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96)

<64화>

아아.

왜 하필이면 이런 모습을…….

뺨이 퉁퉁 부은 꼴사나운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얻어맞은 직후보다 볼이 점점 더 부어오르는 바람에 지금은 누가 봐도 어디 가서 뺨을 맞고 돌아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죽했으면 택시에 탔을 때 백미러를 통해 흘끗 쳐다본 기사가 흠칫 놀랐을까.

아연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서 다른 곳으로 갈까.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대놓고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편의점이 있으니까 어쩌면 얼음찜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샤워부터 해야겠다는 소박한 소망은 날아가 버렸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리는데 불현듯 어깨가 붙잡혔다. 시야가 빙글 돌았다.

조급한 손길이 아연의 턱을 감싸고 들어 올렸다. 언제나 흔들림이 없던 강인한 눈동자가 그녀의 뺨과 귓가를 정신없이 살피더니 잘게 떨렸다.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뭐야, 갑자기.”

거의 반쯤 안기다시피한 자세가 신경이 쓰여서 아연은 성현을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다.

“……병원.”

아무리 밀어내도 단단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성현이 낮게 말했다. 목구멍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를 울컥 토해 낸 것처럼 괴로운 목소리였다.

“가. 데려다줄게. 병원까지.”

누구한테 얻어맞아서 이렇게 된 것인지, 성현은 묻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가 뺨을 맞고 돌아올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은 성현의 배려일 테지만, 그게 더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런 모습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지 않는 야속한 그가 얄밉고 원망스러웠다.

나는 대체 어디까지 내 바닥을 네게 드러내야 하는 건지. 대체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하는 건지.

분명 조금 전 택시에서만 해도 몹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허울뿐인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대들었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선언도 했다.

평생 제 몸을 갑갑하게 옥죄고 있던 답답한 껍데기를 깨부수고 탈출한 것처럼 야릇한 해방감마저 느껴졌었다. 앞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바닥이다.

“이거 놔. 우리 서로 이런 이야기 나누는 그런 친근한 사이 아니잖아. 잊었어?”

아연은 어깨를 비틀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성현은 여상하게 대꾸했다.

“운전기사라고 생각해. 말 안 걸 테니까 그냥 병원까지만 가.”

“손 떼. 내 몸에 손대지 마.”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의 힘이 스르륵 풀어졌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화가 벌컥 치솟았다.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 가족과 얽힌 진흙탕 같은 사연을 성현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이런 꼴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본가를 나선 후 병원에 들르고, 약국에서 약을 사고, 택시를 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나, 그때 느꼈던 기분과는 완전히 달랐다.

성현에겐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퇴근길에 버스에서 내려설 때면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히 쓸어 넘기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빌라 입구까지 일부러 더 씩씩하게 걸었다.

그게 다 쓸데없는 짓인지도 모르고.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이럴 땐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고. 어쭙잖은 관심 갖지 말고 내버려 둬.”

아연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차분하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자 성현이 돌아 버리겠다는 듯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떻게 널 내버려 둬!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서 떠나질 않는데! 네가 나한테 화난 거 알아. 화를 내고 때려도 좋으니까…….”

다그치듯 하는 말과는 다르게 절절하게 끓는 눈동자에는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집어삼킬 듯한 새까만 눈에 가슴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그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아연이 말했다.

“너 나한테 창피 주고 싶어서 이래?”

“……뭐?”

“지금 네가 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잖아. 아니면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거야? 너 나 부끄럽게 만들어 놓고 변태처럼 지켜보는 거 좋아했잖아.”

성현이 기가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어째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는 표정이었다.

어찌 됐든 그의 입을 막는 데 성공한 아연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어쩌지? 난 이제 너만 보면 그런 생각뿐인데.”

그녀의 말에 성현은 어울리지 않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틈을 타 그에게서 빠져나간 아연은 뛰는 듯한 걸음으로 빌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연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응시하며 성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거나 꺼지라고 차갑게 쏘아붙일 모습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변태라는 말을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변태 짓은 다 저질러 놓고 정작 변태란 말에 얼이 빠져서는 아연을 붙잡지도 못하고 보내 버린 스스로가 하찮아서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어.

김 실장으로부터 아연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정신없이 달려왔다. 병원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도 물리고 직접 운전해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아연을 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빌라 앞에 서서 아연을 기다리는 동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초조함으로 땅이 파이도록 같은 자리를 전전하며 불안한 개새끼처럼 빌빌거렸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고, 네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철없는 화풀이로 너를 또 한 번 아프게 한 걸 평생을 걸쳐서 갚을 거라고, 제발 내게 기대라고. 하고 싶은 말이 두서없이 입 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멀리서 아연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무질서하게 뒤섞인 모든 생각들은 허무하게 휘발되어 버렸다.

연한 갈색 눈동자에 밴 짙은 피로가 가슴 아팠다. 여리지만 동시에 강한 눈매에 어린 또렷한 총기에 등줄기가 지끈거렸다. 이 와중에도 아연을 욕망하는 스스로가 진절머리가 났다.

“김 실장님.”

성현은 슈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임시 총회가 끝났을 시간이라 그런지 김 실장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기태준 사장 해임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무신경한 얼굴로 들은 성현은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네. 양쪽에 다 붙여 주세요.”

오늘 아연을 만나면 기태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았다고 말하려 했는데, 막상 그녀를 마주친 후에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가족과의 일로 힘들어 보이는 아연의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을뿐더러, 뒤늦게 뒷북이나 치고 다닌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수시로 보고해 주시고요. 네.”

성현은 김 실장과의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아연의 집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이제는 이 자리에서 저 집 창문을 올려다보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매일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아연이 알게 되면 변태가 변태 짓 한다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라도 아연의 흔적을 보지 않으면 숨이 쉬어지지가 않는 것 같았다.

거실 창문에 커튼을 치려고 하는지 아연의 가녀린 실루엣이 어른어른 비쳤다. 가슴이 왈칵 조여들고 척추 부근이 찌르르 울렸다. 당장 달려 올라가 와락 끌어안고만 싶었다.

허공에 쥔 빈주먹만 불끈 쥐었다 편 성현이 허탈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화단의 커다란 나무에서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창문의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성현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늦여름 까만 밤이 하염없이 깊어져 갔다.

* * *

한가한 오후의 카페 안. 아연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추적추적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여름의 끝을 알리듯이 며칠째 지겹도록 이어진 비였다.

“사장님, 내일부터 시작할 신메뉴 마지막으로 점검해 봤는데, 한번 시음해 보세요.”

규영이 다가와 아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 위에 방금 막 제조한 음료를 내려놓던 민재가 아연 쪽으로 밀어 주었다. 달콤한 누가 크림을 얹은 카페라테였다. 우유와 에스프레소 층, 누가 크림 층이 층층이 분리되어 있어 색감이 예뻤다.

“맛있어요. 저번보다 당도를 조절하니까 확실히 누가 향도 더 살아나고 좋은 것 같아요. 고생했어요, 민재 씨.”

“아니에요. 손님들 반응이 좋아야 할 텐데.”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여름도 끝나 가니까. 가을이랑 잘 어울리는 음료라서.”

“아, 그리고 케이크 종류도 몇 가지 바꿔 보려고 하는데 같이 좀 보실래요?”

태블릿에서 케이크 리스트를 보여 주는 민재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데, 카운터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을 했다.

아연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본가 살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연이 독립해서 빌라로 나온 뒤로는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가 조금 의아했다.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시지?

“저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네.”

아연은 민재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운터에서 살짝 비켜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저, 아연 씨? 나 성북동 이모인데,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 모를 불안감이 가슴 아래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니에요.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요새 집에 계속 사모님이 안 계셔서. 나 요즘 주중에만 격일로 나가거든요. 수요일에 출근했을 때 집에 안 계시길래 어디 외출하셨겠지 했는데, 금요일에도 하루 종일 안 보이시고. 어제까지는 며칠 여행 가셨나 보다 하면서 넘겨짚었지.

수요일부터라면 벌써 5일째였다. 손끝에서부터 불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문득 이상하다 싶은 거야. 어디 여행 가실 때는 가시기 전에 나한테 꼭 말해 주고 가셨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씀 없으셨거든.

목구멍이 굳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데, 핸드폰 너머에선 주저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 사모님한테 전화해 봤는데 안 받으시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아연 씨는 이야기 들은 게 있나 해서 전화했어요. 아연 씨? 듣고 있어요? 끊어졌나?

“아, 아녜요. 듣고 있어요.”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있던 아연이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저릿저릿해서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아연은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통화 목록에서 희수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긴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 기계적인 음성에 어째선지 가슴에 쿵 하고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