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대공비로 시작하는 하루
“집무실? 나한테 집무실이 있다고?”
막 스튜를 뜨던 에일린이 놀라서 제인을 보았다. 제인이 상기된 얼굴로 에일린의 근처에 물잔을 두며 말했다.
“식사하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대공 전하께서 마마의 집무실을 만들어주셨어요.”
계속 입이 간지러운 듯 굴더니 이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에일린이 마저 스튜를 먹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원래 나한테도 집무실을 주는 거야?”
“그럼요. 이제 대공비 마마신걸요. 대공가의 살림을 맡아주실 분인데 번듯한 집무실이 있어야지요. 대공 전하께서 하나하나 다 선택하셨다고 해요.”
저택 내 행정관들도 제자리가 있다며 제인이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그렇지만 대공이 에일린을 위해 직접 꾸며줬다는 게 의미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개인적인 공간이 주어질 거라고 생각 못 했던 에일린이 신기한 듯 굴었다. 제 부모님은 따로 일터가 있고 서로의 집을 왕래할 정도로 친한 사람이 없었다.
“내 집무실이라니.”
“거기서 대공비 마마께서도 업무를 보시는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설레지 않아요?”
“나보다 네가 더 설레하는 거 같은데?”
에일린이 과연 대공비로서 얼마나 많은 업무를 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나 제인에게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집무실이 생겼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었다.
“식사 다 하시면 안내할게요.”
“……나 다 먹었어.”
에일린도 궁금해서 금방 식기를 내려놨다. 그래도 부족하게 먹진 않았던 터라 제인이 바로 안내를 위해 앞장섰다.
“마마, 그거 아세요?”
제인이 운을 띄우자 에일린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제인이 말하는 건 전부 솔깃할 만한 것들이었다.
“대대로 대공 내외의 집무실의 위치는 달랐던 거요.”
“달라?”
“네, 다른 건물에 집무실을 두시는 경우도 있고 한 건물 안에서도 층을 달리하기도 한답니다.”
“왜 그렇게 하는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집무실의 위치를 정하는 건 그분들이니까요.”
“그렇구나.”
에일린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제 집무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난?”
에일린의 의사와 상관없이 집무실이 결정되었다. 자신이 마음에 안 들면 아예 멀리 떨어뜨려 놓겠지만 왠지 그럴 거 같진 않았다.
“설마 옆방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에일린의 질문에 제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 보시면 압니다.”
제인이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가면서도 에일린을 힐끔거렸다. 자기 입으로 말해 주고 싶은 마음, 이왕이면 직접 보고 알아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나 보다. 평소 차분한 제인이 저렇게 좋아하니 에일린도 조금씩 기대감이 올라갔다.
“앞으로 이곳이 마마의 집무실입니다.”
에일린이 갈색의 중후한 문을 보다 슬그머니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펼쳐진 하얀 벽 끝에 문 하나가 있었다.
“저곳이 대공님의 집무실이야?”
“네.”
“옆방이라 하기엔 멀구나.”
에일린이 멀리 있는 문을 보았다. 저 안에 로이드가 있다는 말이었다. 아침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그를 찾는 소리에 금방 헤어졌다. 이런 나날이 반복된다면 굳이 한 달의 시간이 있다 할지라도 그와 마주치는 시간은 적겠지?
“문 열겠습니다.”
제인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제 집무실로 관심을 돌렸다.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이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켰다. 집무실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에일린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내 집무실이라고?”
에일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방을 돌아보았다. 널찍한 공간의 한 벽면을 완전히 감싼 책장부터 채광에 반짝이는 고아한 장식품, 그리고 커다란 책상까지 놀라웠다.
에일린이 홀린 듯 책상 앞으로 갔다. 마호가니의 색과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책상은 고풍스러웠다.
“마음에 드세요?”
“응.”
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평생 한 번쯤 자신만을 위한 넓은 일터를 가지고 싶었다. 클라우디아가에서도 연구실이랄 게 없는 장소에서 모든 걸 해결했다.
에일린이 살살 책상을 쓰다듬고 있자니 제인이 슬그머니 벽을 따라 움직였다.
“마마.”
아직 끝이 아닌 듯 제인이 에일린을 불렀다. 그리고 에일린이 돌아보자 또 다른 문을 가리켰다.
“문이 또 있네?”
에일린이 책상을 돌아 나오며 제인이 가리킨 문을 보았다. 넓지 않지만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문은 또 다른 공간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었다.
제인이 문을 열어 주자 에일린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을 보았다. 그리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마마만의 공간으로 꾸밀 수 있게 놔두라고 하셨어요. 여긴 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해요.”
제인의 설명에 에일린이 다시 내부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샹들리에를 제외하면 기본적인 카펫마저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정말 넓게 느껴졌다. 연회를 벌이는 홀과 비슷한 느낌에 에일린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제 구두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울렸다.
“여긴 발코니인가?”
문을 열자 바람이 들어와 에일린이 순간 눈을 감았다. 바람에 익숙해질 때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뜬 에일린이 바깥의 풍경에 감탄했다.
“와.”
5층에서 내려다보는 후원은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웠다. 햇살을 머금은 생명력을 뿜어내는 꽃과 나무 사이에 간간이 놓인 테이블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진짜 예쁘다.”
발코니에 들어서서 난간에 기대 후원을 바라보았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즐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위에서 올려보는 건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선물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에일린이 중얼거렸다. 고아한 분위기의 집무실과 제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공간,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후원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이 방에 내 연구일지를 가져올까? 여기서 실험해도 좋겠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에일린이 턱을 기대고 방을 꾸밀 생각에 즐거운 상상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연구하려고 생각했는데 적당한 장소까지 생겼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던 에일린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제인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나가자.”
당장 방을 꾸미고 싶은 마음에 에일린이 제인을 재촉했다. 제인보다 먼저 가서 문을 열고 나온 에일린이 원래의 제 방으로 걸어갈 때였다. 로이드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에일린이 반사적으로 멈추자 가장 먼저 나오던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로이드는 에일린이 집무실에 다녀온 걸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집무실은 다 돌아본 건가?”
“네, 정말 멋있었어요.”
“마음에 드니 다행이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돌아보면 시간 좀 걸릴 줄 알았다고 말하니 에일린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직 집무실을 전체적으로 훑어본 게 다였다. 하나씩 본다면 좋겠지만 방을 꾸미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가구를 들이려고요.”
“빈방에?”
“네. 그런데 집무실만이 아니라 그렇게 비어 있는 방까지 내어주실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왜? 내가 신기해?”
“네.”
에일린의 순수한 대답에 로이드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속이 투명하게 보이네. 자주 놀러 갈게.”
아침에 로이드가 그랬다. 힘들면 제 집무실로 오라고. 그랬다가 자기가 오겠다고 말을 바꿨는데 그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에일린은 언제든 오라고 대답하면서 로이드의 뒤를 힐끗 보았다.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지 않으셨나요?”
“맞아.”
에일린이 질문하자마자 바로 대답이 나왔다. 로이드의 뒤로 나오려다가 막힌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바라보고 있었다.
“가 보셔야겠어요.”
하지만 로이드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일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찮네.”
“네? 뭐가요?”
“아니야.”
역시 술주정이었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 찾아왔나 싶더니 술 취해 잔 것 때문이란다.
“어서, 어서 가세요.”
에일린이 로이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 어색한 미소로 보내고 있자니 로이드가 마지못해 돌아섰다.
그가 다시 업무를 진행하게 되어 행정관이 반색했다. 그런데 로이드가 몸을 돌려 에일린에게 돌아왔다.
“왜 다시 오세요?”
“그거 안 했잖아.”
에일린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와 뭘 하기로 했더라? 되게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언젠가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알아챘다고 말하기도 전에 로이드가 에일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고해.”
에일린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참으로 정직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어디에 닿아오든 온기를 품고 있어 몸을 데워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