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침묵을 요구한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놔두고 가 버렸다.
“세상에나 마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넨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경악했다. 떠난다면 어딜 떠나고, 아이나 후계를 왜 걱정해…….
“마님께서 나약한 분인 건 알지만, 부디 단단히 마음먹으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넨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야.”
넨시는 캐서린의 주의를 돌리려는 듯 연회에서 선보일 접시와 그릇을 보여 주고, 식탁보까지도 하나하나 직접 캐서린에게 확인받았다.
흰 레이스를 수놓은 식탁보는 부드러우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직접 수작업해서 만든 자수도 정교했다.
“식탁보는 이거로 하고 접시는 이거로 하는 게 좋겠어. 너무 화려하지는 않되, 근엄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또.”
그리고 또, 지시할 사항이 더 있나. 캐서린이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넨시가 희미하게 웃었다.
“각하께서 마음에 걸리시지요? 나머지는 제게 맡겨 두고 가 보십시오.”
캐서린은 마지못해서 빠져나와 로렌디스를 찾았다. 로렌디스는 산책로 주변에서 홀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로렌디스가 이미 캐서린의 기척을 느낀 뒤였다.
“거기 계속 서 있으려고?”
“그리로 가도 돼요?”
“이쪽으로 와.”
로렌디스가 옆자리를 턱짓하며 캐서린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이야기했다. 보좌진과 합류한 그는 여러 사람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서 나중에 다시 간다고 할까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또 사이가 어색해질까 관뒀다.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일찍 나왔네.”
로렌디스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회중시계를 확인하고 캐서린을 품으로 당겼다. 이,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로렌디스는 갑갑한지 크라바트를 풀며 입술을 깨물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그 말에 막 산책로를 따라서 걷는데, 로렌디스의 보좌진이 어수선하게 어디론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제복 차림의 이들이 어둑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나눴다.
로렌디스는 그 길목에서 가만히 브레디를 기다렸다. 브레디는 다른 보좌진을 먼저 보내 두고 다시 로렌디스에게 뛰어왔다.
“건물 뒤편으로 모시겠습니다.”
“뒤편이면……. 거긴 왜?”
“그으, 밀던 자작님의 수하가 발견됐습니다.”
캐서린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곰곰이 듣다가 되물었다.
“밀던 자작이라면, 제 아버지를 말씀하시나요?”
“네. 자작님과 같이 실종됐던 하급기사가 국경선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발견됐습니다. 마님께서도 왠지 아는 얼굴일 듯해서…….”
아버지께서 전장에서 실종된 게 언제더라. 이제는 까마득해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10년은 더 됐을까.
“아버지와 다니던 분이라면…….”
“자작님과 자주 다니던 분입니다. 자작님께서 식구들을 잘 챙기셨거든요.”
여기서 아버지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다니. 캐서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보좌진이 빠져나간 길목을 살폈다.
“확인해도 돼요?”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가까운 사람이라도. 아직도 아버지는 찾지 못했다. 어린나이에 헤어져서 지내고, 그 시신도 찾지 못하고 지내다가 요절해 버리면…….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 가까운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확인할래요.”
“부친께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아가씨께서 부친의 소식을 기대하는 거라면…….”
“기대하지 않아요.”
기대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런 기분은 다시 느끼고 싶지 않기에 미련은 버렸다. 그저, 아는 얼굴일지도 모르니까 한 번만 확인하자는 뜻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일만 아니면 직접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헤어져 지낸 시간이 긴 만큼, 그 인연이 그리웠다.
뒤편에는 깨끗하게 마련된 관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어른이 누워 있었다.
캐서린이 기억하는 것보다 몇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사람, 아버지께서 계실 때 자작저를 찾아주던 아저씨였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찰스 모리켄. 모리켄 경이라고 불리던 분이다. 덥수룩한 수염은 예전 그대로였다.
“많이 늙으셨네요. 찰스 아저씨.”
“아는 얼굴이 맞나?”
“네.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에요. 기억 속보다 더 늙었지만 어렸을 때 본 얼굴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가끔 놀아 주셨거든요.”
찰스는 추운 곳에 있었는지 몸에 한기가 스며 있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보며 찰스의 손을 잡았다.
“마, 마님……!”
지금 아버지께서 없으셔서, 이 사람에게 더 깊은 온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분도 먼 길을 오셨겠지. 캐서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저씨 추우셨겠어요. 너무 늦으셨네 진짜…….”
어린 시절에 본 분이라서 다른 호칭은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 늙었지만, 굵직굵직한 눈코입은 모두 여전했다.
이제 이 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분의 표정은 편안했다. 이제 막 집으로 온 걸 아는 사람 같았다.
“고마워요. 찾아 주셔서.”
아버지를 찾은 건 아니지만, 오늘 같은 작은 흔적만이라도 좋다. 그 기억을 가끔 떠올리게 해 주는 정도면 만족한다.
먼 길을 건너 여기까지 왔으니 그거로 된 거다. 이분도 편안히 눈을 감을 것이다.
* * *
찰스의 장례식 자리가 마련됐다. 오래전에 떠난 분이지만, 마지막 예우로 작별 인사는 건네는 자리였다.
찰스가 왔다는 이야기에, 모리켄 부인께서도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그분은 울었던 것 같다. 왜 이제 왔냐고 탓했던 것도 같다.
모리켄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장례식 내내 자리를 지켰다. 전장이 치열한 자리에서는 그 예우를 다 갖추지 못하지만, 지금은 주변도 고요했다.
“찰스, 잘 왔어요. 너무 먼 길을 헤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찰스의 관을 월계수 깃발로 감싸고 묘지에 묻었다. 슬픔도 가득하지만, 오래도록 실종됐던 사람이 돌아왔다는 반가움도 있었다.
“마님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모리켄 부인.”
“그 사람이 어린 아가씨 이야기를 꺼내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헬렌에서 기다리고 있길 잘했어요.”
모리켄 부인은 원래 헬렌을 떠나서 제도에서 지낼 계획이었는데, 그 시기를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했다.
“이제라도 마음 놓고 그리워해도 되겠어요.”
모리켄 부인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며 가고, 캐서린은 뒤편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슬픔을 내비쳤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아 준 걸 보니.
‘좋은 사람이었네요.’
아저씨 마지막 길이 외롭지는 않겠어요.
로렌디스는 모직코트를 무심하게 툭, 어깨에 얹어 두고, 보좌진과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안건 해결은 그대로 진행하고, 추가로 건의 사항 있으면 다시 와서 이야기해.”
브레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재킷 안에서 볼펜을 꺼내서 간략하게 지시 사항을 기입해 두고, 수습 보좌관에게 전달했다. 로렌디스가 보좌관들과 대화를 끝내고, 캐서린에게 다가왔다.
“바쁜 거예요?”
“왜?”
“쉬는 걸 보지 못해서.”
로렌디스가 뻐근한지 목덜미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그 시선은 여전히 보좌관에게 머물러 있었다.
“다 됐어.”
“나를 피해 다니는 기분이 드네요.”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반쯤 확신이 든다. 내 앞에서는 늘 오만하던 당신이 피해 다닐 이유는 없지. 캐서린은 배시시 웃으며 장례복을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장례 복장은 다른 장식구 하나 없이 무난했다. 마지막 예우를 표하는 자리이니만큼, 가볍지도, 또 너무 무겁지도 않은 옷차림이었다. 캐서린이 검은색 장례복을 가다듬다가, 답을 스스로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 이야기 꺼낼까 봐 그랬어요?”
로렌디스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피했다고요? 캐서린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다가 로렌디스에게 되물었다.
“그걸 로렌디스가 왜 신경 썼어요?”
“당신이 아버지 소식을 묻더라도, 나는 당신이 바라는 답을 내어 줄 수 없으니까.”
이건 어떤 감정일까. 어린아이 앞에서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감정일까.
내가 아이도 아니고, 그건 당신이 조심해야 할 일도 아닌데. 캐서린은 모리켄 부인을 떠올리며 눈을 은은히 감았다.
“찰스 아저씨를 본 것만 해도, 제게는 고마운 일이죠.”
그분을 다시 뵙게 될 거라고 알지 못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뵙게 돼서 다행이다.
“어디서 발견됐어요?”
“국경선 너머에서 발견됐다더군. 사냥개들이 어제 찾아내서 오늘 장례를 치른 거고. 찾아냈다니까 다행인 일이지.”
캐서린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누군가는 돌아왔고.”
돌아올 사람은 돌아오고.
“보낼 사람은 보내 드려야죠.”
미련을 억지로 가지고 있는 건 사람을 기대하게 하고, 그런 기대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 비참함은 다시 일어날 힘마저도 빼앗고, 사람을 밑바닥에 처박는다. 그걸 다시 딛고 일어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는 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에요. 차라리 편히 쉬고 있다고 생각할래요.”
예전에는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다면 어떨지 몇 번 고민했다. 그럼 계모와 의붓언니를 내보내고, 다시 집으로 오지 않을까.
꿈인지 책인지 엿본 그 미래에서 아버지는 안 보였으니까. 캐서린이 못 보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면 그게 더 죄송하네요.”
집안 꼴이 엉망이라서.
해 드릴 말씀도 없다.
“주인님, 모리켄 부인께서 찾습니다. 이만 귀가하신다네요.”
로렌디스는 캐서린에게 코트를 건네주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당신이 더 춥겠는데……. 내가 입어도 되려나. 캐서린이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저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