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0)

Chapter 1 이상한 사람

“야, 이수호. 올스타전 가는 거 축하한다.”

주이의 두유(DOYOU), 박선우가 능글맞게 말을 건네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묵묵히 연습을 하고 있던 수호는 선우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요, 형.”

“아쉽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선우가 컴퓨터 전원을 켜며 전혀 아쉽지 않은 투로 말을 건넸다.

수호는 작년에 같이 올스타전에 나가봤기에 그가 얼마나 올스타전을 귀찮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형, 작년에 엄청 귀찮아했잖아요.”

“그래도 막상 올스타전 못 간다니까 아쉬운 거 있지.”

선우는 여전히 심드렁한 말투였다. 선우가 게임이 잡히길 기다리면서 수호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팀에서 같이 가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겠다.”

“별로 그렇진 않은데요.”

“야, 좀 서운한 척이라도 해줘라.”

단칼에 아니라고 말하는 수호에게 선우가 버럭 화를 내질렀다. 빈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너무하긴 했다.

선우가 수호를 심술 맞은 눈으로 쳐다봤지만 수호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게임에 집중했다. 단순히 몸풀기만 하는 건데도 수호의 손놀림이 현란했다.

선우는 의자를 끌어 수호에게 밀착하며 수호의 화면을 바라봤다.

“그래도 네 성격 맞춰줄 사람이 나 말고 어디 있겠냐. 같은 팀원인 애들도 너 불편해하잖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도 너랑 3년째 같은 팀이라서 편해진 거지 1년, 2년 때는 진짜 불편했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고.”

선우가 빠르게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선우는 처음에 주이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수호를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시키면 ‘네’, ‘아니요’ 이런 간단한 답으로만 대답하기 일쑤였고, 어디 놀러 가자거나 뭔가를 하자고 하면 고개만 젓던 놈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게 낯가림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는 싸가지 없게만 보이던 녀석이 어리숙해 보였다. 똑 부러지게 생겨서 엉성하기만 하고 잘하는 게 딱히 없었다.

“형이 자꾸 말 걸어서 처음부터 편해하는 줄 알았어요.”

“같은 팀이니까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거지. 나는 그러는데 너는 튕기기만 하고 말이야.”

“제 매력이에요.”

“……그딴 드립 누가 알려줬냐.”

선우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듣고 온 모양이었다.

선우가 질색하며 멀어지자 수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재미없어요?”

깨끗하리만큼 순수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순수한 애를 누가 이렇게 망쳐놓은 건지. 선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려고 하는 거면 제발 다시는 하지 마.”

“네, 뭐. 알겠어요.”

곱게 고개를 끄덕이는 꼴이 말 잘 듣는 어린 오리 새끼 같았다. 훌쩍 키도 크고 선우와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수호였지만, 이런 모습 때문에 유독 어린애같이 느껴졌다.

선우는 드디어 잡힌 게임을 시작했다.

“그래도 너 주오 형이랑 같이 가는 거면 다행이네. 그 형이 너 좋아해서 엄청 챙겨주잖아.”

“그렇긴 한데…….”

“그 반응은 뭐냐. 뭔 일 있었어?”

수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선우가 물어봤다. 수호는 고개를 저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부담스러워요.”

늘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하고, 기회만 되면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챙기려는 주오의 태도가 낯을 가리는 수호에게는 불편하기만 했다. 선우도 대충 눈치챈 듯 현란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며 웃었다.

“그 형이 너 챙기는 게 과하긴 해. 그런데 뭐 어쩌겠냐, 팬이라는데.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겠지. 이참에 올스타전 가서 친해지고 와. 4년 내내 같이 갔으면서 뭘 아직까지 낯가리고 그러냐.”

“4년이어도 같은 숙소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올스타전이라는 거 매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이잖아요.”

낯가림이 심한 수호에게는 친해지기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선우는 혀를 끌끌 찼다.

“네가 그 형이랑 올스타만 했었냐. 행사 같은 거 있으면 같이 가고, 너 데뷔하면서부터 4년 동안 계속 지나가다가 얼굴 보고 그랬는데? 이제 적당히 친해져 봐라.”

“그래도 그 형은 조금 불편해요.”

“에라이, 그럼 계속 그렇게 지내든가. 주오 형이 불쌍하다.”

선우는 도통 말을 들어먹지 않는 수호에게 핀잔을 줬다. 자기 같으면 계속 그러는 게 가상해서 먼저 말이라도 한번 걸어봤을 텐데. 돌부처 같은 수호는 4년 동안 늘 한결같이 묵묵부답이었다. 선우는 혀를 찼다.

“그것보다 너 재계약 할 거야? 이번이 계약 종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재작년에 2년으로 계약을 했던 수호는 계약 종료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팀 이적에 대해서 큰 생각이 없던 수호는 어깨만 으쓱했다.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슬슬 생각해 봐라. 해외 리그로 가면 돈은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배는 더 벌 거고, 다른 팀으로 가도 더 준다고 하긴 하겠지.”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어요.”

수호의 간단한 답변에 선우는 재수 없다는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너 좀 재수 없다.”

“왜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어오는 수호의 순수한 태도에 선우는 됐다며 고개를 지었다.

하긴 벌 만큼 벌긴 했을 거다. 우승 상금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데 수호가 받는 연봉까지 생각하면 평생은 먹고살 테니까.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역시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우였다.

“그래도 더 벌어두면 좋잖아. 프로게이머는 수명도 짧아서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두는 게 좋으니까.”

“전 한식이 좋아요.”

이 상황에 저 대답이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확고한 수호의 답변에 선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면 별수 없고. 그런데 나한테는 안 물어보냐?”

수호와 같이 계약이 끝나는 선우였다. 선우는 자신의 거처는 궁금해하지도 않는 3년 팀메이트를 매정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 형은 재계약 안 해요?”

“어, 안 한다. 제라드로 갈 거야. 이미 오퍼 들어왔어.”

선우의 답변에 수호가 눈가를 찡그렸다.

“저한테는 해외 가라면서 형은 왜 해외 안 가요.”

선우는 자신을 나쁜 놈 바라보듯 보는 수호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말도 안 통하는 놈들이랑 무슨 게임을 해. 말 통하는 한국인들이랑 게임해도 답답해 미치겠는데, 말까지 안 통하면 진짜…… 상상하기도 싫다.”

생각만 해도 답답해 죽는다는 듯 선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내 수호에게 은근히 물어왔다.

“너 재계약 안 할 거면 같이 제라드로 갈래?”

제라드. 이번 세계대회에서 수호가 있는 주이와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이자 준우승을 한 팀이었다. 데뷔한 지 6년 동안 한결같이 최상위 실력을 보여주는 김주오가 오래 머물고 있는 팀이기도 했다.

대기업이 후원해 주고 있어 자본도 좋고, 선수들 케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다 좋았지만 수호는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게 표정으로 티가 났는지 선우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왜, 주오 형 있어서 싫어?”

장난스러운 선우의 질문에 수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정곡이라도 찔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니라고 하지만 수호의 얼굴에는 김주오가 불편하다고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선우는 게임을 하다 말고 의자까지 빼서 수호에게 다가갔다.

“진짜 사람한테 별로 관심도 없는 애가 왜 이렇게 주오 형만 불편해하는 거야?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수호에게 가까이 붙은 선우가 의심스럽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호는 그런 선우의 열렬한 시선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일은 없어요.”

“근데 대체 왜 그래?”

영문을 모르겠다며 그 이유 좀 알자며 선후가 수호를 다그쳤다. 수호는 그 질문에 아주 간략한 답을 내놓았다.

“너무 평범하지 않아요.”

“……뭐?”

“너무 평범하지 않다고요.”

어이없어하는 선우에게 수호가 재차 답변했다. 엉뚱한 답을 한 사람은 본인이거늘 어이없어하는 선우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 눈가를 찡그리는 수호였다.

선우는 온 진심으로 김주오가 평범하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말하는 수호를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니, 그게 이유야? 정말로?”

수호가 말한 대로 김주오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잘난 얼굴과 장난 아닌 실력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편할 이유인가. 선우는 너무나 당당한 수호의 태도 때문에 어이가 없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잖아요.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평범하지 않은 건 김주오가 아니라 이수호라고 생각하는 선우였다. 고심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수호를 보던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평범하지 않긴 하지. 근데 내가 보기엔 너도 평범하진 않다.”

선우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참 안 어울리게 귀여운 행동이었다. 그게 또 이수호다웠다.

“전 평범한 편인데요.”

“글쎄. 내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 그것보다 제라드 생각해 봐. 주오 형이 너무 잘생겨서 불편한 거면 이번에 올스타전 가서 지겹게 보고 익숙해져 오면 되잖아.”

“지겹게 보기엔 불편하다니까요. 불편한데 얼굴을 어떻게 지겹게 봐요.”

“보라면 그냥 봐. 주오 형 팬들은 보고 싶어서 안달 나는 얼굴이라고.”

“그건 그 형 팬이죠. 전 그 형 팬 아니에요.”

“이참에 팬 해. 쌍방 팬질하는 것도 보고 싶네. 주오 형의 일방적인 덕질은 이제 지겹다.”

같이 행사를 가거나 경기에서 만나게 되면 수호와 마주치기 위해서 대기실 근처를 배회하던 주오의 모습이 생각나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4년의 짝사랑에서 쌍방으로 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선우의 생각을 모르는 수호는 눈가를 찡그릴 뿐이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안 해요. 수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선우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 * *

올스타전은 약 2주간 베를린에서 진행된다. 한국에서 뽑힌 올스타는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이의 SUHO 수호, 늘 최상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제라드의 Rain 김주오, 최근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제라드의 Moo 조은기, 오래전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킹콩의 Rush 정재인,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은 체스의 People 이지한 5명이었다.

올스타는 올해 한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플레이를 한 선수나, 오래전부터 인기가 많은 선수들이 뽑혔다. 수호와 주오, 그리고 재인은 후자에 속했다. 데뷔 이후로 올스타전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세 사람이었다.

수호는 빵빵한 캐리어를 끌고 사람이 수북한 인천 공항을 걸어 나갔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는 얼굴로 수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무국에서 공항까지 데려다주긴 했지만 엄청난 길치인 수호는 공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그리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각기 다른 팀에서 모이기 때문에 파리로 향하는 출국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수호는 길을 잃었기에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팀원들과 함께할 때는 수호와 가장 친한 선우가 수호를 끌고 다니거나 사무국 직원이 수호의 곁에 딱 붙어 데리고 다녔지만 지금 이수호는 혼자였다. 그리고 수호는 길치였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수호는 일단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되겠지,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걱정 없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수호가 찾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전화라도 해볼까 핸드폰을 들었지만, 낯가림이 심한 수호에게 이번 올스타로 뽑힌 선수들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말투로 걱정 어린 말을 중얼거리며 수호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부터 다시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호가 입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수호야?”

다정하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수호에게는 아주 낯익은 목소리였다. 듣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저음과 무엇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묵직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성. 팬들은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다고 외치는 김주오의 목소리였다.

수호가 움찔 어깨를 떨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너무 잘생겨서 불편한 김주오가 웃으며 서 있었다.

그는 오늘도 잘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호는 멍하니 주오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어깨의 놓인 주오의 큰 손을 내려다봤다. 거의 티가 나지 않지만, 수호를 면밀히 관찰하는 주오는 묘하게 찡그려진 수호의 눈가를 눈치채곤 빠르게 손을 걷어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닿는 거 안 좋아하지? 미안해.”

주오가 미안하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긁으며 수호의 눈치를 살폈다.

수호는 ‘딱히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라는 말을 할까 싶었지만 그 말을 하면 주오가 서슴없이 더 다가올 것만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멀뚱한 눈으로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음.”

4년 동안 얼굴을 봐왔지만 아직까지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수호가 말을 끌자, 주오가 가볍게 말했다.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볼 때마다 늘 듣는 말이지만 수호는 눈앞에 이 남자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를 자신이 없었다. 주오는 지나치게 친근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평범함 속에서 살아왔던 수호에게 주오의 얼굴은 정말 특별함, 그 자체였기에 계속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은요?”

“방금 수호 네가 지나쳐 갔잖아. 불러도 가길래 잡으러 왔지.”

눈앞의 남자가 하는 잡으러 왔다는 말이 묘하게 들렸다. 늘 졸졸 쫓아다니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수호는 길게 뻗은 눈매로 흘긋 주오를 봤다. 주오는 짙은 애정이 어린 눈으로 수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호는 부담스러운 주오의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나 불편해할 거야?”

그의 잘난 얼굴만큼이나 불편한 건 이런 직설적인 어법이라고 생각하는 수호였다.

이 사람은 돌려 말하는 게 없었다. 물론 수호 본인도 그런 타입이었지만, 주오와는 노선이 달랐다. 주오는 애정 표현에 거침이 없는 타입이었고, 수호는 그것 외에 다른 언행에 거침이 없는 타입이었다.

곤란한 얼굴을 하는 수호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 주오가 방긋 웃었다. 그러곤 만났을 때부터 들고 있었던 사인지와 유성펜을 수호에게 내밀었다.

“사인해 줄래?”

수호는 눈앞에 내밀어진 하얀 사인지를 멀뚱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에 해드렸잖아요.”

“그건 그때 거. 이건 오늘 거. 날짜가 다르잖아. 글씨도 미묘하게나마 다를 테고.”

이쯤 되면 사인이 아니라 수호의 친필 글씨를 모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수호는 당당하게 내뱉는 주오의 변태적인 언사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벌리며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수호의 태도에 주오가 머쓱한지 어색하게 웃었다.

“어…… 형 이상한 사람 아니야. 도망가지 마.”

그 말이 더 이상해 보였다. 진짜 변태들이 꼭 변태인 것을 들키면 하는 부정의 말과 꼭 닮아 있었다.

수호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주오를 바라보자 그가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자, 떨어졌어. 이제 그만 갈까? 사람들 기다리고 있어.”

“가요.”

수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며 주오를 따라나섰다.

경계심이 비쳤던 수호의 검은 눈동자가 본래의 순하고 무덤한 눈으로 돌아가자 주오는 앞서가던 걸음을 늦췄다. 자연스럽게 수호의 옆에서 발을 맞춰 걷던 주오가 다시금 사인지를 흔들었다.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나는 그냥 수호 사인이 또 갖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한 장만 더 해주면 안 될까?”

주오가 눈가를 접어 웃으며 나긋하게 물었다. 수호는 사람을 홀릴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주오가 이상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받아 간 사인들은 대체 어쩌고 볼 때마다 사인을 요구하는가. 그것이 수호는 늘 궁금했다.

“그런데 음…… 지금까지 사인해 드렸던 건 다 잃어버리셨어요?”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그 호칭이 불편하면 이름으로 불러도 되고. 그리고 사인받은 것들은 다 집에 있어. 소중하게 박스에 넣어뒀지.”

아직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어색해하는 건지. 호칭 없이 물어오는 수호가 귀엽다는 듯 주오가 웃어 보였다. 움찔거리는 주오의 손끝이 당장에라도 수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주오는 수호가 지난날 해줬던 사인을 떠올렸다. 수호의 사인지는 주오의 아주 소중한 수호 컬렉션 박스에 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받는 사인지도 그곳에 추가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사인해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야 받고 싶으니까. 받아도, 받아도 계속 갖고 싶어. 그리고 사인을 핑계로 수호한테 말 한 번이라도 더 걸어볼 수 있잖아.”

가볍게 흐르는 주오의 음성과 다르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열렬했다. 수호는 그게 또 어색하고 부담스러워 살짝 걸음을 늦췄다. 그런 수호를 내려다보던 주오도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춰 수호와 걸음을 맞췄다.

수호는 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입에 테이프라도 붙인 사람처럼 말이 없는 수호를 힐끔 내려다보던 주오가 손에 들린 사인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래서 정말 안 되는 거야?”

사인이 너무 받고 싶다는 듯 풀이 죽은 주오의 갈색 눈이 수호를 향해 빛났다. 수호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만큼 잘난 얼굴에 괜스레 그의 콧잔등을 노려봤다.

여기서 거부해 봤자 분명 베를린에 가는 동안에도, 도착한 후에도 계속해서 사인해 달라고 요구할 주오가 눈에 선했다. 이미 4년간 주오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당해본 수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드릴게요.”

수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사인지를 받아들었다. 주오는 순백의 사인지에 검은 펜으로 간결한 ‘SUHO’라는 글자를 남기는 수호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사인을 빠르게 적어낸 수호는 사인지를 다시 주오에게 건넸다. 주오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건네받듯 조심스럽게 사인지를 받아 들어 품에 안았다.

간간히 품에서 떼어내어 사인지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주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수호는 이미 수십 장은 더 넘게 받은 사인이 저렇게 좋을까 싶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김주오! 여기야, 여기!”

저 앞에서 휑하니 지나간 수호를 붙잡은 주오를 발견했는지 이번 올스타전에 감독으로 참가한 제라드의 감독 이진형이 손을 흔들었다. 지나치게 풍채가 좋은 탓에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수호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감독님, 목소리가 너무 커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쩌겠냐. 그래도 잘 데려왔네? 인파에 섞여서 힘들 줄 알았는데.”

“주오 형은 인천공항이 아니라 락 페스티벌같이 어둡고 북적이는 곳에서도 이수호는 금방 찾을걸요?”

감독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Moo 조은기가 질린다는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이진형은 너털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네. 어쨌거나 다들 모인 거 같으니까 슬슬 준비해야지.”

어정쩡한 곳에 서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수호의 시야 앞으로 주오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수호는 놀란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왜요.”

“가만히 서서 뭐 해? 가자. 감독님이 일정 설명해 주실 거야.”

“알겠어요. 그러니까 얼굴은 그만 치워주세요.”

“아, 미안.”

부담스러워하는 수호의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주오가 냉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불편한 얼굴이 멀어지자 미세하게 올라가 있던 수호의 눈썹 다시 내려갔다.

수호가 주오를 따라 선수와 스태프들 사이로 들어서자 이진형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올스타전의 지휘를 맡은 이진형이다. 제라드 소속 감독이고. 뭐 이런 건 얼굴 맞대고 사는 사람들끼리 알고 있는 얘기일 테니 건너뛰도록 하지. 일주일 뒤 베를린에서 열리는 올스타전 일정은 약 2주. 서로 다른 팀에서 모인 선수들이지만, 경기하면서 자주 봤던 사이니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대회는 이벤트전이니까 마음 편하게 놀러 가는 거라고 생각해라. 그래도 이왕 경기하는 거 우리 지역이 우승하고 돌아오면 좋겠지?”

“네!”

“그러니까 베를린 가서 연습 소홀히 하지 말아라.”

이진형의 장난스러운 말에 선수들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펼쳐졌다.

무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수호뿐이었다. 워낙 말이 없고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수호는 선수들과 떨어진 곳에 앉았다.

수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멍한 얼굴로 앉아 있으려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Rush 정재인과 그와 붙어 앉아 있던 People 이지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호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시야로 제라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장신의 남자의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는 제라드의 유니폼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수호는 다시 울컥 올라오는 불편함에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상대로 불편한 남자, RAIN 김주오가 있었다.

주오는 살갑게 웃으며 수호의 곁에 앉았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듯 어색한 얼굴과 시선을 하는 수호와는 다르게 주오의 미소는 해맑았다.

“혼자 뭐 해?”

“그냥 있어요.”

“심심해 보이는데 나랑 놀래?”

“저랑 있어도 재미없을 테니 다른 분들이랑 노세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수호에게 사근사근 말을 건네는 주오였으나 수호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주오를 불편해하는 수호이긴 했지만 주오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수호를 알고 있는 주오는 수호의 날 선 대답에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수호랑 있으면 재밌는데. 수호는 재미없어?”

“재미없어요.”

주오가 상처받을 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수호는 자신의 말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 멀뚱한 얼굴을 했다.

“앞으로 재미있도록 노력해 볼게.”

“노력하실 필요 없는데요.”

김주오가 자신 때문에 노력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수호였다.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는 수호를 보는 주오의 눈이 번뜩였다.

“……수호야, 그대로 있어봐.”

“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네?”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주오의 말에 수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주오는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뚱한 얼굴로 눈만큼은 순수한 의문을 띠는 수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주오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켜고 수호의 대답을 기다리는 주오의 눈이 반짝였다. 수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다갈색 눈이 정말이지 너무 반짝거려서 수호는 움찔했다. 과하게 부담스러운 주오의 눈빛에 수호는 시선을 돌렸다.

“싫어요. 사진 안 찍을래요.”

“예쁘게 찍어줄게.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

“싫다잖아요. 인터뷰해야 하니까 그만하고 저리로 가요.”

어느새 다가와 주오의 어깨를 잡은 조은기가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표정으로 주접 좀 그만 떨라고 말하는 조은기를 돌아보는 주오의 눈빛이 불만으로 가득했다.

조은기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주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요. 기자님들 오셨으니까 빨리 가세요.”

“수호야, 사진은 다음에 찍어줄게. 가자.”

분명 싫다고 말했지만 주오는 자연스럽게 다음번에 사진을 찍는 것으로 결정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는 다시 한번 싫다고 말할까 했지만 그냥 입을 닫고 주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김주오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People 이지한과 Rush 정재인은 이미 인터뷰를 시작한 듯 마이크를 쥐고 기자들 앞에 서 있었다. 수호가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자주 보았던 기자가 웃으며 수호와 주오 앞으로 다가왔다.

“수호 선수, 레인 선수, 오랜만에 뵙네요. 월드 챔피언십 이후로 처음이죠? 그동안 잘 지냈어요?”

김승태는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인터뷰 마이크를 꺼내 수호와 주오에게 건넸다.

능숙하게 옷깃에 마이크를 단 주오는 느릿하게 마이크를 달고 있는 수호를 바라봤다. 마이크를 다 달았는지 꼼지락거리던 수호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수호가 손을 떼자 마이크가 엉성하게 옷깃에서 달랑거렸다.

수호는 그래도 마이크가 떨어지진 않으니 괜찮지 않나 싶어 손을 내렸다. 수호가 그대로 인터뷰를 하려 기자 앞에 서자 김주오가 성큼 다가왔다.

수호는 다가오는 주오를 보며 움찔했다. 갑자기 왜 다가오는 건가 싶었다.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 주오가 손가락으로 수호의 옷깃에 달린 마이크를 가리켰다.

“공항이라서 시끄러운데 이렇게 달면 음성 제대로 안 나갈지도 몰라. 고쳐줄게.”

“제가 할게요.”

마이크를 고쳐주려는 듯 손을 조심스럽게 뻗는 주오가 괜히 불편하고 민망스러워서 수호가 급하게 마이크를 고쳐 달았다. 하지만 그래도 엉성한 모양새에 김승태가 웃어 보였다.

“수호 선수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나 보네요. 그냥 레인 선수가 고쳐주세요.”

“아…….”

“잠깐만, 빨리 고쳐줄게.”

수호가 닿는 것을 싫어한다고 알고 있는 주오는 엉성하게 수호와 거리를 벌려 손가락 끝으로면 빠르게 마이크를 고쳤다.

나름 닿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주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수호는 경계심으로 굳어 있던 근육을 천천히 풀었다. 이런 정도라면 괜찮은 것 같았다. 마이크만 고쳐주는 것일 뿐이니까 불편해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수호는 멀뚱히 서서 주오가 마이크를 고쳐다는 것을 기다렸다. 처음과 달리 달랑이지 않도록 마이크를 달아준 주오의 손길이 곧 떨어져 나갔다.

“다 한 것 같으니까 이제 인터뷰해 볼까요?”

김승태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에서 손짓을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올스타전에 참가하게 된 수호 선수, 레인 선수 소감이 어떻습니까? 레인 선수부터 답변해 주세요.”

김승태의 파이팅 넘치는 음성은 공항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주오는 김승태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도 올스타전에 참가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쟁쟁한 선수들이 많은데 저를 뽑아주신 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데뷔 후 6년 동안 녹슬지 않는 실력 때문에 아직도 많은 팬들이 사랑해 주시나 봅니다. 이번 올스타전 목표와 계획이 있으십니까?”

“정규 시즌이 아닌 이벤트전이라고 해도 국제대회이니만큼 좋은 성적 거둬서 팬분들께 즐거움을 드리고 싶어요.”

“역시 레인 선수. 우승을 목표로 하신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네요.”

모범적인 주오의 답변에 마음에 드는지 김승태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그리고 레인 선수하면 이 질문을 빠뜨릴 수 없죠. 레인 선수가 짝사랑하는 상대 수호 선수와 이번에도 함께 가게 되었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너무 좋습니다. 이번에는 꼭 수호랑 친해지고 싶어요.”

모범적인 답안과 함께 비지니스 미소를 짓고 있던 주오는 기자의 입에서 수호의 이름이 나오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의 미소였다. 설렘으로 가득한 주오의 다갈색 눈이 반짝였다.

수호의 이름만으로도 급변하는 주오의 분위기에 김승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김승태도 게임이라면 환장할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자가 되고도 e스포츠 담당 부서로 옮겨 온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그는 RAIN 김주오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인터뷰로 처음 김주오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김승태는 기자가 된 걸 하늘에 감사드릴 정도였다.

김승태는 그렇게 동경하던 상대가 이수호라는 이름만 들으면 자신과 같이 스포츠스타를 좋아하는 소년과 같아지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엮어 나갔다.

“4년 동안 올스타전을 함께했는데도 아직도 친해지길 바라를 찍고 계시는군요. 이번에는 꼭 친해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레인 선수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수호 선수, 이번에는 주오 선수의 마음을 받아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유독 신이 나 목소리가 높아진 것 같은 김승태의 음성에 수호는 움찔했다.

또다. 늘 이랬다. 김주오와 엮이면 이런 식으로 인터뷰가 흘러가곤 했다. 수호는 이럴 때마다 곤란함을 느꼈다. 그리고 늘 똑같은 답을 내놨다.

“아껴주시는 마음 감사합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친해지는 것은 무리였다. 정확하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호는 처음 김주오를 봤을 때부터 그가 불편했다. 왜냐고 물어도 딱히 뭐라고 콕 집어서 답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무언가 불편했다. 그리고 수호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그의 평범하지 않은, 범상치 않은 외모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수호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친구들과 평범하게 지내왔다. 그래서 김주오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김주오는 학교에 있을 법한 잘생긴 형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쉽게는 볼 수 없을, 아주 드물게 생긴 잘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에 면역이 없어서 불편한 것이라고 수호는 거듭 생각했다.

수호는 다시 한번 정리된 김주오가 불편한 이유에 혼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 수호를 보며 김승태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수호는 왜 웃는 걸까 싶어서 김승태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승태는 수호가 아닌 주오를 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수호의 시선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주오에게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경하는 스포츠 스타를 본 소년의 모습이었던 주오가 지금은 한껏 풀이 죽어 있었다.

수호는 왜 그럴까 싶어 김주오를 멀뚱히 바라봤다. 본인이 내뱉은 매정한 대답 때문에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수호의 반응에 주오는 이내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여러분, 이번에는 꼭 수호와 친해질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주오의 다짐에 김승태는 물론이고 두 사람을 찍고 있던 다른 기자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에는 브로맨스가 유행이라더니 나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김승태는 오늘도 즐거운 두 사람의 인터뷰에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네네, 모두 응원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수호 선수의 인터뷰를 해볼까요? 수호 선수, 올스타전 각오와 함께 팬들에게 인사 한번 해주세요.”

“언제나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작년에는 우승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꼭 우승해서 팬분들께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2인으로 진행하는 게임도 생겼다고 하던데 하고 싶은 경기가 있으십니까?”

올스타전은 이벤트전인 만큼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게임 방식들이 많았다.

정규 시즌처럼 5대5 팀 매치를 포함해, 2인 1조로 플레이하는 이인삼각, 그리고 1대1 대전, 포지션을 변경해서 하는 믹스 포지션 등등.

이렇게 많은 경기를 모든 선수가 한 번씩 경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선수가 어떤 경기를 하는지도 복불복. 올스타전이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깜짝 상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수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무슨 경기에 나갈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글쎄요. 어떤 것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경기를 하더라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팬들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 멋있으십니다. 하지만 가장 기대되는 방식은 역시 이인삼각이죠. 혹시 만약 하신다면 따로 같이하시고 싶은 분이계십니까?”

왠지 모르게 수호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왼쪽 뺨에 닿는 열렬한 시선에 힐끔 그곳을 바라보자 김주오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수호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잘하시는 분이라 누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아, 레인 선수가 안타까워하고 있네요. 어찌 됐든 인터뷰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파이팅하시고 우승컵을 안고 돌아와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도록 할게요.”

주오와 수호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김승태의 손짓으로 카메라에 빨간불이 꺼졌다. 김승태는 여전히 웃으며 수호와 주오를 바라봤다.

“기사로도 나가야 하니까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두 분 붙어주세요.”

김승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오가 성큼 수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수호가 싫어할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다가온 탓에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카메라 앵글 너머로 두 사람을 보던 기자가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며 수호와 주오를 바라봤다.

“너무 어색한데요? 조금만 더 붙어주세요. 친근하게. 주오 선수, 수호 선수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아서 붙어주세요.”

기자의 말에 힐끔 수호를 쳐다본 주오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옆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일 뿐이었지만 유독 신장이 크기 때문인지 그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는 수호에게 주오가 허리를 숙여 말을 걸어왔다.

“미안, 조금만 붙을게.”

수호는 먼저 양해를 구하고 조금 더 붙는 주오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워진 만큼 평범하지 못한 주오의 얼굴이 더욱 시야에 잡혔다. 역시 편안하게 대하기에는 과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호가 불편한 주오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불편해하는 수호에게 그 나름대로 배려하고 있다는 것. 만약 무작정 달라붙었다면 수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딱딱하게 서서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호와는 다르게 주오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듯 환하게 웃는 주오의 얼굴은 참 즐거워 보였다.

수호는 둔감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수호가 느낄 만큼 주오는 수호를 좋아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게이머 선수를 고르라고 하면 단연 수호가 1위, 하지만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은 주오였다. 신인들과 아마추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건 수호뿐만 아니라 주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주오가 정말 자신의 팬이라는 게 수호도 신기하긴 했다.

“수호 선수, 카메라 봐주세요!”

“아…….”

멀뚱히 주오를 보고 있던 수호는 들려오는 기자의 외침에 작은 탄성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김주오를 보고 있었다.

수호가 카메라를 보자 이내 플래시가 터지며 사진이 찍혔다. 사진을 찍은 기자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찍힌 사진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웃었다.

“두 사람은 기사 쓸 거리가 많아서 참 좋아요. 둘이 같이 있는 기사만 나가면 조회수 난리 나는 거 아세요?”

“수호가 있는데 당연하죠.”

“레인 선수 본인은 왜 빼요? 둘 케미 좋아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답니다. 특히 레인 선수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애타고 슬픈데 다른 분들은 그걸 즐기신다니 마음이 아프네요.”

주오의 능청맞은 답변에 승태가 웃음으로 답했다.

콘셉트를 잡아도 너무 잘 잡은 듯했다. 본래도 기사가 나오면 주목받는 선수지만, 수호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후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늘었다. 덕분에 기자들은 주오의 기사를 쓸 때면 늘 헤드라인에 수호를 엮어서 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같이 사진도 찍고 영상까지 땄으니 조회수가 잘 나올 게 분명했다.

승태는 동경하는 선수와의 인터뷰, 그리고 만족스럽게 나올 기사까지 생각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 팀을 배웅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수호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주오를 보며 웃었다.

승태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다른 기자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수호 좋아한다는 거 진심 아니에요? 저 정도면 진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던 기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주오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장비를 정리하고 자리를 뜨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남자들끼리 무슨. 다 컨셉이지.”

“선수로서 좋아하는 건 맞을걸요? 수호 선수 굿즈만 나오면 레인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산다고 이미 소문 다 났잖아요.”

“뭐 어찌 됐든 우리야 둘이 엮으면 조회수 잘 나오니까 좋지. 그럼 철수하자고.”

“네.”

멀어지는 기자들의 수군거림이 공항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때, 주오는 수호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어볼 핑계가 있을까 싶은 눈치였다.

수호는 뒤에서 느껴지는 주오의 기척에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이어폰은 꺼내 귀에 꼈다.

‘말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수호의 행동에 주오는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오는 수호와 그렇게 떨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깝다고 하기도 애매한 거리에 앉아 힐끔힐끔 수호를 바라봤다.

조은기는 기가 차는 주오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다가 사람이 저렇게 됐을까. 조은기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수호가 모든 프로들의 우상인 선수라는 건, 같은 프로인 조은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김주오처럼 저렇게 대놓고 달라붙진 않는다. 저건 이미 동경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조은기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주오는 젠틀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다정할 땐 다정하고, 무서울 땐 무서운 형. 그게 주오와 2년가량 함께 지냈던 조은기가 생각하는 김주오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게임할 때는.

숙소에서도 그런 모습이긴 하지만 수호 얘기만 나오면 다른 사람이 되는 주오였다. 주오의 오랜 팬들은 그런 그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좋아하는 듯하지만, 조은기는 아니었다.

“형, 정신 차려요.”

“뭐가.”

“이수호한테 그만 달라붙으라고요. 형, 요즘에는 진짜 형이 수호한테 진심이라는 얘기 돌아요.”

“그래서?”

한국에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주오가 게이 스캔들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조은기는 김주오를 좋아했다. 참 좋은 형이었고, 조은기가 데뷔하기 전부터 동경하던 선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팀에서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은기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 상대인 주오가 이렇게 이수호만 관련되면 초라해지는 게 싫었다. 조은기는 그러니 이제 적당히 하라는 얼굴을 했지만, 김주오는 조은기와 달리 걱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여유로운 표정. 이럴 때 보면 은기가 알던 김주오의 모습이었다. 조은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라뇨.”

“좋은 걸 좋다고 하는 거지.”

담백한 김주오의 답변에 조은기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형 팬으로서 슬퍼서 그래요. 형도 나름 동경의 대상인데 왜 그렇게 찬밥 신세를 당하고 있냐고요.”

“수호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잖아.”

또 수호의 얘기에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김주오였다. 진짜 질리는 주오의 열렬한 애정 공세에 조은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휴, 됐어요. 형 마음대로 해요.”

질렸다는 듯 허탈하게 말하는 조은기의 어깨를 김주오가 두드렸다. 그게 꼭 힘내라는 것 같아서 은기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김주오를 바라봤다.

김주오는 자신을 잘 따르는 조은기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 네 생각보다 훨씬 진지해.”

“……뭐라고요?”

조은기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자신의 물음에도 답 없이 은근한 미소를 지을 뿐인 주오의 태도에 은기의 얼굴이 이내 사색이 됐다.

무슨 공포영화의 소름 돋는 장면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조은기를 보던 주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조은기의 어깨를 다시 한번 툭툭 건드리고 주오는 걸음을 옮겼다.

조은기는 그런 김주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깐만, 주오 형! 그거 무슨 의미예요?!”

조은기의 다급한 외침에도 김주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출국 시간이었다. 올스타전 개막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김주오는 이번에는 꼭 수호의 연락처를 받아내겠다는 결심 어린 눈으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조은기는 주오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봤다. 수호가 은기의 외침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이어폰을 빼고 조은기를 보고 있었다.

조은기는 방금 김주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도 못 하는 수호의 순박한 검은 눈을 멍하니 보다 이내 멀어지는 주오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형, 정말 미쳤나 봐.”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조은기는 멍하니 김주오를 바라봤다. 팀을 이끄는 제라드의 주장, RAIN 김주오의 넓은 어깨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호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은기와 주오를 번갈아 보다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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