뭐가 걱정이냐?”
취해서 쓰러져도 설원 위인데. 그 설원의 주인이 뎐트이고. 뎐트는 별걱정을 다 한다며 킥킥댔다.
“없으면 좀 아쉽겠지만.”
“주둔지로 가면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없어.”
“가져다주면 안 되나? 예전처럼 한 잔만 했으면 싶은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
뎐트가 묻는 이야기에 로렌디스는 숨을 골랐다.
“갑자기?”
뎐트의 부탁은 뜬금없으면서도 갑작스러웠다. 뎐트는 뒷짐을 진 그대로 설원을 내려다봤다. 그는 꼭 이곳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머릿속에 새겨 넣는 것 같았다.
“부기사단장. 잠깐만 이리로 와 봐.”
로렌디스는 부기사단장을 불렀다.
“주둔지로 가서 독주 있는 거 아무거나 가져와라.”
부기사단장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렌디스는 부기사단장을 보내두고 설원에 걸터앉았다. 설원에는 여전히 눈이 소담히 쌓여 있었다.
“여기는 언제쯤 무너질까?”
로렌디스가 나지막하게 묻는 말에 뎐트가 매끄럽게 답했다.
“글쎄. 이대로라면 설원은 몇 주 내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너는 설원에서 지낸다는 놈이 이대로 괜찮은 거냐?”
“헬렌 공작이 야만인을 걱정할 때도 다 있군.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설원이 무너져 내린다는 건 설인이 설 자리 또한 무너져 내린다는 뜻이다. 태초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뎐트가 그런 뜻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너는 평화롭구나.’
부기사단장이 독주를 가져다줬다. 두 사람 몫의 술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도자기 술잔은 한 손아귀에 들어갈 만큼 작고 가벼웠다. 부기사단장은 안줏거리로 육포도 슬쩍 밀어줬다.
“헬렌은 얼마나 버틸까?”
“글쎄. 그쪽도 이대로라면 1년 안에 무너질 확률이 높지. 지반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지나면 땅이 갈라지며 서서히 내려앉을 거야.”
뎐트는 술잔을 꺼내서 독주를 따랐다. 독한 향이 코를 할퀴었다. 뎐트는 잔을 만지작거리다 술잔을 입에 댔다. 그리고, 인간들의 예절을 엿본 기억을 살려 독주를 마셨다.
“걱정하지 말아라.”
뎐트는 작게 웃었다.
“이곳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진 않으마.”
“너는…….”
“십여 년인가? 알고 지낸 세월이 길긴 길었어. 미련한 북부인들 사이에서 즐거웠다. 너를 만난 것 또한, 내게는 소소한 흥밋거리였어.”
일종의 작별 인사 같았다.
“페레타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가까이 지내기는 천여 년 만에 처음이었지. 눈 속에 파묻힌 너를 꺼낸 건 충동적이었고, 내가 네게 심술궂게 군 적도 많았지.”
“…….”
“헬렌 부인에게도 심술궂게 굴었고.”
오랜 시간을 보내온 설인에게는 삶이란 너무나 따분한 영역이었다. 그랬지. 너무 긴 시간을 살았어. 그래서 괜한 심술이 났을지도 몰라.
“괜히 자극했나? 왠지 첫 만남에서부터 미움을 많이 샀던 것 같네. 그래도 이해해라. 너무 오래 살았어. 사라져야 할 때 사라지지 못하고, 설원에 발이 묶였으니…….”
“뭐?”
“그냥, 심술이었거니 해 둬.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네게 미움 받긴 싫다. 페레타 이후로는 처음으로 가까이 지냈던 인간이니까. 악우 혹은 친우처럼.
친우라. 친우…….
덧없는 이름이지만 듣기는 좋다.
“너희는 지금도 아등바등하는구나.”
인간들은 짧은 삶을 살지만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았는데, 필사적이기에 한발 더 앞서 나간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배웠다.
“이 지겨운 전쟁의 끝내 줘서 고맙다.”
“그 끝은 내가 낸 게 아니야.”
“헬렌이 냈지. 그리고 네가 곧 헬렌이지.”
그럼 이 전쟁을 끝낸 건 네가 맞다. 오랜 시간을 버텼다. 과연 긴 시간이었지. 그 긴 시간을 버텨내 줘서 고맙다.
“너도 사라지는 건가?”
“설 자리를 잃은 설인은 사라지는 게 맞지.”
야만인이 모두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지지 못한 건, 끝내야 할 게 있어서였다. 뎐트는 이들이 맺지 못한 마무리를 지어 줘야 한다.
“가끔 눈앞에서 꺼져 달라고 험악하게 굴더니, 왜 아쉬워해? 아쉬워할 건 없으니 아쉬워 마라.”
이제는 작별이다. 뎐트는 술잔을 내려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로렌디스는 빈 옆자리를 내려다보고 다시 설원을 내려다봤다. 웅웅거리는 진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설원의 눈도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 * *
캐서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캐서린은 몸을 웅크렸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더라? 머리가 멍했다. 잠이 들고 깨길 몇 번이고 반복했다.
‘편하네.’
고통도 없다. 캐서린은 얼마나 흘렀을지도 모를 시간을 가늠하며 멍하니 있었다.
캐서린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검은 어둠 속에 파묻혀서 스스로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캐서린 헬렌’
누군가 그녀에게 이 이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세뇌하는 것 같았다. 캐서린 헬렌, 기억해. 그게 네 이름이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담백했다. 가느다랗고 여렸다.
‘잊지 마. 내 이름이야.’
캐서린은 눈을 떴다.
“북부가 울던데 그게 너 때문이냐?”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누구세요?”
“글쎄. 네 눈에는 내가 누구로 보이냐?”
긴 흑발을 지닌 사내가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체격도 컸으며 여기저기에 흉터가 가득했다. 뺨을 가로지르는 칼자국과, 손아귀와 손등에 생긴 상흔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페레타 1세라고 하면 네가 이해하기 쉬울까?”
“그게 누구…….”
“너는 나를 안다. 기억해 내라. 네 자아를 잃으면 돌아갈 길 또한 없어질 거야, 헬렌가의 여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