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아직 탄생일은 오기도 전인데, 선물을 가득 받았다.
캐서린은 마른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유난히 높았다. 풀잎이 사르륵 바람 아래에 눕고, 발목을 간지럽혔다. 전날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냈더니, 오늘 내도록 머리가 멍했다. 지난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걸 받았는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캐서린은 연꽃 귀걸이를 빼서 함에 넣었다. 그러고는 함을 툭툭 두들기며 상념에 잠겼다.
“각하께 받은 선물입니까?”
모리켄 부인이 이번 기념연회 준비를 도와준다며 내성에 방문했다.
“네. 예쁘죠?”
“각하께서는 안목도 좋으시죠. 왜 지금 안 하시고요?”
“연회 때 쓰려고요. 그럼 그날 그 기분이 오래 유지될 것 같거든요.”
침실 탁자에 머리를 기대자, 긴 금발이 흘러내렸다. 캐서린이 검은 함을 만지작거리자, 모리켄 부인이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그래도 다릅니다. 지금껏 받은 게 헬렌 공작으로 주는 물건이었다면, 이번 세공품은 로렌디스 님께서 주는 물건이니, 의미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건 가문의 수장으로 주는 선물이고, 이 세공품은 로렌디스 개인이 주는 선물이다. 전자는 가문이 주는 선물이라면, 후자는 로렌디스가 주는 선물이었다. 그 의미가 다르다는 건 캐서린도 일찍이 실감했다.
“어쩐지. 보석과 장신구를 휩쓸듯 사는데 귀걸이는 없어서 왜 그런가 했습니다.”
“그랬네요. 귀걸이가 따로 없었구나.”
“네. 이렇게 마님께 따로 선물을 주려고 목록에서 제외했던 모양입니다. 각하께도 의외의 면이 있군요.”
연회에 앞서 초대장을 보내고 식기류와 탁자보 등을 다시 점검했다. 촛대와 각종 물품들의 개수를 파악하고, 연회장의 구조에 맞춰 가구 배치를 조율하고 보니까 늦은 저녁이었다.
“오신 빈객들께 드릴 선물을 적절히 골라야 해요. 부인께서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아주 즐거운 일이 남았네요. 적당한 목록을 뽑아 오겠습니다.”
빈객들에게 줄 선물은 브로치로 결정했다. 흰 눈꽃을 보석 안에 넣어서 가공하고, 옷에 달 수 있게끔 장식을 추가했다. 도안이 나온 뒤에는 공방에서 알아서 해 줄 거니까, 이 또한 금방 끝났다.
초대객 목록을 확인하고 연회장에 깔리는 흰 레이스와 장식들을 보니까, 처음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하얀 세상 위에 혼자서 덩그러니 던져진 기분이었는데…….
“마님?”
캐서린은 배시시 웃다 말고 흠칫했다.
“응?”
“공방에 의뢰를 맡겼습니다. 이주일 뒤에 찾으러 오라 했으니, 사람을 보내 찾으면 됩니다.”
“고마워. 넨시도 고생했어. 물건 개수 확인하는 거 잊지 말고.”
캐서린은 물품 목록을 한 번 더 점검하고 넨시에게 건넸다. 모리켄 부인이 활짝 웃었다.
저택에 활기가 돌았다. 하인들은 분주히 다녔고, 싫은 기색 하나 없는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캐서린은 그들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고개를 젓고 웃었다.
“또 서재로 가십니까?”
“윽. 지금은 못 가. 또 갔다간 로렌디스 손에 끌려 나올지도 몰라.”
“맞습니다. 요즘 각하께서 아주 눈을 부릅뜨고 계시더라고요. 잠은 침실에서 자야죠. 마님께서 서재에서 한 번 더 잠들었다간, 아랫것들을 야단 낸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모리켄 부인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넨시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몸을 아끼십시오. 마님께 병이 나면, 아랫사람들도 각하께 크게 혼납니다.”
실제로도 캐서린이 몇 번인가 서재에서 잠들자, 로렌디스는 하인들을 쥐 잡듯 잡기 시작했다. 아랫것들이 제대로 보필을 못 하니까 좁은 서재에서 잠드는 거라며 닦달하는데, 로렌디스의 성화에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잔소리가 유독 많긴 하지만 그게 다 애정입니다. 아마도요. 그럴 겁니다.”
캐서린은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걷다가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맑게 갰다. 또 얼마 뒤면 눈이 폭풍처럼 쏟아질 것 같다.
* * *
“마담 더켈리입니다.”
더켈리 의상점의 주인으로, 이번 연회복 의뢰를 맡은 마담이었다.
응접실 한쪽에 전신거울을 놓고, 의상점의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번 연회복을 미리 입어 보기 위해서였다.
흰 드레스가 몸에 감겼다. 가슴둘레나 허리둘레가 안 맞으면 다시 수선해야 한다며, 의상점의 마담이 다녀갔다. 드레스는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식이었다. 촘촘히 덧댄 천이 화려하게 부풀었고,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잘록하게 내려오는 옷맵시도 고급스러웠다.
“잘 어울립니다. 각하께서 신신당부하며 맡겼는데 다행입니다. 어깨와 골반 쪽만 다듬으면 되겠습니다.”
구두도 백옥색으로 드레스에 맞췄다. 드레스에 있는 레이스 문양을 구두에 똑같이 새겨 넣고, 발목에 가죽을 덧대서 폭신하게 쿠션감을 주었다. 캐서린이 한 바퀴 돌며 착용감을 확인하자, 마담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각하께 추가 수당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다.”
농담조로 하는 이야기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이번 의뢰를 위해서 한 달간의 의뢰를 모두 파기했다더니, 그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캐서린은 전신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목 옆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몸을 뒤로 돌려서 확인하자, 등이 깊게 파여 있었다.
“등을 깊게 파서 매끄럽게 선을 냈습니다. 이 부분까지는 각하께서도 모를 겁니다. 보여 드리지는 않았거든요.”
넨시가 활짝 웃더니 마담과 손뼉을 쳤다.
“고생했어, 마담.”
“어깨에서부터 삼각형으로 떨어져서 맵시도 아름다울 겁니다. 결혼식이 너무 급하게 준비돼서 부족한 게 많았잖습니까?”
캐서린은 어깨를 더듬거리며 옷을 만지작거렸다. 결혼식을 워낙 급하게 치러서 기억나는 것도 잘 없다. 드레스부터 모든 게 순식간에 준비됐고, 시간도 없어서 얼렁뚱땅 해치워 버리는 격이었으니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결혼식 준비가 길어졌어도, 캐서린은 피곤해서 금방 지쳤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결혼식도 잘 마무리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어떱니까?”
“마음에 들어. 더없이.”
“각하께서 막무가내로 의뢰를 하셔서 마감 기한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이전 의뢰를 모두 파기하면서 든 위약금을 떠올리면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작은 다이아가 빛처럼 드레스 위에 흩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 화려함에 질식될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감싸 주는 포근함은 몸을 끌어안는 것 같았다. 드레스 환복을 끝내고 마담은 마지막으로 수선할 것들을 수선한다며 떠났다.
캐서린이 멍하게 앉자 넨시가 캐서린의 다리를 주물렀다. 굳은 근육을 풀어 줘야 한다며,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마사지를 받는 중이었다.
“마님께 무슨 선물을 드려야 할지 잘 몰라서 고민했답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별거 아니에요! 요즘 마님께서 서재에 자주 다니시는 것 같아서, 책갈피를 준비해 봤어요. 그리고 깃펜도 같이 넣어 두었어요.”
포장지를 뜯자 빳빳한 책갈피와 깃펜이 나왔다. 캐서린이 종이를 꺼내서 쓰자, 글씨가 부드럽게 적혔다. 잉크 냄새가 묻어나자 기분이 좋아졌다. 책갈피에는 필기체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캐서린은 책갈피와 깃펜을 챙겼다. 작지만 오래오래 쓸 것 같았다.
* * *
시간이 흘러 기념연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생일이라니. 어릴 적에나 챙겨 봤지. 커서는 처음이려나.’
캐서린은 기념연회의 준비 현황을 파악하고, 하녀들에게 피부 관리를 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제임스는 자금줄이 막혔는지, 불법 왕래를 할 때보다 정착한 지금이 더 금전적으로 고단하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자금이 왜 부족해?”
“여기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월급쟁이라고! 한라원에서는 모든 수익이 내 몫이었는데, 고작 월급이나 받는 신세란 말이야.”
진료동의 월급이 부족할 리는 없다. 헬렌 공작가의 직속 의료진인데, 그 돈이 부족할 리도 없고.
단지 제임스가 자본 앞에서 솔직한 만큼, 합법적으로 버는 돈보다는 불법적으로 버는 돈에 더 혹한 것이다. 규모부터가 합법적인 경로보다 더 컸고, 혼자서 돈을 다 휩쓸었다니까 이해는 됐다.
“제임스, 이젠 안 돼.”
“스승님이 또 불법으로 왕진의뢰 맡았다간 내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린댔어. 그 노친네는 한다면 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어서는.”
“진료동 식구들과는 어때?”
제임스는 모지리들 고생이 많다고 낄낄대며 웃었다.
“실력이 부족하니 노력이라도 더 해야지. 약초 배합 비율이나 상처 봉합 기술이 너무 형편없어. 내가 외과의도 아닌데 그놈들보다 솜씨가 좋다니까. 그럼 말 다 했지.”
“혹시…….”
“걱정 마. 저번처럼 각혈할 일은 없어. 진짜 회복됐다는 방증이었나 봐. 훨씬 좋아졌어.”
오늘은 연회 중에 혹시나 각혈하거나 하면 안 되니까 미리 확인하러 왔다. 각혈 뒤로 몸이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는데 진짜였다니. 캐서린이 멍하니 입술을 만지작거리자 제임스가 비장하게 덧붙였다.
“잘 해결되면 나도 여기서 꺼내 줘.”
“어째서?”
“나는 이런 합법적인 곳에서는 못 지내. 벌써부터 지겨워서 몸이 삐거덕거려. 머저리들 머리 쥐어박으며 가르쳐 주는 것도 지겹고.”
캐서린은 진료동에서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제임스가 비슷한 연배의 제자들과 투덕거리더니, 그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캐서린은 멀찍이서 그런 모습을 바라봤다.
“저런 머저리들, 너희 머리는 장식이냐? 약초 배합 잘못됐잖아. 저 머저리들은 머리에 뭘 넣고 다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