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0화 (93/96)

<외전 20화>

성현은 배 속이 울렁거리는 허기를 느꼈다. 대체 언제쯤 이 허기를 채울 수 있을지.

평생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오만한 그에게 유일하게 결핍의 감정을 일깨우는 존재. 그는 아내의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고도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가난한 방랑객처럼 목마름에 시달렸다.

성현은 목구멍을 조여 오는 익숙한 갈증을 느끼며 낮게 웃었다.

“그래서 선물을 할까 해. 알바생한테.”

“무슨 선물?”

“자기 카페 차리는 게 꿈이라며. 하나 해 주려고.”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성현의 말에 그의 가슴을 짚으며 상체를 뗀 아연이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 기회에 눈엣가시인 알바생을 멀찍이 치워 버리려는 그의 음흉한 속셈은 꿈에도 모르고서.

“그건 그렇고, 선물이 다 망가져 버렸으니 다른 걸로 받을까 하는데…….”

민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묘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짚은 아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끌어가 양심 없는 제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또?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네가 망가뜨린…… 아앗!”

아연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녀를 밀쳐 침대에 눕힌 성현이 아연을 덮쳤다.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성현이 장난기 넘치는 소년처럼 웃었다.

신혼의 단내에 젖은 선물 교환은 동이 튼 후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 *

“축하해요. 임신입니다.”

“……네?”

아연은 한 박자 늦게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

“하, 하지만 전…….”

혼란에 빠져 입을 벙긋거리는 아연의 맞은편에 앉은 의사가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경구피임약의 피임률은 대략 99.7% 수준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피임이 실패할 확률은 0.3%로 굉장히 낮은 확률이지만 이 같은 케이스도 종종 발생해요.”

“…….”

“하루라도 빼먹거나 복약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확률은 조금 더 올라가고요.”

아연의 담당의는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아연 씨 같은 경우엔 생리 주기가 불규칙하고 생리통이 심해서 치료 목적으로 처방이 나가고 있었죠. 피임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놀랐다는 말 정도로는 지금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의사의 말대로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제가 임신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단체로 자신을 속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언젠가 아연이 피임약을 먹는 광경을 목격한 성현은 당장 비뇨기과로 달려가겠다며 난리였었다. 제 불알을 떼어 내고 고자가 되겠다나……. 줄곧 그녀의 질 내에 사정을 하고 배 안을 정액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좋아하던 남자답지 않게 그는 몹시 진지했다.

아연이 치료 목적으로 약을 복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성현은 그녀에게 국내 최고 권위의 산부인과 의사를 연결시켰다.

정기적으로 약을 처방받을 때 외에는 그녀의 담당의인 황 박사를 방문할 이유가 없었지만, 아연이 오늘 간만에 병원을 찾은 것은 휴약기에도 피가 비치지 않아서였다.

“혹시 임신하면 곤란한 상황인가요? 피임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가 다소 섣부른 축하 인사를 한 것 같군요.”

어두운 아연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핀 의사가 목소리 톤을 낮추고 말했다.

“나는 아연 씨의 담당의니까 기탄없이 말해 줘요.”

“……선생님.”

의사와 시선을 맞춘 아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 안이 모래라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그러니까 저는, 마음의 준비를 전혀…….”

꽉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아연이 눈살을 왈칵 찌푸렸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입 안에 꼬박꼬박 피임약을 털어 넣었다. 게다가 저녁 식사 때마다 성현과 와인잔을 부딪치기도 하고, 밤에는 소파에 몸을 겹치고 뒹굴거리며 숱하게 맥주캔을 기울였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피임약을, 피임약을 계속 먹었는데요.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아기한테…….”

무심결에 아기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 흘러나오자마자 심장이 철렁하고 떨어졌다. 고개를 든 아연의 뺨에서 핏기가 왈칵 빠져나갔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진정해요. 지금까지의 역학 연구에서 임신 전 경구피임약 복용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극도로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담당의는 차분한 눈으로 창백하게 굳은 아연에게 시선을 마주쳤다. 괜찮을 거란 말을 듣고 있었지만,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지난달 휴약기에는 정상적인 소퇴성 출혈이 있었으니 아주 초기일 거예요. 아직 태반도 형성되기 전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황 박사는 아연의 뒤에 선 간호사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소변 검사 결과로는 주 수를 알 수 없으니 초음파를 한번 볼까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서 일어난 아연은 넋 빠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불편할 거예요. 긴장 풀어요.”

“……네.”

아연은 멍하게 대답하며 초음파 기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새까만 화면에 알 수 없는 희끗희끗한 게 스치듯이 지나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손을 움직이며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황 박사가 음,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 보이는 게 아기집이에요. 5주 되었네요.”

황 박사의 나긋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가차 없이 때리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연은 수십, 수백 가지의 감정이 혼란하게 뒤섞인 눈으로 말없이 흑백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가 아기집이라는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 * *

성현이 탄 세단이 소리 없이 멈춰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의 유리문 뒤로 아연의 실루엣이 비쳤다.

퇴근길에 카페 앞으로 가 아연을 데리고 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오늘같이 회사에서 바로 퇴근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외근을 나간 경우에도 거기가 어디든 그녀를 데리러 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성현은 대체로 직접 운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김 실장이나 운전기사인 이 대리는 그가 직원들에 대한 깊은 배려심을 가졌다고 좋을 대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순전히 오해였다. 실제로는 그저 퇴근길을 함께하며 아내의 여기저기를 마음껏 주물럭거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성현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계속된 살인적인 스케줄을 우려한 김 실장이 당분간 그가 직접 운전하지 못하도록 이 대리에게 단단히 일러둔 탓이다.

이 대리가 운전석에서 튀어 나가기 무섭게 성현은 직접 뒷좌석 문을 열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완전히 펴고 일어서자 리무진 세단의 커다란 덩치가 무색해 보였다.

오늘은 여기나 저기나 어쩐 일인지, 보통 혼자 문을 열고 나오던 아연 옆에 규영이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주인을 졸졸 쫓는 강아지처럼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한 기색의 규영이 성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운전 주의해서, 잘 부탁드릴게요!”

성현뿐만 아니라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이 대리에게까지 안전 운전을 당부한 규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연을 안쪽에 먼저 태우고 뒤이어 성현이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 문을 닫은 이 대리가 뛰는 듯한 걸음으로 차체 앞을 빙 둘러서 차에 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킨 이 대리는 대시보드의 버튼을 조작해 앞좌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를 올렸다. 공간이 분리되자 조금 편해졌는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던 아연이 천천히 등을 기대었다.

성현은 그런 아연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결혼을 한 후로 신혼집의 집안일을 돌보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성현의 회사 직원을 보게 되는 일도 부쩍 많아졌는데, 여전히 낯을 가리는 그녀였다.

이렇게 내외를 하며 어색해할 때는 아연을 훌쩍 끌어당겨 입술을 물고 혀를 감는 것으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성현은 팔을 뻗어 평소보다 조금 더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바짝 감으며 아연의 숨을 빼앗았다.

“……하아, 그만.”

금세 숨이 차오른 아연이 작게 할딱이며 성현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 대리는 지금 운전하느라 정신없어.”

성현은 고개를 돌려 키스를 피하는 아연의 입술을 득달같이 따라가 잡아 물며 말했다. 때마침 방지턱을 넘어가던 차체가 꿀렁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차체의 움직임을 따라 아연의 몸 또한 작게 퉁겨졌다 내려왔다. 그 모습이 그의 눈엔 마치 제 무릎 위에 앉아서 엉덩이를 흔들 때만큼이나 야하게 보였다.

아연은 제 남편이 무슨 변태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습관처럼 좆이 뻐근해졌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당장 무릎 위에 앉히고 싶었다. 뒷좌석에서 섹스를 해도 모를 만큼 칸막이의 방음 효과가 뛰어나다는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면서 말이다.

물론 아연이 쉽사리 속아 넘어갈 리 없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 대리더러 아무 데나 으슥한 곳에 차 세우고 퇴근이나 하라고 하는 게…….

“그래도, 안 돼.”

조그맣게 대꾸한 아연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냉정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되레 놀란 듯 어깨를 움찔 떤 그녀가 얼굴을 굳혔다.

성현은 말없이 아연을 관찰했다. 평소 주변 눈치 때문에 스킨십을 주저하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이 초조한 기색을 띠며 연거푸 무릎을 쥐었다 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이상하게 굴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지 아연의 고개가 점점 더 창 쪽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아예 고개를 완전히 창밖 쪽으로 돌린 모습이 흡사 그를 향한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귀여워 죽겠는데……. 무슨 일로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에게 아연은 평생에 걸쳐서 풀리지 않는 미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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