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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91)화 (91/129)

91.

어린 소년이던 페레타가 설원에서 길을 잃은 건 열다섯 무렵이었다.

페레타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한 소년이었으며, 설원을 헤매는 내내 눈구덩이에 몸을 빠트리기 일쑤였다.

페레타는 구덩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뎐트!”

“…….”

“거기 있는 것 다 압니다!”

눈 속에 파묻힐 뻔한 소년을 구해 주길 수십 차례. 소년은 이제 자연스럽게 뎐트를 찾았다.

뎐트는 뒷짐을 지고 서서 소년을 내려다봤다. 길 잃은 것 똑바로 길까지 알려 주었더니, 이놈은 왜 계속 애먼 구덩이에 발을 빠트리거나 몸을 빠트리는 거야.

“네놈은 지능이 좀 모자란 거냐?”

“거기서 보고만 있지 말고 좀 꺼내 주십시오.”

페레타는 당당하게 팔을 뻗었고, 뎐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네놈은 겁대가리도 없고 대책 없이 해맑구나.

“뎐트, 지금 뒤로 돌아선 겁니까?”

뎐트는 이놈이 눈 속에 파묻혀 얼어 죽든 말든 내버려두기로 했다. 뒤에서는 페레타가 열심히 뎐트의 이름을 불렀다.

뎐트. 뎐트. 뎐트. 그 부름이 지겨워서 다시 구덩이를 찾았을 때 페레타는 지친 얼굴로 그를 반겼다.

“왜 그리 늦으셨어요?”

뎐트는 맥이 빠졌다.

인간은 나약하다. 너무 나약한데 또 살겠다는 의지는 강하다. 그 괴리감이 뎐트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 길로 내려가면 된다고 이야기했잖아. 왜 시시때때로 혼자서 엎어지고 여기저기 빠지는 거냐?”

“어차피 구해 주러 오실 거면서, 왜 그리 또 투덜댑니까?”

뎐트는 페레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찔렀다. 페레타는 몸에 스몄던 한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 머저리는 이대로 놔뒀다간 이곳에서 객사하기 딱 좋다. 뎐트는 따분하면서도 귀찮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설원을 걷는데, 페레타가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이놈은 설원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 줘도, 왜 또…….

“제 아버지는 사냥꾼이십니다. 설원으로 사냥을 가셨는데, 아버지 찾는다고 잠깐 왔다가 길을 잃은 것 있죠?”

“네 이야기 물은 적 없다.”

“뎐트는 사람이 아닙니까? 설원에는 반신이 산다고 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나요.”

재잘재잘 말이 많은 놈이었다. 그리고 뎐트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부산스러움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네놈 그 입부터 좀 닫아라. 협박하듯 읊조려도, 페레타는 그의 경고를 시시때때로 잊었다. 이 또한 수십 차례다.

“사냥꾼의 아들이라는 놈이 몸이 허약하군.”

“아픈 부분을 콕콕 찌르시는군요.”

“내려가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이번에는 페레타도 뎐트의 경고를 진지하게 들었다. 어두워진 설원은 낮보다 더 위험하다. 산짐승들이 튀어나와서 어슬렁거리기에, 짐승들의 밥이 되기 딱 좋았다.

이놈은 짐승들을 피해서 달아날 체격도 체력도 없는 듯 보이고.

“고마워요.”

그 말이 끝이었다.

페레타는 다시 떠났고, 뎐트는 고요히 그의 뒤를 따랐다.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저놈은 모습을 보였다간 또 재잘재잘 말을 걸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길 얼마.

페레타는 며칠 만에 설원을 떠났다. 설원을 헤매던 아이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그를 챙겼다.

그리고 뎐트는 다시 설원으로 갔다.

설원에 도착한 그날,

설원에는 뎐트 외에도 설인이 하나 더 있었다.

뎐트가 페레타와 마주친 그날, 또 다른 설인은 그의 부모와 마주쳤다. 놈은 그를 보면서 희번덕 웃더니 인간 부모에게 물었다.

“아이를 되찾을 수 있다면, 너희 목숨이라도 내게 바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저희 목숨을 거둬 가도 좋습니다.”

그리고 놈은 인간 부모를 씹어 먹었다.

잘근잘근 씹어 먹은 그 설인은 자리를 떠났다.

물론, 그 부모가 지키려던 아이는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부모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설원을 찾았으며, 놈은 남은 아이마저 씹어 먹었다.

‘식인을 탐한 반신.’

그래서 반신의 자리에서 쫓겨난 설인.

그놈이 식인을 한 이유는 하나다. 오랜 삶이 따분했기에. 작은 묘미라도 즐겨 보자고 했겠지. 그런데 신들은 놈에게 저주를 내렸다.

놈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놈이 죽은 자리에서 야만족이 태어났다.

뎐트는 시간을 과거로 돌렸다.

아주 일부만 돌렸다. 아이와 부모가 살아 있던 시절로.

다만, 그 저주는 피해 가지 못했다.

뎐트는 설원에 다리가 묶였으며, 반신의 흔적이었던 야만족이 설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원래라면 페레타와 그 가족이 참사를 당했을 그 무렵.

아래에서는 야만족에 의해 여러 인명피해가 났고, 인간들의 울음소리가 늘 들렸다.

그 시기에 페레타와 그 부모가 성벽을 세워서 영토를 보호했으며, 페레타는 설원에서 내려오는 야만인과 싸웠다.

그렇게 페레타 왕국이 탄생했다.

평민에 불과하던 페레타가 왕이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페레타는 설원의 야만족을 토벌하고, 성벽을 세워서 영토를 지켰다.

“뎐트!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압니다! 언제까지 모습을 숨길 겁니까!”

네가 나를 기억하는 건 의외였지만.

“당장 나오십시오. 뎐트!”

“…….”

“이곳에 있다는 것 압니다!”

나가지 않을 거다. 나는 네게 이제 해 줄 이야기가 없다.

페레타는 영토를 수습하며 북부의 왕이 됐으며, 야만족으로부터 영토를 지켜 냈다. 그의 부모는 이른 나이로 병사했으며, 페레타 초대 왕이 사냥꾼의 아들이었다는 건 비밀리에 붙여졌다.

그의 부모는 설인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죽을 운명이었구나.

“뎐트!”

그러나 페레타는 잊을 만하면 그를 찾았다.

페레타는 군주가 된 뒤로도 설원을 누볐다.

누구를 찾는지는 뻔했다. 그럼에도 뎐트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의 침묵은 페레타 1세 왕이 죽기 전까지 이어졌다.

뎐트가 페레타를 다시 찾은 건, 페레타가 죽은 뒤였다. 그 뒤로 페레타의 아들이 왕국을 이어받아서 북부를 지켰다.

‘왜 안 나와!’

‘내게 할 이야기가 있잖아.’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 잠깐만이라도 이야기하잔 말이야.’

‘당신 아니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단 말이야!’

그 목소리는 이제 추억 속에 묻혔다.

페레타 1세가 서거한 뒤로도, 뎐트는 설원을 지켰다. 페레타 5세까지 고대 왕국의 역사는 이어져 오다가, 반란으로 무너졌다.

새 왕조가 다시 나타나고, 제국이 북부를 지배하는 순간까지도. 뎐트는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다.

그때 놈과 이야기라도 나눠 볼 걸 그랬다. 그랬다면 옅게 남은 미련마저도 털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뎐트는 첫째 지렁이를 내려다봤다.

이 흔적은 여전히 혐오스러웠다.

용서받지 못할 과거를 보는 기분이었다.

* * *

로렌디스는 지하 감옥에서 나와서 후원을 밟았다. 후원 내부가 적막했다. 이맘때쯤이면 아내가 여기서 산책을 할 시간이었는데. 그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저 벤치 한쪽에 팔이 작게 빠져나와 있었다. 아내가 벤치 의자에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잠들었는데, 자세가 불편했는지 미간 사이를 약하게 찌푸렸다.

“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주, 주인님. 오셨습니까?”

“넨시랬나? 그녀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는 거지?”

로렌디스는 머리칼을 헝클이며 하녀를 찾았다. 네 주인 똑바로 모시지 않고 뭣 하느냐는 질책이었다.

넨시는 억울함에 손가락을 오물거렸다. 마님께 이미 몇 번이고 안으로 드시라 이야기했지만, 마님께서 고집을 꾸역꾸역 부렸었다.

“산책하시다가 피곤한지 잠드셨습니다.”

“잠을 잔다고 했으면, 침실로 데리고 갔어야지.”

“그건…… 마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여기 계셔야 나중에 각하께서 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로렌디스는 약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서 올 건데 뭣 하러.”

“마님께서도 이게 더 마음이 편하시다기에 이대로 모셨습니다만, 일단은 그럼 깨우겠습니다.”

넨시는 일단 주인님 마음이 불편해 보이시니까, 마님을 깨우는 게 먼저 같다고 가까이 다가갔다.

로렌디스는 그런 넨시를 말렸다. 기껏 잠든 사람을 깨울 필요는 없다. 요즘 밤잠도 자주 설치니까 이대로 조금 더 자게 두는 게 좋겠다.

“내가 데려가지.”

로렌디스는 의자에 반쯤 기대다시피 누운 캐서린을 안아들었다. 캐서린이 고개를 떨구며 푸스스― 숨을 골랐다.

깬 건가? 흠칫거리며 내려다보는데 아내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긴장이 풀린 몸이 느른하게 늘어졌다.

로렌디스는 ‘쯧’ 가볍게 혀를 차고서 침실로 갔다. 하인들은 주인 내외의 모습을 보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잘 거면 침실에서 자면 되지.”

뭣 하러 밖에서 찬바람 쐬면서 잠들었는지. 로렌디스는 아내를 침대에 눕혀 두고 갑갑해 보이는 옷가지를 한 꺼풀씩 벗겼다.

나중에야 하녀를 부를까 싶었지만, 다들 이미 내보냈다. 더군다나 이제는 옷 속에 감춰진 몸도 익숙하게 떠올릴 수 있다.

로렌디스는 드레스의 허리 부분을 느슨하게 풀고, 등에 묶어둔 이음새를 풀었다. 그리고 갑갑해 보이는 옷을 끌어 내리는데, 흰 속옷이 보였다.

로렌디스가 아내가 깨지 않게 드레스를 마저 벗겨 내고 고개를 들었는데…….

“당신.”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로렌디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아내가 졸음기에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긴 금발이 베개 위에 흩어지고,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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