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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70화 (70/116)

70화. 따질 게 있어요

저녁 시간 직전까지 라이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아는 혼자 식당에 내려가 그를 기다렸다.

“마님, 그만 식사를 내오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공작님께서는 늦으실 모양인가 봐요.”

밖을 살피던 메리가 리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배가 고프지도 않은걸.”

웰우드에서 돌아올 때부터 리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메리는 더 말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리아의 황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깊고 진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메리는 좀처럼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공작부인,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집사 넬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라이언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하오.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그냥 이대로 저녁을 먹어도 되겠지?”

그는 외출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외투만을 벗어 존에게 넘겨준 채 자리에 앉았다.

“우리끼리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나요. 당신과 나 둘뿐인데. 괜찮아요.”

라이언이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기가 무섭게 음식이 놓여졌다. 그는 배가 고팠는지 꽤 많은 양의 음식을 먹었다.

리아는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나 근처에 서 있는 넬슨이 신경 쓰였다.

식사가 끝나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응접실이나 서재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차나 포도주를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

리아는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 앞에는 곧바로 후식이 놓였다.

“쇼핑은 어땠나?”

“어땠을 것 같아요?”

리아가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되물었다.

“글쎄. 당신 표정을 보니 별로였나 보군. 정말 그런가?”

라이언이 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그는 집에 돌아오기 전 제임스를 만났다. 제임스는 웰우드에서 페넬로페와 리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무슨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제임스는 리아의 기분을 걱정했다. 페넬로페가 좋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하며 그더러 잘 챙겨보라고 했다.

제임스의 예상처럼 리아는 이상했다. 평소보다 더 차분하고 더 조용했다.

별일이 없었다면 그가 묻기 전에 웰우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았을 텐데 아니었다. 그녀는 날씨가 어땠다거나 저녁 식탁에 올라온 메뉴에 대해 시답잖은 이야기만을 할 뿐이었다.

“제임스를 만났나요?”

역시나 리아는 눈치가 빨랐다.

“티가 났나?”

“네. 아까부터 계속 제 눈치만 살폈잖아요. 너무 티 나게.”

라이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모른척하려고 했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만 리아의 표정을 살피고 그녀의 모든 행동이 하나하나 신경 쓰였다.

“제임스가 당신 걱정을 하더군.”

“제가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해 주던가요?”

“무슨 일이지?”

페넬로페와 리아가 나눌 이야기가 무엇일까? 아니 리아가 충격을 받을만한 일이라니? 도무지 조금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죠?”

“응?”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 하는 고민 했잖아요.”

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런데 모르겠어.”

라이언이 손을 뻗어 리아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리아가 몸을 당겨 앉으며 그의 손을 피했다.

“죄송. 다정하게 손을 잡을 기분이 아니라서요.”

“말을 해봐. 무엇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는 거지?”

그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리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래도….”

리아가 말을 꺼내다 말고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급해진 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흐음…….”

자꾸 뜸을 들이며 말을 멈추는 리아 때문에 라이언은 애가 탔다. 도무지 표정을 보고도 생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이 왜 이러는 거지?

“뭐 찔리는 거 있어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요?”

“내가?”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몸을 소파에 기대며 팔짱을 끼고 다리를 꽜다. 그 동작을 단번에 행하는 모습이 더 수상했다. 찔리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야. 리아는 생각했다.

“없어요?”

“전혀. 아무것도. 그저 궁금할 뿐이야. 당신이 충격을 받을 정도라니. 도대체 그 어떤 게 당신을 충격받게 할 수 있단 말이지?”

“좋아요.”

리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 뜸 들이지 않고 말하죠. 르셀에 가야겠어요.”

“르셀?”

“왕을 만나야겠어요.”

“누구?”

“왕 말이에요. 제 오라버니라는 사람.”

당황한 라이언의 입이 벌어졌다. 왕을 만나러 가겠다니?

“왜?”

“친정방문을 하겠다는데 그렇게 놀랄 필요가 있나요? 제가 가면 안 되는 곳인가요?”

라이언이 놀랄 이유는 많았다. 리아는 오라비인 왕과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왜 가려는 건지….”

“따질 게 있어서요.”

라이언은 멍하게 리아를 바라보았다. 따질 게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따질 것이라니?”

“모르세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요?”

“무슨 말이지?”

라이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나만큼이나 당신도 따질 것이 많은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흐음. 당신은 없어요?”

리아는 라이언의 표정을 살피며 그를 떠보듯 물었다. 그깟 칼이 도대체 뭐기에 정략결혼까지 한 걸까?

페넬로페의 말을 들었을 때. 리아는 고민했었다. 사랑한 척 연기를 했다고? 그가?

처음 들었던 것은 의심이었다. 그동안 보여줬던 그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안심이었다.

아니야. 그의 모습은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연기로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진실이었다. 리아는 그를 믿었다.

만약 페넬로페의 말처럼 검이 필요해서 검을 얻기 위해 그저 후계자가 필요한 것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리아는 믿고 싶었다. 아니 믿었다. 그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처음 그의 의도까지 물고 늘어져 따질 생각은 없었다. 괜히 나서서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이러는 것은 그저 심술일 뿐이다.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페넬로페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투정. 그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자책과 불만.

계속 모른척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기회였다. 어차피 왕궁에 가려던 참이었다. 오라비라는 왕을 만나고 싶었던 차에 딱 잘되었다 싶었다.

“따질 게 정말 없나요? 난 있는데. 엄청나게 많은데.”

라이언은 답이 없었다. 리아는 진지한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귀여웠다.

“우리 결혼하면 받기로 한 거 있다면서요. 그거 받으러 가요.”

“뭐, 뭐라고?”

당황한 라이언이 말을 더듬었다.

“아니 왜 주기로 했으면 줘야지 안 주고 딴소리야. 못 참겠네! 정말. 따지러 가요. 제가 대신 받아 줄 테니까 걱정 마요.”

“지금 그게 무슨.”

“자꾸 딴소리할 생각 하지 마요. 다 알았으니까.”

리아가 정략결혼에 관계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분명 심각한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만약 검을 되찾기 위해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하고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의 상상 속에서는 이런 반응은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오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거짓이라고 오해할까 봐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말할 수 없었다.

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과거 자신의 치부까지 다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는 잊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검이 간절하지 않았다. 리아와 함께하게 된 이후로 불면증도 악몽도 모두 사라졌다.

그에게 검이 필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악몽으로 생겨난 불면증.

편하게 잠을 잔 날을 손에 꼽기가 힘들 정도였다. 깨어 있는 삶이란 늘 지옥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검을 찾고 싶었다. 검을 되찾아 없애 버리고 나면 다시는 과거의 악몽도 이마의 흉터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검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라이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따지러 가자고? 진심인가?”

“그럼 지금 제가 장난치는 거겠어요?”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리아의 모습은 전혀 충격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거야. 페넬로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려고 그랬죠.”

“페넬로페의 기대?”

“당신이 나랑 결혼한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막 눈을 빛내잖아요. 내가 충격받기를 바라면서. 그 정도로 기대하는데 조금이라도 충격받은 척은 해야죠.”

“하아….”

“사실 조금 충격받기는 했어요.”

이어지는 리아의 말에 라이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우리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페넬로페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도 당신이 나랑 억지로 결혼을 해서 불쌍하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죠.”

라이언이 재빨리 답했다.

“아니야.”

“억지로 결혼한 거 아니에요?

“그건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니죠?”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까 서로 마찬가지더라고요. 저도 당신과 좋아서 한 결혼이 아니었으니까 뭐 똑같죠. 그걸 가지고 따질 수는 없잖아요.”

라이언은 말이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리아가 라이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 사랑해요?”

“사랑해.”

처음 입 밖으로 꺼낸 고백이었다. 라이언은 리아의 질문에 망설일 틈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그게 진실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어느새 사랑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사랑했다. 리아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녀가 오해하고 아파하고 자신을 미워할까 봐 겁이 날 만큼 사랑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나?”

“물론. 사랑해요.”

리아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당신을 믿는 거예요.”

“날 믿는다고?”

“후계자를 얻기 위해 날 사랑한 척하는 거 아니잖아요.”

“아니야.”

“당신을 믿어요.”

오해하고 의심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모른 척 숨기는 것도 자신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은 라이언을 사랑했고 라이언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쉽게 풀고 싶었다. 진지하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그를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말해 주기를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를 믿으면 모든 것이 별것이 아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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