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21)화 (21/120)

21화. 예법 선생과 있었던 일

“마마의 예법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에바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에일린을 찾아온 건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깔끔한 외양의 여성이었다. 꼿꼿하게 선 자세부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등이 그녀의 깐깐한 성격을 짐작게 했다.

에일린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바 부인을 앞에 두고 계속 생각할 수도 없기에 에일린이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해요.”

에일린을 위한 여러 수업이 진행될 거라 들었지만 예법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에일린도 지금껏 귀족으로 살아왔기에 의아한 마음이었지만 에바 부인에겐 티 내지 않았다.

그사이 에바 부인이 짧게 방을 둘러보더니 에일린에게 말했다.

“전 여기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마마께선 평소대로 생활하시면 됩니다.”

“나를 지켜본다고요?”

“대공비 마마를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그리 말하고 에바 부인은 계속 에일린을 보았다. 왜 가만히 보기만 하는지 몰라 에일린도 에바 부인을 보았다. 서로 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다가 결국 에바 부인이 먼저 돌아섰다.

소파에 앉은 에바 부인은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제인, 나 물 좀 가져다줄래?”

“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고마워.”

“새로 쿠키를 구웠는데 그것도 함께 내올까요?”

“그래? 나도 같이 가……진 못하겠네. 그럼 부탁할게.”

에일린이 제인과 대화를 하던 와중에 힐끗 에바 부인을 보고는 말을 돌렸다. 제인이 나가고 나서 에바 부인과 둘이 남게 된 에일린은 이제 맞나 싶었다.

그녀를 두고 평소대로 생활하라니. 남이 자신을 지켜본다는 게 신경 쓰였고 에바 부인은 존재감이 미미한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쿠키 먹을래요?”

“괜찮습니다.”

혹시나 해서 에일린이 말을 걸자 에바 부인이 단칼에 거절했다.

“목마르진 않아요?”

“괜찮습니다.”

“등에 쿠션을 대겠어요? 그렇게 앉아 있으니 불편해 보여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모든 거절에 에일린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냐고. 그러나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더 권유할 수도 없었다. 에일린은 수업이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생각보다 더 불편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후로도 은근슬쩍 계속 말을 건넸고 칼 같은 거절만 받았다.

몇 시간 후 에바 부인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

해가 저무는 시간. 에일린이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로이드가 보던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장소를 따지지 않고 그의 손에 서류가 들려있다니 그의 하루도 녹록지 않다고 느꼈다.

에일린이 자리에 앉자 로이드가 제 서류를 전부 옆으로 밀어냈다. 다른 이가 서류를 정리해서 들고 나간 후 로이드가 오늘 하루에 대해 물었다.

“어땠어?”

제 앞으로 허브가 섞인 향긋한 요리가 올라오는 걸 보던 에일린이 여상히 대답했다.

“에바 부인과 만났어요.”

“그녀라면 클로에의 예법 선생이기도 해. 예법이라 하면 그녀만 한 사람이 없어.”

그제야 에바 부인의 이름이 익숙했던 게 떠올랐다. 고위 귀족가에서 어린 영애를 가르칠 때 꼭 데려왔으면 하는 선생 중 한 명이었다.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올랐다.

“클로에 아가씨가 에바 부인을 만난 게 몇 살 때죠?”

“8살 정도였던 거 같은데.”

“……어린 영애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데려왔네요.”

“그게 이상해?”

에일린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렇게 귀족스럽지 않았나? 하는 마음에 손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로이드가 에일린을 훑어보았다. 식기를 든 그녀의 모습은 귀족가의 아가씨로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에바 부인은 당신을 이제 막 예법을 가르칠 상대로 여기지 않을 거야. 내가 그녀에게 원한 건 다른 거였거든.”

“그게 뭐죠?”

에바 부인을 부른 게 로이드였고 그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다. 에일린은 그게 뭘지 궁금했다.

“당신은 이제 그냥 귀족이 아니야. 귀족 중에서도 고위 귀족이 되었으니 지금껏 보였던 태도 몇 가지를 고쳐야겠지. 예를 들어 당신의 시중을 드는 고용인에게 습관처럼 고맙다고 말하는 것.”

로이드는 그간 에일린에게서 보았던 모습 중 하나를 언급했다. 에일린이 에바 부인의 앞에서 제인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생각했다. 로이드의 말대로 고맙다는 말을 꺼낸 거 같았다.

“고용인에게 인사하는 게 금기사항은 아니지만 당신은 그 빈도가 잦아. 알고 있지?”

에일린이 이해했다는 듯 제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껏 조용히 시중을 들던 제인이 있었다. 제인은 자신의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무표정하게 있었다.

“인사를 많이 하면 그 무게 역시 줄어드는 법이야. 에바 부인이 그런 부분을 가르쳐줄 거야.”

에일린이 로이드의 말에 생각에 빠졌다. 그의 말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듯했다.

그때 제인이 에일린의 접시에 작게 자른 고기를 올려주었다. 그걸 본 에일린이 제인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제인의 표정이 무너지며 그녀는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껏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에일린이 다시금 인사를 건네온 게 퍽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에일린은 태연하게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여러 번 가볍게 인사한 걸 전부 합하면 한 번 무겁게 인사하는 만큼의 무게가 되지 않을까요? 조약돌을 모으고 모으면 바윗돌 하나만큼의 무게가 나오는 것처럼요.”

로이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건 에일린의 말이 거슬린다는 게 아니라 그녀만의 다른 시각적 해답에서 오는 흥미로움이었다.

“남들 앞에서도 그렇게 인사하겠다는 거야? 그럼 그들은 당신을 만만하게 볼 거야.”

“그래서 작게 말했어요.”

“……뭐?”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작게 말할게요.”

엉뚱한 발상이었다.

로이드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못 말린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풀어진 표정으로 에일린은 제 생각이 먹혔다는 걸 알고 같이 웃었다. 그리고 옆에 조용히 있던 고용인들의 입가도 아주 조금 풀려있었다.

“그래서 오늘 무슨 수업을 들었어?”

로이드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절 계속 지켜봤어요.”

“왜 그랬는진 나중에 말하겠지. 당신을 지켜보고 앞으로의 수업 방향을 정할 수도 있고.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 될 일이야.”

“하지만 엄청 신경 쓰이던걸요?”

에일린의 하지만, 이라는 게 걸린 로이드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면 되는데 뭘 한 건 아니겠지?

“그래서?”

“계속 말 걸었어요.”

에일린이 어떻게 말 걸었는지 그럴 때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왔는지 말하자 가만히 듣던 로이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리겠네.”

난감했을 에바 부인의 표정을 상상하며 로이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에일린이 보통의 아가씨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

원로원에 속한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신 회의 때와 다르게 그들은 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상석 바로 옆에 앉은 로버트 원로가 카랑카랑하게 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결혼은 잘못되었습니다.”

이미 결혼식까지 치렀지만 로버트 원로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대뜸 내뱉었다.

“후계를 낳는다는 약속으로 결혼을 허락하다니 손해입니다.”

한쪽에서 로버트 원로의 말을 듣는 칼릭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로는 대공의 결정에 허락이니 마니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로버트 원로는 아직도 대공을 어리게 보고 있었다.

“거기다 후계라니요. 베타의 몸으로 낳아봐야 베타가 나오겠지요. 이건 아무리 우성 알파라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쯧.”

그는 바로 대공비가 된 여인의 형질을 걸고넘어졌다.

“이제껏 대공가는 우성 알파가 대공이 되었는데 이제 이 일을 어떡할까요.”

지금껏 대공가는 우성 알파가 이끌어왔다. 간혹 우성 알파가 나오지 않을 때 알파가 이끌었지만 그다음엔 꼭 우성이 태어나서 다시 대를 이어갔다.

알파는 모든 것이 뛰어났다. 그들은 타고난 머리와 힘으로 무엇이든 빠르게 익혔고 검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특히나 우성 알파인 로이드 리하스트는 역대 대공들의 능력을 뛰어 넘을거란 평이 자자한 자였다. 그런 자를 키워냈다는 것에 원로들은 뿌듯함을 지울 수 없었는데 흙탕물을 끼얹게 된 것이다.

“형질이 보장되지 않는데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지요.”

로이드 리하스트의 후계자 역시 알파여야 했다. 그게 지금껏 그들이 매사에 부딪히는 로이드를 대공에서 끌어내리지 않은 이유였다. 그들은 직접 대공가를 이끄는 것보다 우성 알파의 형질을 더 우선시했다.

그런데 당장 다음 대가 문제가 되었다. 깐깐한 원로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벌써부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그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알란이 입을 열었다.

“이미 대공비는 결정되었으니 바꿀 수 없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