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눈 폭풍이 몰아닥쳤다. 한동안 바깥 외출이 힘들어질 만큼이었다.
로렌디스는 그 속을 뚫고 왔다. 흑마에서 내린 로렌디스는 말고삐를 마부에게 맡기고 들어왔다. 그는 캐서린이 아직 외출복 차림 그대로인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외출복 차림이야?”
“당신이 늦어져서요. 씻는데 소식 들릴 것 같아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녁쯤 온다고 했는데, 쯧쯧. 걱정할 일 없대도 추운데 왜 그러고 있었어?”
그는 캐서린의 팔을 잡아끌고 침실로 갔다. 하인들이 따라오려는 걸 팔을 들어서 물리고, 그대로 침실 문이 쾅 닫혔다. 그는 제복을 벗고 캐서린을 눕혔다. 옷의 이음새를 끌어내서, 살갗을 하나하나 살피고 눈에 담아냈다.
“그 자식들 너무 쉽게 죽였어.”
캐서린의 발목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게 다였다. 눈밭을 구른 수준이라서 크게 다친 곳도 없고, 어깨 쪽에 부딪히면서 멍든 수준으로 끝났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더니 손아귀에 힘을 줬다. 저릿한 통증이 퍼졌다. 설원을 누비는 동안 묻어난 한기가 그대로 너울거렸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그대로 욕실로 밀어 넣었다.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당혹스럽게 뒷걸음치는데, 그는 캐서린을 더운물에 담갔다.
“몸이 어떤 꼴인 줄도 모르고.”
“네?”
“하녀들을 모두 쥐 잡든 해야지. 이 꼴로 있다 감기라도 걸렸다간, 사람 몇의 목숨이 날아갈지 생각은 해 봤어?”
캐서린이 시한부를 선고받았던 만큼, 로렌디스의 그녀의 건강 문제에 민감했다.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도 같고. 캐서린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욕조에 앉자, 로렌디스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다친 곳은 없어요?”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
캐서린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로렌디스가 뒤에서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캐서린을 팔 안에 끌어안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게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로렌디스는 ‘추워서.’라고 대충 답했다. 캐서린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이에요. 눈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에 귀환해서요.”
“뎐트 칸이 말해 줘서 적절한 시기에 피했지.”
그 일대의 야만족을 모두 토벌하고 빠져나왔으니까.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금발 머리카락이 그의 손아귀에 엉켜들었다.
“발목은 어때? 마차에서 떨어지면서 넘어졌잖아.”
“네. 눈밭이라서 바닥이 푹신했거든요.”
“저 지겨운 쓰레기가 도움이 되는 날도 다 있군.”
지겨운 쓰레기란 눈을 의미한다. 예전에 바닥에 쌓인 눈을 청소하던 정원사의 입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더 다친 곳은 없고?”
고요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똑바로 앉혔다. 손길은 더듬거리며 몸 곳곳을 확인하고, 살갗을 쓸며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 모습이 농밀하면서도 집요해서, 캐서린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당신, 보좌관에게 안 가 봐도 돼요?”
“일단은 머리 좀 식히고.”
그런 이야기를 한 로렌디스는 한동안 집요하게 굴며 캐서린을 괴롭혔다. 욕조 안에서 물이 잘게 철벅였다. 그는 한참을 그 안에서 있다가 캐서린을 놓아주었다. 뿌연 욕조 안에서 기진맥진해서 나올 때쯤, 로렌디스의 낯은 맑게 개어 있었다.
욕실에서 나와 옷을 입고 침대에 눕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를 슥슥 만졌다. 그 촉감이 묘한 안정감을 줘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제복을 마저 갖춰 입고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캐서린을 돌아보며 고요히 말했다.
“다녀오지. 쉬어.”
* * *
로렌디스는 집무실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일찍 끝내지. 이번에 놈들이 쓴 무기, 외부에서 들여온 것 같지?”
보통 야만족은 그들 무리 안에서 무기를 해결 본다. 거칠고 큰 칼이나 도끼를 이용하는데, 날렵하기보다는 크고 거대했다. 그들은 과격하게 몸을 밀고 붙이는 걸 즐겼고, 그 취향은 무기에도 녹아들었다.
“브레디, 네 생각은 어때?”
브레디가 로렌디스의 물음에 엄숙히 고했다.
“어디선가 무기를 공급해 준 모양입니다.”
“추적은 해 봤고?”
“무기 유통 경로를 조사했는데, 작은 소규모 상단이 나왔습니다. 황후의 꼬리 자르기용 상단 같습니다.”
어리석긴. 벼룩을 잡겠다고 불길을 놓았는데, 불타는 게 제집 안마당인 줄도 모르는 꼴이라니.
제집 안마당이 타는 걸 알지도 모른다. 만약 알고도 그랬다면, 불에 타든 말든 관심 밖이라는 뜻이겠지.
로렌디스도 예상했던 바이다. 제 아들이 황위를 잇지 못하면, 황후는 제국 황실의 존위 따위 제 관심 밖일 거니까.
“황후의 동태는?”
“조용합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세력을 만들어 주려는지, 외척세력과의 접견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황실의 존위는 현 황후의 아들이 황위를 이을 때만 가치 있다. 그게 황후의 입장이었고, 지금 그녀의 행동 양상을 보여 주는 큰 그림이었다.
야만족도 골칫거리고 황후도 골칫거리라면, 어느 한쪽이든 편한 쪽으로 족쇄를 걸어 두는 게 낫다.
“야만족 차기 후계자를 바꿔야겠어.”
“뜻대로 되겠습니까?”
“안 된다면 되게끔 길을 가꿔야지. 마침 제 형제를 지렁이로 보는 이방인이 있다니 다행이지 않나?”
로렌디스가 이방인이라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다. 야만족과의 배상금 일로 헬렌을 시시때때로 찾는 이방인은 힘은 있지만 힘을 쓰지 않았으며, 제 부족에게 무관심했다. 그는 제 형제자매가 눈앞에서 죽어 나가더라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 전에, 인간이 맞나?’
브레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렌디스가 서류를 덮었다.
* * *
“이 사람이 왜 또 여기를…….”
“왜 그러지? 썩 반갑지 못한 얼굴인가?”
킥킥대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듬뿍 묻어났다. 뎐트는 익숙하게 응접실 소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만족에서 국경선을 넘어서 또 헬렌을 침범했고, 또 뎐트가 이번 보상금 논의를 위해서 헬렌을 찾은 참이었다.
“저번에 내가 한 이야기는 생각해 봤나?”
“무슨 생각이요?”
“……왜 존댓말이지?”
뎐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말버릇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꺼림칙했다.
뎐트는 아무렴 됐다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괬다. 느른한 손짓에 시선이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죠?”
“네가 바란다면 여기서 꺼내 준다고 그랬지.”
데보라가 흠칫하며 이빨을 갈았다.
“마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는 겁니까!”
“이런, 들었나? 듣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나이가 드니까 건망증이 생겨서. 쯧쯧. 그럼 들었다니까 마저 이야기할까?”
넨시가 당황스럽게 캐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님, 이 사람 이상합니다. 야만인들 사이에서 지내더니 미친 거 아닙니까? 넨시가 울컥하며 캐서린에게 호소했지만, 캐서린은 어색하게 그 시선을 피했다.
데보라가 어처구니없다며 눈을 끔뻑거리고, 뎐트는 심드렁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가 가긴 어딜 가요?”
“너는 지금 혼자서 어디로든 가고 싶잖아. 땅 밑으로 꺼지든 홀로 홀연히 사라지든 말이다. 나를 흥미롭게 해 준 보답이니까 부담 가질 것 없어.”
너는 흥미롭고, 너에게 그 정도의 관용을 베풀 만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거든. 뎐트는 긴가민가하며 웃더니 무던하게 이야기했다. 그 무던한 표정에 캐서린은 맥이 풀려서 답했다.
“내가 여길 떠나고 싶다던 건 맞아요.”
로렌디스가 놓아준다면, 어디든 떠나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헬렌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게 뎐트 당신을 따라나선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떠나더라도 그건 혼자다. 나 혼자서. 떠난다고 마음먹은 것도 다른 인연을 다 끊는다는 마음으로 마음먹었던 거니까.
캐서린은 그만 웃어 버렸다. 작게 웃으며 입가를 더듬거리자, 뎐트가 호오? 하며 혀를 찼다.
“내가 너무 만만히 봤나? 나를 따라나선다면 네가 바라던 길을 볼 수 있는데도?”
뎐트도 충동적으로 뱉는 말이었다. 제법 오래 살았더니, 인생에 어디 흥미로운 일이 있어야지. 쯧쯧. 갯지렁이의 꿈틀대는 꼴을 관찰할 바에야 이쪽이 더 재밌어 보이고. 실제로도 재밌다.
“내 아버지 목숨 가지고 장난이나 치는 당신을 내가 왜 따라나서요?”
뎐트가 히죽 웃는다.
“아버지 데려다줄 거예요?”
“소박하기 그지없네. 나를 앞에 두고 바란다는 게 고작 실종된 사람의 소식이라니. 그 사람이 죽었으면 어떻고 살았으면 어때? 어차피 이곳에는 없잖아.”
비인간적인 이야기. 그렇기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어조까지. 캐서린은 뎐트와 이야기하면 꼭 인간이 아닌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뎐트도 못 한다는 이야기는 안 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왠지 본능적으로 그런 예감이 들었다.
“흥이 식었어.”
뎐트는 볼일이 끝났다며 응접실을 나갔다.
* * *
로렌디스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빤히 바라봤다. 캐서린의 곁에 붙여 두었던 데보라 경이었다. 데보라는 뎐트와의 일화를 그대로 제 주군에게 전했고, 로렌디스의 얄팍한 이성이 끊겼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침묵하던 로렌디스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