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96)

<58화>

아연은 그를 마주친 적도 없는 것처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옆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차마 고개를 돌려 다시 마주할 수가 없어서 앞만 보고 빌라로 향했다.

커다란 바윗덩어리라도 메고 걷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멀쩡하던 무릎이 휘청거리는 것만 같아 아연은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신중하게 걸었다. 자칫하면 앞으로 확 고꾸라질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아…….”

그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고 나서야 아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1층 현관을 슬쩍 돌아보았다. 유리 너머로 그림자가 비치는 기색이 보이면 계단으로 몸을 피해야 하나 생각하며 하나하나 떨어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땡.

도착 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아연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느릿느릿 닫히기 시작했다. 초조함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아연은 맥이 풀린 것처럼 힘없이 벽에 기대어 섰다.

“하, 이사 갈까…….”

* * *

“본부장님. 기태준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십니다.”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비서 이주희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태준이 거침없이 걸어 들어왔다. 사전 약속도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방문이었다.

“성현아,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태준은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제집인 양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잠잠한 눈으로 그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지켜본 성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구나. 저번 주 가족 식사에도 오지 않고.”

“뭐. 보시다시피.”

성현이 성가신 투로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몸으로 때우려 드니까 그렇지.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어. 그런 거 보면 영락없이 네 누나랑 피를 나눈 형제가 맞는 것 같다. 네 누나도 그룹 병원을 운영하면서 활약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앞에 두고 괜한 고집을 부려서 가시밭길을 택하더니, 몇 년 동안 쌩고생하는 것을 좀 봐라.”

성현은 귀찮은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어 주는 데 허비할 시간은 1분도 아까웠다. 그런 성현의 얼굴을 흘끗 살핀 태준이 헛기침을 크흠, 내뱉으며 몸을 고쳐 앉았다.

“아무튼 오늘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일전에 홍콩 출장 때 미처 이뤄지지 못했던 버만사와의 회동 관련해서 말인데…….”

성현의 모양 좋은 눈썹이 꿈틀 구겨졌다.

버만사와의 회동이라면, 지난 홍콩 출장 때 그의 스케줄에 은근슬쩍 끼워져 있던 일정이었다. 태준의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던 유치한 장난질.

애초에 성현은 참석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가 난데없이 하루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태준으로서는 질척거려 볼 겨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던.

“다음 주에 회장 내외와 그 딸이 한국에 들어오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때처럼 무례를 범해서는 안 돼. 비즈니스적으로도 몹시 중요한 자리일 뿐만 아니라, 태송현과도 이미 논의가 된 일이야.”

성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태송현을 앞세우면 납작 엎드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팔짱을 낀 태준은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이쯤 되면 왜 이렇게 날 그쪽이랑 엮어 주지 못해 안달이 나셨는지 순수한 호기심이 드는데, 일이 성사되면 버만에서 지분이라도 챙겨 준답니까?”

삽시간에 태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꽁지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태준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누가 들으면 오해할까 무섭다, 성현아. 나는 그저 가족으로서, 네가 좋은 혼처를 맞았으면 하는 호의에서…….”

가족으로서.

성현의 입매가 굳어졌다. 웃기지도 않는 태준의 헛소리를 듣는 순간,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성현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얼굴색마저 붉어진 태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스러기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던 기억이 짙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며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졸지에 너랑 같이 흙탕물 뒤집어쓰게 될 너희 가족들은…….’

‘난 너네 가족, 무서워. 나랑 결혼하겠다느니, 그런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마.’

하, 씨발…….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삼키는데, 집무실 문 너머로 머뭇거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열린 문 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주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본부장님, 3시에 만나 뵙기로 되어 있는 손님이 아래층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인 성현은 태준을 향해 말했다.

“들으신 것처럼 3시에 선약이 되어 있어서요. 사장님의 야욕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죠.”

“야, 야욕이라니. 성현이 너 말을 이상하게 하는구나. 이 비서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바깥으로 모셔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낸 성현이 비서에게 눈짓했다.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주저하던 태준은 결국 주희의 안내에 따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검붉은 참나무로 된 집무실 문이 닫힌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본부장님, 조현물산 최재호 상무를 모셔 왔습니다.”

김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성현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김 실장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어리둥절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 널따란 집무실 내부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죠.”

김 실장이 중앙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재호는 작게 헛기침을 뱉으며 김 실장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 안은 최소한의 장식과 꼭 필요한 가구만을 갖추고 있어 냉랭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공간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고요한 눈길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흘끗 살핀 재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왜 갑자기 태강그룹 황태자의 부름을 받아 그를 맞대면하게 된 것인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재호는 일주일의 아랍에미리트 출장을 마치고 조금 전 귀국한 길이었다. 인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다가와 자신을 태강그룹 경영전략본부의 김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재호에게 다짜고짜 시간을 내주기를 요구했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대뜸 따라오라니. 황당한 요구였지만 그가 밝힌 태강그룹 경영전략본부라는 직함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태강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태강물산은 해외 시장, 특히 중동 지역에서 조현물산과 사업권을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태강그룹 자체는 국내뿐 아니라 여러 해외 지역 전반에 걸쳐 조현물산의 존폐 자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명백한 갑의 자리에 있는 기업인 까닭이었다.

게다가 태강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는 권성현이라니. 이 만남을 거절했다간 재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무덤을 박차고 나오시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김 실장님이 갑자기 찾아가서 당황스러웠을 텐데,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고 했죠?”

“네. 뭐 조금 놀라기는 했는데, 괜찮습니다. 언젠가 만나 뵙게 되면 이야기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조현물산의 최재호라고 합니다.”

재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을 내밀었다.

공항에서 오는 내내 무슨 일로 자신을 불러낸 것인지 입도 뻥끗하지 않는 비서실장 놈의 딱딱한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데, 그 마음은 삐까뻔쩍한 태강그룹 본사 건물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입매가 헤실헤실 풀어지고 있었다.

마침 회사가 국내 사업 확장을 꾀하던 와중이었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태강과 협력 체계를 구축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재호의 기대감이 잔뜩 고양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를 꼭 붙잡으리라. 재호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빈손을 앞으로 더 쭉 내밀었다.

“…….”

그러나 성현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신경한 눈으로 재호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거 무슨 분위기지? 재호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잘난 낯짝으로만 유명한 줄 알았던 태강그룹의 황태자에게는 쉽사리 말 붙이기 어려운 오만하고 위압적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무거운 분위기에 주눅이 든 재호는 일부러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언론을 통해서나 멀리서 보았을 때는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하게 생겼다고 업신여겼었는데, 실제로 보니 사뭇 느낌이 달라 재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떡 벌어진 어깨며 소파를 꽉 채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을 견디다 못한 재호가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용건이 무어냐고 물으려던 찰나, 성현이 느긋하게 팔을 뻗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서류철을 재호 쪽으로 밀며 말했다.

“확인해 보세요.”

“뭐죠, 이건?”

재호의 물음에 성현은 열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재호는 소파 끄트머리로 엉덩이를 당겨 앉았다. 닫혀 있던 서류철을 여는 손끝이 이유 모를 긴장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요즘 중동 지역에서 조현물산이 꽤나 활약하고 있는 것 같던데, 비결이 뭔지 궁금해서 좀 알아봤습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확인하자마자 재호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서류에는 중동 시장 개척을 위해 사업 초기에 조현물산이 저질렀던 몇 가지 입찰 비리의 경과와 연루자, 증거 계좌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에 거점을 둔 유령회사를 통해 교묘하게 세탁해서 흔적을 모두 지웠다고 철저히 믿고 있던 증거였다.

“대체 이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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