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뜨거운 당신
“칼 찾으러 가요. 제가 따져 줄게요.”
“칼?”
“그거 받으려고 결혼했다면서요.”
“모엘르 검.”
칼이라니. 라이언은 모엘르 검을 두고 칼이라고 말하는 리아를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두려울 게 뭐야. 그녀가 사랑한다고 하잖아. 대신 따져 주겠다잖아.
“그게 모엘르 검이구나.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랬지.”
“뭐야 그 반응은. 하기 싫은 결혼까지 할 정도로 찾고 싶은 거였다면서요.”
“맞아. 찾고 싶었지.”
“도대체 그 검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찾아 줄게요. 아이 낳을 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아이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왕궁에도 가려고 했고 겸사겸사 딱이에요.”
“정말 괜찮나?”
“뭐가요?”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괜찮냐고 묻는 것이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당신은 날 사랑하고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 나 역시도 원하는 것이 있어서 당신과 결혼을 했어요. 정략결혼이란 다 그런 게 아닌가요?”
라이언은 잠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죠?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저도 그 검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해요. 어떤 물건이기에 미친 공주와 결혼까지 했는지.”
그가 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나도 그때 내 모습이 엉망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래서 검 찾으러 간다는 거예요?”
리아가 빨리 결정하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불면증과 악몽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건 리아와 함께 있을 때에 국한된 것이었다.
모엘르 검을 되찾아 없애 버리면 진정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이 필요했다.
검을 되찾아 없애 버리는 것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헉.”
갑자기, 이마 위 흉터에 통증이 일었다. 라이언은 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는 그녀를 잡아당겼다.
“어머!”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다른 한 손으로 재빠르게 허리를 감아올리자 리아의 가벼운 몸이 순식간에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그대로 흉터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만져줘.”
라이언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리아는 그의 흉터 위로 자신의 손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금방까지 일그러졌던 그의 이마가 평온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 손이 정말 약손이죠?”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요. 나 같은 부인이 어디 있어요. 억울한 거 대신 따져 준다고 나서, 아프다고 하면 만져줘.”
감은 두 눈 아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리아는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의 모습이 좋았다. 정말 만져주면 통증이 사라지는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도 신기했다.
“정말 아파요?”
오래된 흉터가 아직도 아프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런데 그는 가끔 흉터에 진짜 통증이 느껴지는 것처럼 이마를 구기며 인상을 써댔다.
라이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내가 만져주는 게 좋아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요?”
리아가 흉터 위에 올려놓은 손 말고 다른 손끝으로 라이언의 얼굴을 턱 끝에서부터 천천히 타고 올라가며 속삭였다.
“그럴지도.”
이마의 흉터는 그가 꼭 찾고 싶어 하는 검과 관계된 것일까?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의 어린 시절은 평온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의 악몽도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끔찍해 하는 모습도.
가족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저택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드포드 성에는 그 흔한 초상화 한 장이 놓여 있지 않았다.
리아는 일부러 더 묻지 않았다. 과거의 아픔을 꺼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먼저 말해 주지 않는 한 끝까지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비밀은 그녀의 비밀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티끌과 같을 테니.
그리고 자신이 그의 흉터를 만지면 통증이 사라지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발레포르는 말했었다.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간 라루체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 치유의 힘이 그에게까지 기운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리아는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레오니의 몸에 들어가 라이언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은 하늘이 가여운 그의 아픔 또한 감싸주고 싶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리아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이토록 변해 버린 자신이 어이없어서. 이 세계에 떨어져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왜 웃지?”
“그냥, 아까 잠깐 생각했던 게 떠올라서요.”
“무슨 생각을 했기에?”
“도망갈까 하는 생각?”
그녀의 말에 그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뭐 별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그럼 도망가려고 했나?”
“그러려고 했죠. 그저 후계자가 필요해서 이용하는 거라면 그런 건 딱 질색이거든요.”
“도망이라니. 그게 가능할 것 같나?”
마치 그녀가 진짜 도망가려는 것을 잡아낸 사람처럼 그의 말투가 매서웠다.
“불가능할 건 또 뭐야. 못 할 것 같아요?”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받은 보석과 재산을 싹 챙겨서 도망을 가볼까? 하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라이언은, 이마 위에 올려진 리아의 손을 끌어내려 자신의 볼 위에 올려두었다.
“아니.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그렇죠? 사실 제가 또 그런 건….”
“그러지 마. 그런 생각 따윈 다신 하지 마.”
라이언이 리아의 말을 자르며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진짜 그녀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리아는 두려움을 봤다. 떨림을 봤다. 그리고 사랑을 또다시 확인했다.
그녀는 그의 턱 끝을 쓰다듬던 나머지 손도 그의 볼 위로 올리며 그의 얼굴을 양손을 감쌌다.
“걱정 마요. 당신이 쫓아내도 나 어디 안 가요. 당신한테 딱 붙어서 안 떨어져요.”
리아는 그의 얼굴 위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살짝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한 행동인데.”
“이게요?”
리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더 강하게 코끝을 문지르자 이번에는 그의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더니 그의 무릎 위에 살포시 올라앉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라이언!”
“난 또 이걸 원하는 줄 알았지.”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달콤했다. 리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 끝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 댔다.
“당신은 이걸 원하는 거죠?”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흐음….”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일까? 누구래도 상관없었다. 리아는 라이언의 입술이 주는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엉덩이를 감싼 그의 손끝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일부러 엉덩이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입술에서 끙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아랫입술을 물린 채로 그는 말했다.
“혀를 내밀어.”
리아는 라이언의 말에 순종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에도 남편의 말에 복종하는 착한 아내였으므로. 거부할 이유 따윈 없었다.
홍차의 씁쓸한 맛이 혀끝을 맴돌다가 사라지자 이내 촉촉하고 달콤한 서로의 타액이 엉켜 들었다. 마치 처음 키스를 나누는 사이처럼 두 사람은 절박할 정도로 서로를 탐했다.
서로의 온기에 금방 몸이 뜨거워졌다. 라이언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언제 치마를 걷어 올렸는지 한 손에 잡히는 얇은 발목을 타고 그의 손가락이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로 옮겨졌다. 매끄러운 실크 스타킹은 그의 손길을 더욱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라이언.”
리아가 신음을 애써 삼키며 입술을 떼어내고는 그를 불렀다.
“여긴 서재예요.”
“아무도 오지 않는 우리 둘뿐인 서재지.”
“그래도….”
“우리 둘뿐인데 무엇이 문제겠소.”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의 처음보다 더 깊숙하게 리아의 입안으로 밀려들어 치아를 쓸고 입 안쪽 여린 살들을 맛보며 그녀의 숨을 헐떡이게 했다.
어느새 리아는 좀 더 넓은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라이언의 달콤한 키스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네크라인은 밑으로 내려갔고 치마는 사정없이 구겨져 밀려 올라갔다.
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엉망이 된 서로의 옷차림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리아는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몽롱했다. 그녀는 그에게 취해 있었다. 그의 향기에, 그의 달콤함에, 그의 열정에, 그의 사랑에.
그리고 그를 원했다. 지금보다 더 가까이, 더 깊숙하게, 더 황홀하게.
리아는 손을 뻗어 그를 감싸 안으며 자신에게 더 가깝게 그를 잡아당겼다.
그녀를 희롱하던 그의 입술이 다시 위로 올라와 입술에 포개지며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흐읍.”
리아는 그의 입안으로 신음을 쏟아냈다.
“쉬이…. 당신은 너무 뜨거워.”
그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그녀를 자극했다. 그의 움직임에 그녀는 엉덩이를 비틀었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라이언. 제발….”
리아가 애원하듯 입술을 마주 댔다.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그가 리아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위로 올렸다. 그녀의 표정을 내려다보며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니 그녀도 웃음이 났다.
리아는 그를 끌어안으며 잡아당겼다. 당장 그가 필요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빠르게 한몸이 되었다.
“하아….”
함께 한다는 그 묘하고 이상한 안도감에 리아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그녀의 안에 들어가자 비로소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라이언도 묘한 충족감에 몸을 떨며 리아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나 역시.”
이제 그에게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검을 되찾아 준다면 그러라고 할 것이고, 그녀가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살자면 또 그럴 것이다.
작고 약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그녀만 옆에 있어 준다면 그는 그 무엇도 견딜 수 있었다.
문득 그 순간 라이언은 두려워졌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리아를 노리는 검은 그림자. 라이언은 리아의 입술에 다시 키스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절대 그녀를 위험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옆에. 언제나 함께. 언제나 그의 손길이 닿는 지척에 둘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향한 감당 못 할 소유욕이 그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