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마님, 각하를 뵈러 오신 겁니까?”
집무실로 가자 보좌진이 기쁘게 캐서린을 반겼다. 드디어 거기서 나오셨군요. 환호하듯 반기는 목소리에 캐서린도 마주 웃었다.
“각하, 마님께서……!”
수습 보좌관이 말을 다 잇기도 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렌디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보더니 잠깐 멈칫하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신은 잠시 기다려. 브레디!”
“네, 각하! 부르셨습니까?”
로렌디스는 손아귀에 든 서류를 브레디에게 건네며 짧게 읊조렸다.
“보고서 다시 확인해서 올려. 기입된 예산안 숫자가 맞지 않잖아.”
“죄, 죄송합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브레디가 보고서를 급하게 챙겨서 자리에 앉고, 캐서린은 멋쩍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나 바쁘면 나중에 올까, 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던 때였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는 말고.”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지금 막 하려던 표정이었어. 들어와서 있어. 일은 금방 끝나니까.”
캐서린은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탁자에 서류가 한 움큼 쌓여 있었다.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아서 소파 팔걸이를 만지작거리는데, 수습 보좌관이 홍차를 가져다줬다.
“브레디는요?”
수습 보좌관이 로렌디스를 눈짓하며 답했다.
“각하께서 맡긴 일이 있어서 바쁘시다고 제게 맡겼습니다. 홍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은은하네요. 고마워요.”
캐서린은 홍차를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수습 보좌관이 안심하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로렌디스는 집무실 탁자에 앉아서 서류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캐서린이 찻잔을 들고 향을 맡는데, 로렌디스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급하게 확인할 것만 확인할게.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천천히 해도 좋아요. 저, 집무실 구경해도 돼요?”
로렌디스가 괜찮다며 허락했다. 집무실에서는 옅은 잉크 냄새가 풍겼다. 깃펜을 끄적거리자, 잉크가 종이에 스몄다. 매끄러운 필기체는 로렌디스를 닮았다.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글씨체는 단조로우면서도 무던했고, 끝 획이 꺾이는 게 이따금 삐뚤어지는 그의 성정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글씨가 당신을 닮아서요. 글자에는 사람의 성품이 담겨 있다잖아요. 당신 성품을 고스란히 옮겨 두었어요.”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로렌디스가 이해하기 힘들다며 되물었다. 캐서린은 고민하는 척하며 답했다.
“좋다는 것도 아니고, 나쁘다는 것도 아니에요.”
“무슨 대답이 그래?”
캐서린은 집무실을 마저 구경했다. 책장에는 먼지 한 톨 앉지 않았으며, 각종 서류집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서류철로 묶어 둔 서류들을 구분해서 분류해 뒀는데, 묶어 둔 파일집 상단에 어떤 파일인지 종목별로 적혀 있었다.
로렌디스의 글씨였다. 그러니까, 이걸 직접 구분해서 정돈해 둔 사람이 로렌디스라는 뜻이었구나. 캐서린은 서류마다 적힌 그의 흔적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당신이 다 구분해 둔 거예요?”
“그렇지. 지금처럼 미리미리 구분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없을 시기에 보좌진들이 고생하니까. 일할 때는 확실히 구분해서 처리하는 편이야.”
로렌디스가 서류 하나를 덮어 두고 다른 서류를 꺼냈다. 국경선 지대의 보고서를 일별로 나눠서 올린 서류였다.
“읽을래?”
“내가 읽어도 돼요?”
“읽어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 군사적인 내용이라서 말이야.”
그의 말대로였다. 서류를 대놓고 봐도 캐서린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내용이었다. 캐서린이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커다란 손아귀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로렌디스가 허리를 감싸서 당겼다.
앉으라는 뜻인 줄 알고 몸을 맡겼는데, 시야가 의자보다 더 높은 것 같았다. 나, 지금 어디 앉았어? 탁자에 앉은 거야? 지금?
“…….”
캐서린은 당혹스러움에 눈만 깜빡였다.
“갑, 갑자기 왜요?”
“뭐가?”
“갑자기 여기에 앉혀서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곧은 손가락이 옆머리를 쓸어서 귀 뒤로 넘겼다.
“가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당신을 여기에 앉혀 두고, 서류처럼 조목조목 뜯어보는 거야. 가끔 그럴 때 있잖아? 사람을 해부하듯 읽어 보고 싶을 때 말이야.”
로렌디스가 숨을 고르며 캐서린의 이마를 엄지로 툭-만졌다. 손가락은 천천히 내려와서 뺨을 쓸고 목덜미에 닿았다. 목 언저리에서 간질거리던 잔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다른 의미로 자극적이네.”
“어째서요?”
“당신이 나를 내려다보잖아. 무언가 속이 음험해져.”
캐서린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손바닥을 닦았다. 손아귀에 땀이 배어났다. 집무실 탁자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는데, 기분이 오묘했다. 속이 울렁거리며 아랫배에 열기가 뭉쳤다. 캐서린은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나름 잘 어울려.”
“나, 나 계속 여기 앉아 있어요?”
캐서린이 말을 더듬거리자 로렌디스가 가볍게 농담이라며 답했다. 이게 농담이 아닌 거 같은데, 농담이 아닌 게 뻔히 보이는데…….
“내려와. 잡아 줄게.”
캐서린은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조목조목 뜯어보는 시선은 집요했고, 캐서린을 금방이라도 해부할 것처럼 끈질겼다.
“정무는 이 정도면 다 됐으니.”
“…….”
“나가자.”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응접실에 우두커니 앉은 캐서린은 넋을 빼 두었다. 요즘 들어 넋을 빼 두고 지내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화려한 옷가지를 입은 공방 장인들이 응접실을 찾고, 캐서린의 앞에 물건을 꺼냈다.
“이건 어떠십니까? 옛 신전의 유물이라고도 하죠. 그 유물을 가공해서 귀걸이로 만들었습니다.”
로렌디스는 안경을 쓰고 옆자리에 앉아서 공방에서 가져온 물건을 훑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그의 물음에 장인 몇몇이 사색이 됐다. 캐서린이 내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서 더욱 그랬다.
곳곳에서 불러온 장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해서 장신구와 드레스 카탈로그를 꺼냈다. 캐서린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말 몇 마디 잘못했다간 또 모두 사들이라는 답이 나올 게 뻔했다.
“모두 마음에 들어요.”
“그럼 모두 사.”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에, 로렌디스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상황이 계속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그럼 그거 포함해서 모두 사.’
‘저건 이미 많아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비슷한 거로 모두 사.’
이게 마음에 든다고 하면 이것을 포함해서 다 사라고 하고, 이미 많다고 하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라며 모조리 긁어 담았다. 캐서린이 녹초가 됐을 때는,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캐서린은 혼절해 버릴 것 같았고, 장인들은 기쁘게 웃었다. 하녀들은 활짝 웃으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으며, 하인들은 떨떠름하게 속닥거렸다.
‘다 살 거면 그럼 왜 보여 준 겁니까? 그냥 모조리 다 사라고 하지!’
로렌디스는 말끔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장인이 다녀가고 하녀들이 기쁘게 장신구들을 담아서 옮겼다. 넨시가 앞장서서 분류하는 모습에, 캐서린은 뜻대로 하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보통은 값나가는 보석을 보여 주면 좋아하던데.”
“오늘 다녀간 장인들만 하더라도 수십이에요. 이건 다 쓰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몸은 하나인데 너무 많아요.”
“그럼 장식해 둬.”
로렌디스는 시큰둥했다. 손목이나 발목에 하고도 못 하는 물건은 장식함을 장식하면 될 일이지. 드레스는 드레스룸을 장식하고, 보석은 보석함을 장식하고.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 로렌디스는 가볍게 결론지었다.
“아버지께 배웠지. 어머니와 막 결혼하셨을 무렵에, 그냥 일단 사서 서랍에 넣어 두곤 했다더라고. 서랍장을 채우다가 어머니께서 마지못해 취향을 말해 주니까 취향을 바꿔서 채웠다더라고.”
그러니까 그 핏줄을 로렌디스가 이어받아서 그대로 이행 중이구나.
그의 가족 이야기는 자주 듣지 못했다. 로렌디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자식인데, 이런 이야기가 왜 낯설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요.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선물을 했어요?”
“내가?”
“보통은 기뻐한다고 말씀하셔서요.”
로렌디스가 어어, 하고 말끝을 흐렸다. 당혹스럽게 굴러가는 눈동자를 보니까, 이런 흐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캐서린도 그제야 깨달았다. 나, 방금 이 사람 과거 캐물은 거구나.
“어어, 혹시 곤란한 이야기였나요?”
“아니야. 설마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든. 전장만 떠돌았는데 내가 누구를 만났겠어. 당신도 좋아했으면 좋겠어서 한 이야기였어.”
로렌디스가 따로 챙겨 둔 함을 꺼내더니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응접실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둘러보고, 캐서린은 함을 건네받았다. 검은색 함은 손아귀에 잡힐 만큼 작았다. 함을 열자 귀걸이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흰 연꽃이 피어 있는 것 같았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당신 생일이잖아. 그럼 흰색 드레스를 입을 건데 잘 어울릴 거야.”
“이건…… 언제 산 거예요?”
“어제 개인적으로 맡긴 세공품이야.”
‘어제’를 이해하기까지는 잠깐이면 됐다. 캐서린이 서재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공방 장인을 불러 세공품을 맡겼다.
캐서린은 연꽃 귀걸이를 걸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귓바퀴가 열기로 뜨거웠다. 귀를 막 뚫었을 때처럼, 열기가 순식간에 머리로 집중됐다.
“기쁜 날이잖아.”
캐서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좀 더 기쁘게 웃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