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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42)화 (42/129)

42.

캐서린은 그제야 넨시가 옷 밖으로 보이는 곳은 조심하라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달았다. 옷 밖으로 쉽게 보이는구나. 손목에 남은 흔적들은 지난밤의 일을 적나라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한번 둘러보겠나?”

“아직 훈련 중이라고…….”

“잠깐 둘러보는 건 괜찮아.”

이 안까지 직접 온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반년 전이었나?

캐서린은 로렌디스와 나란히 훈련장 주변을 걸었다. 그러던 중 휴식 중이던 기사들 곁을 지났다.

“왜들 누워 있어요?”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모양이지.”

기사들이 질린다는 듯 로렌디스를 흘끔거렸다. 레너드가 셔츠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 내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죽었다고 맨바닥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데, 그 몸에서 더운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레너드, 괜찮아요?”

“마님이 아니십니까? 여기까진 웬일이세요?”

레너드는 캐서린에게 과일 맥주를 추천해 준 기사였다. 서글서글하게 눈웃음 짓던 레너드마저 로렌디스를 보더니 질린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훈련이 고됐나?’

다들 멋쩍게 웃지만, 힘든 기색이 다분했다.

“레너드도 땀을 많이 흘렸네요.”

“훈련에 충실했다는 증거죠.”

레너드는 털털하면서도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굵직굵직한 이목구비에는 수더분하면서도 무심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캐서린이 레너드에게 손수건을 건네자, 레너드가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마님! 저 같은 놈에게 손수건을 챙겨 주다니요. 저는 먼지로 얼굴을 닦으면 됩니다.”

“……괜찮겠어요?”

“손수건이 더러워집니다. 저는 이미 꼬질꼬질해져서 씻어야 되니 넣어 두십시오. 나중에 각하께서 필요하실 때나 챙겨 주면 됩니다.”

흰 손수건은 쉽게 더러워지니까 거절했나. 캐서린이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데, 커다란 손아귀가 손목을 감쌌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캐서린이 고개를 물끄러미 들어 올리는데, 로렌디스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기사들의 훈련에 방해돼.”

“네. 방해됩니다…… 아닙니다! 말실수였습니다. 제가 마님께 감히 방해된다는 이야기를 할 리 없잖습니까?”

레너드는 억울하다며 로렌디스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더니, 고요히 입술을 다물었다.

“어수선하게 굴지 말고 훈련에 임해. 부 기사단장은 남은 훈련을 재개해 주고.”

부 기사단장이 주변을 정돈하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손목과 어깨에 보호대를 찼는데, 그 보호대에도 선명하게 월계수 문양이 찍혀 있었다.

헬렌의 모든 것에는 헬렌의 흔적이 묻어났다. 캐서린이 홀린 듯 바라보는데, 부 기사단장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거친 사내놈들만 섞여서 지내는 곳이라, 마님께서 보시기엔 지루할 겁니다. 기사단의 훈련은 제게 맡기시고, 각하께서는 이만 가 보십시오.”

기사단이 입은 셔츠의 어깨에도 작지만 월계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문득 그 문양이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저 월계수 문양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는데……. 먼지 위를 걷는 모습을 보니까, 다들 대단해 보여요.”

헬렌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제 발로 사지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요절한다는 미래를 이미 알아서도 그랬고, 월계수 기사단이 풍기는 위압감도 거칠고 무서웠다.

“이들도 훈련해야 하니까 이만 가지. 먼지 때문에 당신이 보기에도 그렇게 좋은 풍경은 아닐 거고.”

캐서린은 로렌디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눈짓으로 ‘왜?’라고 묻는데, 그 시선이 무신경하게 캐서린에게 내려앉았다.

“훈련할 때 잠깐 입는 옷에도 월계수 문양이 들어가네요?”

“예전부터 그랬어. 그 덕분인지 기사단 내부의 소속감도 좋았고.”

로렌디스가 시큰둥하게 하는 이야기에, 부 기사단장이 그런 건 아니라며 반박했다.

“로렌디스 님께서 직접 이끄는 기사단이라서, 이만한 소속감으로 뭉치는 겁니다. 충성심 하나로 목숨을 바치라면 바칠 사람들이거든요.”

부 기사단장은 흐뭇하게 가슴을 두들기며 이야기했다.

“이들 중 절반은 각하께서 목숨을 살린 기사입니다. 그 충성심이야말로 이야기하면 입 아플 수준이지요.”

레너드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서 레너드 또한 로렌디스에게 목숨을 빚진 기사 중에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흙먼지가 일며 바람이 불어닥쳤다. 캐서린이 눈을 질끈 감자, 로렌디스가 옷소매로 눈가를 가렸다.

“이만 가지.”

로렌디스는 먼지만 털어 내고 그 위에 제복을 입었다.

“어디 가려던 길이었어?”

“그냥 길 따라서 걷던 중이라서…….”

로렌디스는 캐서린의 손목을 무심히 이끌고 어디론가 걸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은 단호했으며, 어디로 갈지 이미 목적지를 정해 둔 사람 같았다.

“이제라도 작게 연회를 열어야지 않나?”

“확실히, 이제 슬슬 연회를 베풀 때가 됐네요. 제가 조금 부족해서 연회 준비에 서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대답하던 캐서린은 깨달았다.

이 사람 나를 밖으로 내보이지 못해서 안달 났구나.

“로렌디스, 있잖아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며칠 지켜본 결과, 로렌디스는 캐서린이 약한 소리를 할 때면 때때로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 그는 캐서린이 그를 빤히 노려볼 때 더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준비할게요.”

“헬렌의 안주인이잖아. 거기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지. 연회를 베풀면서 왜 외부의 눈치를 보나? 헬렌에서 너한테 눈치 줄 사람이 어디 있다고.”

캐서린은 멍하니 서 있다가 로렌디스를 따라 걸었다. 로렌디스와의 일에서는 뭐든 쉽게 휩쓸리고 쉽게 흔들렸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나서는데, 넨시가 흐뭇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가족들은 잘 배웅했나?”

“가족에게 다녀오는 길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로렌디스가 회중시계를 확인하더니, 캐서린이 온 길목을 가리키며 답했다.

“외곽에서 나오는 길목이었으니까. 그쪽이면 오늘 수도원으로 가는 마차가 들어설 길이었잖아.”

“배웅이랄 것도 없었어요. 보내 드리는 길에 얼굴만 한 번 뵀거든요.”

그럼 됐다며 로렌디스는 짧게 일축했다. 마지막 예의는 표했으니 그거로 된 거다.

“작은 연회를 베풀어서 사람들에게 그 얼굴을 알려. 가신들이나 주변 권세가들의 목록은 넨시에게 도움을 받으면 될 거야.”

* * *

연회를 준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 이미 정돈해 둔 연회장은 깔끔하면서도 거대했다. 건물 자체도 더욱 예스러웠다. 그건 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풍스러운 기품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미줄과 먼지를 걷어 내고 새롭게 하나하나 닦아 냈더니, 연회장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캐서린이 연회장을 둘러보며 무슨 준비부터 하면 될지 고민하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를 툭, 만졌다.

“부담 가질 것 없어.”

“그래도요.”

“어차피 당장 사람들을 초대할 건 아니니까. 마음 놓고 한번 해 봐. 일은 아랫것들에게 맡기고, 곁에서 지시 정도만 해.”

천장은 유리로 꽉 채워 두고, 유리에 색색의 필름을 붙여 꾸몄다. 필름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신비롭게 연회장을 채웠다. 어린 천사를 필름 조각으로 표현했는데, 아이가 손을 뻗으며 아래로 내려올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당신 이쪽으로 엉망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뭐든 하다 보면 도와주겠지. 아랫것들 둬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랫사람들에게 부탁하더라도, 스스로 작게라도 알아야지 부탁하기 수월하지. 아무것도 모르면 하인들도 주인의 무지함을 깨달을 것이다.

‘실망하게…… 되려나?’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데 로렌디스가 또 목소리 높여 꾸짖을까, 입술을 다물었다. 긴 금발을 헝클이며 어디부터 뜯어고칠지 보았다.

“마님이 뭘 하든 모두 좋아할 겁니다. 마님께서 여기 오시고 처음 여는 연회잖습니까?”

캐서린은 처음 여기를 온 시기를 떠올렸다. 헬렌의 성문을 닫고 지낸 지 반년이 다 되어 간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

“예정대로라면 내가 없어도 네가 내성을 꾸리는 게 맞아. 연회를 여는 건 안주인의 영역이잖아.”

“그죠. 오히려 시기가 조금 늦어지긴 했네요.”

“그 시기가 조금 늦었다면 더 서둘러야지. 어차피 언제 하게 되든, 해야 할 일이야.”

캐서린은 잊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이혼은 안 되지만, 내가 떠나도 다시 재혼하는 당신. 지금 로렌디스라면 왠지 물어봐도 좋을 것 같다.

“내가 혹시요. 지금보다 많이 아파서 가망이 없다면요. 그럼 당신은 어떡해요?”

“내가 뭘 어떡해야 하는데.”

“그게. 후계나, 아이도 생각해야죠……. 당신은, 음, 이들의 주인이잖아요? 당신도 언제까지고 아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으르렁거리는 목 울림은 짐승을 닮았다. 그 거친 기운은 그의 심기가 어지럽다고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떠난다면요. 아이도 없이요. 그럼 어떡해요?”

로렌디스는 몹쓸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왈칵 구겼다.

캐서린은 어색하게 입술을 더듬거렸다. 후계자는 당신에게도 중요하니까요. 언젠가 당신도 아이를 얻어서 후계자를 세워야 하는데……. 몹쓸 짓이라도 해 버린 기분이었다.

“입 닫아.”

서늘하게 내리꽂힌 말이 캐서린을 짓눌렀다.

진심으로 화가 난 사람 같다. 새까만 눈동자가 짙게 침전됐다. 허튼짓하지 말라며 눈짓으로 사람을 억누르며 묶어 두었다. 숨이 막혀 오는 기분에 입술을 파르르 떠는데, 그제야 사나운 기색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그딴 이야기를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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