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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3)화 (63/129)

63.

기사 한 명 한 명이 능숙하게 야만인을 제압했다. 그건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캐서린이 막 창문에 가까이 붙는데, 마차의 천장이 뚫렸다. 날카로운 도끼가 천장을 쾅쾅대며 찍었다. 캐서린은 튕기듯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

“으윽!”

캐서린은 무릎을 짚고 바닥을 기었다. 다 녹지 않은 눈이 발바닥에 밟혔다. 따뜻하게 옷을 껴입었는데도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다. 캐서린이 고개를 들자, 야만인 하나가 도끼날을 휘둘렀다.

“마님, 고개 숙이십시오!”

“이게 무슨!”

도끼날이 캐서린의 머리 옆에 박혔다.

“오냐! 이년은 헬렌 놈들치고는 곱상하게 생겨 먹었구나!”

“마님 눈 감으십시오!”

“오거라! 헬렌의 개들아!”

레너드가 칼을 휘두르자 야만인 하나가 금방 제압됐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마차가 망가졌어요.”

“일단 여기 계십시오!”

캐서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더듬거렸다. 야만인이 도끼를 잔뜩 휘둘러 마차가 너덜너덜 찢겼다. 캐서린이 땅을 짚고 주저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흰 눈밭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윽!”

야만족은 굵은 근육질의 몸에 사나운 성정을 타고났다. 두꺼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거친 바람이 불어닥치고, 짐승처럼 거친 포효 소리를 냈다. 캐서린이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들자, 로렌디스의 다급한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괜찮나?”

“당신은요?”

“지금 내 걱정할 때야?”

로렌디스가 성가시다는 듯 읊조렸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누굴 찾는 거예요?”

“야만인들에게도 지배자가 있어. 그 우두머리를 찾는 거야. 은발이라서 눈에 쉽게 띄는데 보이지 않아.”

“뎐트 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야. 지금 찾는 건 지배자의 첫째 아들이야. 보통 이런 이상행동을 하는 건 첫째 놈이거든.”

흰 눈밭에 흩뿌려진 시신 중에서 은발은 없다. 그걸 확인한 캐서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다듬었다. 기사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 일대가 빠르게 정돈됐다. 그건 그 길목을 청소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께서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레너드가 털털하게 웃으며 캐서린을 부축했다. 갑옷에 거친 전투의 흔적이 묻어났지만, 그는 오히려 개운하다는 듯 맑은 표정이었다.

“저, 기억하십니까?”

“레너드 경. 저번에 만찬장에서 뵀잖아요?”

“그죠. 만찬장에서 술 따라 주던 놈이 접니다. 허허허,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의아했는데, 긴장을 풀라며 해 준 이야기 같았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니까 몸이 맥없이 풀렸다.

외성 주변으로는 흰 눈이 가득했다. 흰 눈꽃처럼 핀 꽃잎이 나무에서 흩날렸다. 쿵쿵― 무언가 찍고 망가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마지막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로렌디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야만인을 베어 내자,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곧장 성문으로 간다. 마차가 망가져서 걸어가야 하는데, 걸어도 되겠어?”

“네, 네 걸어도 돼요.”

캐서린이 마차를 돌아보자, 마차는 이미 내려앉았다.

야만인이 천장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뛰어 댔더니, 그 충격으로 바퀴가 빠져 버린 것이다. 레너드가 숄을 챙겨서 캐서린의 어깨에 덮어 줬다. 추운 바람이 그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 로렌디스가 팔을 내밀고 서둘러 이끌었다.

“큰 부상 없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저놈들이 미쳤다고 외성 앞까지 내려오다니…….”

상황이 마무리되자, 외성 성문이 열렸다. 그는 캐서린을 먼저 성 안으로 들여보내고, 수하들을 통솔했다.

“당신 먼저 가. 나는 주변을 정돈하고 가야겠으니까.”

“로렌디스는 늦어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를 툭툭 만져 주며 답했다.

“일찍 올 거야. 먼저 가 있으면, 정리되는 대로 갈 거니까 기다려.”

“외성 앞까지 내려온 거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로렌디스가 삐뚜름하게 입술을 비틀며 되물었다.

“위험하다고?”

저까짓 게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다고. 황후가 속닥대며 뭔가 언질이라도 준 모양이지만, 그래 봐야 야만인이다. 흑마의 고삐를 쥔 로렌디스가 발돋움해서 안장에 올랐다. 흑마가 푸르릉거리며 앞발을 들었다.

“워워-저녁 전까지는 돌아오지. 그럼 됐나? 외성 주변에 있는 놈들은 처치된 것 같으니 안심하고 들어가도 돼.”

캐서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브레디!”

“네, 각하!”

“내성까지 곧장 가거라.”

일정 내내 곁을 지켰던 브레디가 캐서린의 곁으로 합류했다.

“뒤를 부탁하지.”

“다녀오십시오.”

로렌디스가 수하들을 이끌고 떠났다. 희뿌연 눈보라가 일었다. 넨시가 내성에서부터 나와서 담요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캐서린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건국제에 다녀온다며 떠난 게 며칠이나 됐다고, 꼭 헬렌에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눈보라가 이네요. 얼른 들어갑시다.”

* * *

“아주 지겨운 족속들이야.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꼴이 우습지 않나?”

자리를 비운 지 며칠 됐다고 이놈들이 여기서 날뛰어 대는 꼴이라니……. 그 꼴이 가관이었다.

로렌디스는 놈들의 급소에 거칠게 검을 꽂아 넣었다.

“이놈들이 왜 외성 앞까지 내려온 겁니까!”

레너드도 지겹다 못해 징글징글하다며 외쳤다. 도끼를 설치는 미친놈들이 외성 앞까지 내려와서 날뛰어 대니까, 기사단도 바빠졌다.

“황후가 귀띔이라도 해 준 모양이지. 북부의 수장이 자리를 비운다고 말이야.”

“미친 거 아닙니까? 제국의 황후가 야만족에 정보를 팔아넘기다니요!”

“뭐, 그건 사소한 이유겠고. 예전에도 한 번씩 외성까지 내려오는 놈들을 토벌한 적이 있잖아.”

로렌디스는 매끄럽게 검을 갈무리했다. 검붉은 혈흔이 뚝뚝 흘렀다.

“닦을 거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됐으니 새 로브나 가져와.”

로렌디스가 너덜거리는 로브를 벗고 갈아입는데, 인기척이 다가왔다. 바람이 일순간 멎었다. 사뿐히 내딛는 걸음이 가벼웠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흰 은발이 나부끼고, 연꽃무늬가 새겨진 소맷자락이 나풀거렸다.

“첫째인 줄 알고 검부터 뽑을 뻔했군.”

로렌디스는 뽑으려던 검을 다시 넣었다. 뎐트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답했다. 가늘게 접힌 눈매에 희미한 빛이 서렸다.

“다행이야. 아무리 나라도, 공작이 검을 뽑으면 오한이 들거든. 그래도,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아직 제도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내게 언질을 준 게 당신이었잖아. 대충이나마 짐작이야 했지.”

로렌디스는 심드렁하게 로브를 여몄다. 황후가 야만족과 접촉한 걸 알려 준 사람이 뎐트였다. 그런데, 길 위에서 습격받을 줄은 로렌디스로서도 짐작하지 못한 바였다.

황후도 머리가 있기에 적당한 때에 기회를 노릴 줄 알았는데, 대놓고 목덜미를 노리듯 파고들 줄이야. 황위 계승권에 눈먼 건 일찍이 알았다지만, 황후에게 이성적이길 기대한 스스로가 어리석었다.

“그래도 의외였어, 헬렌 공작.”

뎐트는 야만족의 시신을 발치로 툭툭 건드렸다.

“그대가 설마 일정까지 내팽개치고, 여기로 달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일정은 무슨 일정?”

“일정 모두 관두고 내려온 게 아니었나?”

로렌디스는 시큰둥했다. 그 시큰둥한 표정에 기사들은 학을 뗐다.

‘주군께서는 처음부터 거기 계실 마음이 없었습니다!’

헬렌의 길은 정해지지 않았으며, 그 길을 억제하는 장애물 또한 없다. 기껏해서 테슬러가 방지턱 몇 개를 세워 두고 적당히 날뛰다 제도 한 번 들러라, 하면 성의껏 한 번 움직여 주는 수준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조금 더 머물러 달라 매달려도, 제 주군께서는 질척거리지 말라며 떼어 놓을 분이었다.

“각하, 일대를 다 정돈했습니다!”

로렌디스가 됐다며 적당히 떨어지라고 하자, 기사들이 적정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뎐트는 설원이 붉게 물든 걸 보고 학을 뗐다.

“그대는 다시 봐도 살벌해.”

“왜 왔지?”

“그냥. 와 봤어.”

뎐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이유는 없다. 뎐트는 먼 허공을 바라보다가 로렌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무던하고 가벼웠다.

“정말 괴물 같은 솜씨군.”

“그 말 하려고 왔나?”

“그쯤 해 두고 적당히 청소되면 내려가. 곧 눈사태가 일어날 거니까. 눈보라도 몰려올 거고.”

뎐트는 지겹다며 머리를 가볍게 내젓더니 긴 은발 머리를 쓸어내렸다. 일대의 야만족은 모두 처리됐다.

뎐트는 제 일족의 피를 보면서도 심드렁하니 고개를 돌렸다. 울분도 슬픔도 묻어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쪽으로?”

“설원의 짐승들이 우는 걸 보니까 이 일대는 모두 파묻히겠군. 기사들을 데리고 빠져나가. 어차피 이 일대는 수습됐으니.”

로렌디스는 레너드를 불러 기사단을 불러모으라 이야기했다. 뎐트가 미리 이야기해 준 대로, 그 일대의 땅이 불안정했다. 뎐트는 뒷짐을 지고 서서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씩 웃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잖나? 이만 가 봐.”

눈 폭풍이 몰아치면, 기사단 전원이 눈보라 속에 발이 묶일 수가 있다. 이만 떠날 때였다. 그래도 로렌디스는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라며 나중에 보상금 이야기할 때 보자며 화답했다.

“보상금 논의 때 보자고.”

외성까지 내려와서 또 도발을 해뒀으니, 이번에는 보상금을 얼마나 던져 주어야 하려나. 뎐트는 끌끌대며 도포 자락을 여몄다.

“각박하긴.”

로렌디스는 잊었던 물음을 꺼냈다.

“너는 우리를 왜 돕지?”

“뭐?”

“야만족이면서 왜 우리를 돕느냐고.”

뎐트 칸을 본 지 1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는 여전히 어디서든 겉돌고 있었다.

야만족이지만 그 일족과 궤를 달리했다. 그는 어디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그 행동이 기이했다. 때로는 설원에서 길 잃은 행인에게 길을 알려 주고, 전사자의 시신을 다시 돌려보냈으며, 때로는 그 대가로 도시의 물건을 받아 간다.

‘눈썰매라는 걸 가져와.’

또 어느 날은 그냥 오다 주웠다며 기사들을 데려다 놓고 사라졌다. 로렌디스도 이제는 안다. 그는 평범한 야만족이 아니다.

뎐트는 대답 대신 웃었다.

뎐트가 물러나고, 헬렌의 기사단은 귀환했다.

그는 가자마자 아내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어디 한 곳 다친 곳이라도 있으면 그놈들 목을 꺾어 버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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