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메시지의 발신자, 권유현.
이름 세 글자까지 확인한 성현은 인상을 구겼다.
미국에 있어야 할 놈이 왜 내 집 문을 따고 들어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현은 아연의 몸을 훌쩍 안아 올린 채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누구야?”
“권유현.”
한참 성감의 정점에 올라앉아 있다가 한순간에 모든 자극을 빼앗겨 멍해진 얼굴로 아연이 되물었다.
“……권유현? 한국 들어왔어?”
“우선 방에 들어가 있어.”
성현은 소중히 안아 든 아연을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대로 가운을 낚아채 대충 어깨에 걸쳤다.
“나오지 마.”
섹스의 여운이 고스란히 남은 뺨. 발그레하게 달뜬 아연에게 흘끗 눈길을 준 성현이 침실에 그녀를 남겨 둔 채로 방문을 닫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뒤돌기 무섭게 널찍한 복도 너머로 유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허락도 없이 남의 신혼집 문을 따고 들어온 사람답지 않은 여유로운 얼굴, 더불어 제집인 양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성현을 발견한 유현이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며 당당하게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너 뭐야.”
“1년 만에 보는 동생한테 하는 첫인사가 그게 뭐냐? 이리 와서 진하게 한번 안아 주지?”
고까운 눈길로 쳐다보는 성현을 향해 유현이 두 팔을 벌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성현이 유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해 미국에서였다. 그가 2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직전, 유현은 그와 마찬가지로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미국에 들어왔다. 성현이 지내던 뉴욕의 아파트를 유현이 그대로 들어와 사용하기로 한 탓에 약 일주일 정도는 두 사람의 생활 반경이 겹쳤다.
성현이 귀국한 이후, 유현은 신년이든 명절이든 어떠한 연휴를 막론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한국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그마치 1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권씨 형제의 재회였다.
오랜 공백이 무색하리만치 동생을 쳐다보는 성현의 얼굴에선 반가운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환영 인사는커녕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비밀번호 누가 알려 줬어.”
유현은 범인을 색출하는 강력반 행사라도 되는 양 날카롭게 희번덕거리는 제 형의 눈길을 자연스레 외면했다.
얼굴 뚫어지겠네.
성현을 향해 활짝 벌렸던 팔을 소득 없이 떨어뜨린 유현이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영업 비밀인데.”
유현은 천연덕스럽게 성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금세 거실 중앙으로 걸어가선 어깨에 걸쳐 멘 검은색 더플백을 거실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안에 별로 든 것도 없는 모양인지 털썩 가벼운 소리가 났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성현의 눈썹이 심상치 않게 꿈틀거렸다. 겁 없이 비밀번호를 유출한 사람이 누구일지 가늠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무서우리만치 사납게 번뜩였다.
유현의 미소 띤 입매가 곤혹스럽게 굳어졌다. 협박이나 다름없던 자신의 다그침에 끝내 비밀번호를 털어놓은 비서실의 신입 비서가 떠올랐다. 대쪽 같은 비서실장한테 캐내는 것을 실패한 뒤 그가 공략한 상대였다. 울상을 지은 채 맥없이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죄 없는 비서 하나 잡기 전에 형의 관심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유현은 성현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대뜸 선수를 쳤다.
“신혼집 좋다. 귀찮게 굴 노인네도 없고. 같은 서울 바닥 아래에서 이만큼이나 태송현에서 멀찍이 떨어진 걸 보면 아무래도 명백한 의도가 느껴지는데.”
그의 말대로 신혼집은 태송현은 물론이고 성현의 회사에서도 꽤 거리가 있었다. 태송현 식구들한테조차 보여 주지 않고 그녀를 저만 독점하려는 성현의 속셈이 신혼집 위치를 선택하는 것에 크게 작용한 것이다.
누가 보면 아연의 얼굴이 닳기라도 하는 것처럼 꼭꼭 숨겨 놓고 애지중지 아끼기 좋은 곳.
유현은 제 형의 음흉한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느긋한 눈길로 너른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하의 권성현이 우리 아연 누나를 감싸고도느라 반쯤 돌아 버렸다는 소문이 미국까지 자자하던데, 그게 헛소문은 아닌가 봐?”
놀리듯이 이죽거리는 말에 성현의 낯빛이 한순간에 냉랭하게 변했다.
“우리? 누구 멋대로 아연이가 네 아연이야. 입조심 안 해?”
유현은 슬쩍 한 발자국을 옆으로 옮겨 성현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혀를 쯧 찼다. 보통 소문은 퍼지면서 부풀어지기 마련이라지만 그 소문만큼은 오히려 축소된 듯했다.
반쯤이 아니라 완전히 돌아 버렸네.
“하긴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형이야 옛날부터 꾸준히 돌아 있었는데.”
유현은 늘 자신의 형이 생긴 것만 좀 멀쩡하지 실은 완전히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자란 그의 형제가 많고 많은 인구 중에 오로지 한 여자에게 지나치게 미쳐 있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근데 용케 한아연이 형을 받아 줬단 말이야. 형의 실체를 알고도 결혼해 줄 리는 없을 테고, 끝까지 들키지 말고 잘 속여 먹어 봐.”
“한아연?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성현은 음산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고를 되새겼다. 장난스레 빙글거리던 유현이 한발 늦게 그의 심기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형, 권성현은 대체로 제 장난질이나 실없는 농담에도 무신경하고 권태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세 살 어린 동생의 한낱 어리광이라도 대하듯, 그저 픽 웃고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넓은 아량과 관대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히 무표정해진 성현의 낯에서 유일하게 엿볼 수 있는 감정은 짙고 짙은 소유욕뿐이었다. 유현은 낭패감을 감추고 애써 눈웃음을 쳤다.
제 여자에 관해서라면 인내심의 한계선이 한없이 낮아지는 모양이지? 형제고 뭐고 안 보인다 이건가.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유현은 성현의 기분이 풀어지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아, 형이 ‘우리 아연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며! 별것도 아닌 거에 사람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길래 그냥 이름으로 불렀더니 또 뭐야. 그럼 뭐, 달리 어떻게 부르라고……. 아연 님이라고 불러 줘? 어?”
“부르지 마. 네 입에 올리지 마.”
유현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랑 결혼을 하면 어찌 됐든 다 가족으로 얽히게 되는 건데, 부르지도 말라니.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문 뒤쪽에서 아연이 나타났다.
대립각을 세우고 서 있던 성현과 유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날카롭게 날 선 분위기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성현은 곧장 아연의 모습을 훑듯이 살폈다. 말간 민낯엔 섹스의 여운 따위는 완전히 사라져 맑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살구색 블라우스에 종아리가 살짝 트인 슬랙스를 받쳐 입은 모습은 당장 출근하는 길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단정했다.
거실에 서로 대치하듯 마주 선 남자 둘을 번갈아 바라본 아연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유현아.”
성현의 눈살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섹스를 하던 중에 치솟았던 열감을 다급하게 추스른 아연에게선 묘한 공기가 느껴졌다. 촉촉한 눈망울과 핏기를 머금은 것처럼 붉어진 입술, 물기 어린 목소리까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욱 그를 거슬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권유현을 부르는 다정한 호칭이었다.
안녕, 유현아? 유현아……?
그는 자그마치 20년이 넘게 아연에게 그냥 ‘권성현’이라고 불려 왔다.
아연이 처음으로 그를 ‘성현아’라고 사랑스럽게 불러 주었을 때는, 그야말로 머리털이 삐쭉 설 정도로 흥분했었다. 어찌해 볼 여력도 없이 그대로 아연의 안에서 꼴사납게 싸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대체 권유현은 언제부터 ‘유현아’라고 특별하게 불리고 있었던 거지?
성현은 가늘게 좁힌 눈으로 유현을 응시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이 꼴이었다. 아연이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런 성현의 곁에 붙어 섰다.
시선이 마주치자 성현은 불만스럽게 치뜬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코끝에 스미는 미약처럼 달콤한 아연의 냄새에 같잖은 투기도 온데간데없이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하.”
유현은 황당하단 얼굴로 작게 실소를 흘렸다. 간이며 쓸개고 당장 다 꺼내어 줄 법한 낯간지러운 얼굴의 성현을 발견한 탓이다. 그로서는 난생처음 접하는 제 형의 얼빠진 낯짝이었기에 충격이 상당했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사람을 물어뜯을 듯이 눈을 부라리더니, 제 여자의 앞이랍시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온순해진 꼴이 어이가 없었다.
엉덩이에 꼬리라도 달렸으면 볼만했겠네. 좌우로 정신없이 흔드는 것으로 모자라 흥분에 겨워 바닥을 탁탁 때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뿐이랴. 주둥이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겠지.
“오랜만이다. 한국엔 언제 들어왔어?”
“한 이틀 됐나? 형이 얘기 안 했어? 두 달 전부터 입국 날짜 말해 줬었는데.”
아연이 옆을 흘끗 쳐다보았다. 성현은 자신도 몰랐다는 양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 녀석이 한국에 오든 말든 저와는 하등 상관없다는 무성의한 태도였다.
“저기 태송현에 사는 노인네가 맨날 전화통 붙잡고 바쁜 사람한테 국제전화 걸어서, 형 결혼식에 얼굴 안 비치면 내 앞으로 된 지분을 빼느니 마느니 치사한 협박을 일삼길래. 내가 부케라도 받아야 하나 보다 싶어서 부랴부랴 들어왔지.”
유현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기다란 눈매의 끝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윙크라도 하는 것처럼 찌푸려졌다. 그의 형과는 다른 의미로 몹시 근사한 미소였다.
성현과 유현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아버지, 권윤재의 다부진 골격을 물려받아 언뜻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서늘한 눈매와 깎아 놓은 듯 수려한 콧대, 모양 좋게 휘어진 도톰한 입술까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유현 쪽은 권윤재 부회장의 이목구비에 그의 어머니인 신은애 여사가 지닌 여린 색소를 뿌려 놓은 듯한 이미지였다. 옅은 갈색을 띠는 눈동자는 성현의 새까맣고 짙은 동공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머리카락 색깔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서 들어왔구나.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어. 그래서 말인데, 미국 들어갈 때까지 나 여기서 지내도 되지? 방도 많아 보이는데, 남는 방 하나만 쓸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갈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유현이 느긋하게 거실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벌써 제집인 양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현이 그의 말을 가차 없이 끊으며 끼어들었다.
“뭔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