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태준에게 불려 갔을 아연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그려졌다. 고운 손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쥐고 하얗게 질렸을 얼굴. 충격과 분노, 모멸감으로 일렁거렸을 눈망울.
그러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문 채 버텼을 것이다.
아연이 자신의 가족과 얽힌 것들에 대해 가지는 어두운 속내를 안다. 마치 그게 제 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어깨를 움츠린 채 스스로 그늘 밑으로 걸어 들어가는 작은 발자국을.
늘 그게 안타깝고 신경이 쓰였다.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건 너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 않냐고, 어렸을 때는 눈치도 없이 몇 번인가 아연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연은 갑자기 단단한 등껍질을 빼앗겨 버린 달팽이처럼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눈치가 생겨 갈 즈음부턴 그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는 아연을 존중하는 쪽을 택했다. 쓸데없이 소문을 부풀리고 호기심 어린 눈을 굴리는 한심한 인간들을 청소하는 쪽으로.
그런데 정작 청소가 필요했던 쓰레기가 지척에 있었다니.
제가 없는 곳에서 끔찍한 협박을 견뎌야 했을 아연을 생각하니 이가 갈리고 속이 뒤집어졌다. 성현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날, 나와 그만하자고 말했을 때 너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우릴 다 망쳐 놓은 것 같아.’
‘내가 너무 싫어. 미친 듯이 후회돼.’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자책했을 아연을 떠올리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짓이겨지는 것 같다. 자격도 없는 아픔에 목이 메었다.
네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를 밀어냈을지…….
아무것도 모른 채 위악만 부린 병신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게 증오스러웠다.
할 줄 아는 건 떼쓰고 들러붙는 것밖에 없어서, 그날 그따위 좆같은 짓을 아연에게 저질렀다. 다시는 상종 못 할 개새끼 같은 짓은 다 해 놓고, 여전히 한달음에 달려가 나를 용서해 달라고 아연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지긋지긋하다고, 뻔뻔하다고 욕하겠지. 이런 등신 같은 놈한텐 이제 신물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걸 알면서도 한아연을 갖고 싶어서, 도무지 놓을 수가 없어서 주체할 수 없는 이기심에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성현은 이를 악물고 입술을 짓씹었다. 팔뚝으로 짓누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 *
커다란 대문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아연은 가늘게 찌푸린 눈을 들었다. 독립해서 나간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본가는 1년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목구멍이 좁아 드는 느낌에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화려한 정원을 서둘러 지나쳤다.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서 있던 희수가 아연을 돌아보았다.
“의원님 서재에 계셔. 올라가 봐.”
희수는 2층을 눈짓하며 말했다. 애써 차분하게 굳힌 희수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궁금증이 역력했다.
아연은 그런 희수를 뒤로하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희수가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라도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연 역시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당장 본가로 오라는 강준의 부름에 급하게 달려온 길이었다.
서재 앞에 서서 한 차례 더 숨을 들이마신 아연이 손을 들어 노크했다.
똑똑.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잠시 기다린 다음 아연은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강준은 서재의 가장 안쪽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저 왔어요.”
아연의 기척에도 강준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 잠시 문간에 서서 주저하던 아연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에서 다급히 나오느라 편하게 입고 있던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슬랙스에 헐렁한 티셔츠. 단 한 번도 이런 차림으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어 아연은 약간 어색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책상을 두어 걸음 남기고 멈추어 섰다.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있던 강준이 흘끗 고개를 들더니 가까이 오란 듯이 턱짓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이게 뭔지 설명해 봐라.”
아연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강준은 이제껏 들여다보고 있던 사진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손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민재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 속 아연의 얼굴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주어 꾹 다물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진이었다. 대체 이 사진을 아버지가 왜…….
“이건, 아니에요. 이 사람은 그냥 우리 카페 직원일 뿐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랑 같이 길을 걷던 중에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칠 뻔한 저를 도와주다가…….”
강준이 아연의 말을 끊듯 분노로 파들거리는 주먹을 책상에 쾅 내리쳤다.
“오해는 무슨 오해! 조용히 소꿉장난이나 하다가 곱게 시집이나 가라고 큰돈 들여 카페까지 차려 줬더니, 고작 가게 직원밖에 안 되는 놈이랑 이런 우습지도 않은 사진을 찍혀? 대체 행실을 어떻게 했길래, 다 큰 여자가 남자한테 얼싸안겨서 도움받아야 할 일이 뭐가 있어!”
불순한 의도로 찍힌 사진이었다. 민재와 밀착하게 되는 상황을 유도해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만들어 내려는 의도로.
그녀가 제 부친의 바람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행실 나쁜 여자로 보이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그런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태강그룹 황태자의 꼴을 우습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지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준의 손에 들어간 사진은 그것뿐이라는 점이었다. 악의적인 기사와 함께 있던 성현과의 사진마저 강준이 알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무슨 설명이라도 해 보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풀이라도 붙여 놓은 양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하려면 불가피하게 엮여 있는 성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그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연은 결국 시선을 내리고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이런 사진이 찍혔는지는……. 제가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의 딸이라는 걸 잠시 잊었어요.”
“네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어!”
강준이 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왼쪽 뺨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살갗이 터지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제 얼굴에서 난 소리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연은 강준이 팔을 휘두른 방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깨끗하게 닦인 바닥에 무릎이 세게 부딪혔다. 하지만 뺨의 아픔이 워낙 커서 다른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고로 여자는 몸가짐을 조심히 해야 한다고, 남자라곤 일절 모르는 깨끗한 몸으로 시집가서 남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대체 네 엄마한테서 뭘 배운 거야!”
강준은 제 화를 못 이기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며 바닥에 발을 굴렀다.
아연은 핏줄이 터져 빨개진 눈을 들어 강준을 올려다보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낯선 얼굴 위로 엄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정하고 나긋하게 속삭이던 엄마의 목소리와 목구멍을 긁어내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희수가 경처럼 읊던 혼전순결이니 뭐니 하던 말들이 점점 강준의 목소리로 변해 갔다.
“여자가 헌 몸으로 와서 이 한강준이를 가졌으면, 딸내미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키워 내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강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코앞에 희수라도 서 있는 것처럼 희번덕하게 뜬 눈이 허공을 응시하며 분노와 멸시로 번들거렸다.
“하나같이 반대하는 집안사람들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갖은 고역을 겪어 가면서 너를 내 딸로 입적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네 엄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 네 존재 자체가 내 지위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그것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겠지? 너는 우리 집안의 시한폭탄이야!”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가 와르르 쏟아졌다. 서류 더미는 아연의 어깨를 때리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난폭하게 팔을 휘두른 강준이 억울하단 듯이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퍽 내리쳤다.
“나는 그 막대한 리스크를 감수해 가면서도 너와 네 엄마를 감싸 안는 길을 택했어! 내가 고작 이따위 사진이나 보자고 너한테 돈을 퍼부어 가며 애지중지 키운 줄 알아?”
애지중지 키웠다는 말에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 밑으로 들어간 돈이면 회사 하나를 차리고도 남았을 거다. 곱상한 얼굴 상할까 돈을 처발라서 편히 놀고먹게 키워 줬으니, 이제 곧 제값을 하겠지 했는데. 그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이따위 수준 낮은 사내새끼를 끌어들여? 그럴듯한 집안의 사내놈이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아! 고작 제 밑에 부리는 직원 놈이라니…….”
강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사진 속의 남자를 두고 무슨 상상을 키우고 있는지 실망과 배신감, 울분과 격노로 울긋불긋 열이 오른 낯빛이 갈수록 시퍼레졌다.
아연은 떨리는 손을 들어 뺨 위에 올렸다.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추한 민낯이 낯설기보다는…… 허탈했다.
“오늘 낮에 조현물산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오갔던 혼담을 파기하자더구나. 내 손에 들어온 이 사진이 조현물산 쪽에 굴러 들어가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지!”
강준은 책상 위에 있던 사진을 낚아채 마구 구기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엉망으로 흩어진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아연의 코앞에 들이대며 펄럭거렸다.
“네가 몸가짐을 헤프게 하는 바람에 무산된 사업이 얼마나 큰 건지 알기나 해?”
그때 분노한 강준의 목소리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서재 문간에 희수가 서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과 그릇이 산산이 깨진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희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뜨거운 찻물이 다리에 튀어 그녀의 연약한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느껴지지 않는 듯 희수는 다급하게 걸어왔다. 죄지은 사람처럼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아연에게 다가와 몸을 내렸다.
희수가 아연의 뺨을 감싸 들어 올렸다.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드는 아연의 한쪽 뺨이 눈에 띄게 시뻘겠다. 희수가 눈살을 가늘게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줄 알아? 지금까지 오가던 혼담이 죄 어그러졌어! 다 망쳐 버렸다고!”
짓씹듯 내뱉은 강준의 말에 희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혼담이 깨졌단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희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여자애 얼굴을 이렇게…….”
열이 몰려 얼굴이 검붉게 변한 강준이 격양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당신은 딸자식 간수를 어떻게 한 거야?”
바닥에 나란히 꿇어앉은 모녀 위에 군림하듯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부터 손버릇이 저렇게 지저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준이 다시 손을 높이 쳐드는 순간, 아연이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