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를 밀어내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멎었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몰려들었다. 젖어 든 눈시울 따위를 들키지 않아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연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일부러 더욱 냉랭하게 말했다.
“너 내 말 못 알아들어? 아니면 내 말이 우스워서 이래?”
“네가 뭐 때문에 망설이는지 알아. 근데 나 그렇게 능력 없는 놈 아냐. 네가 염려하는 일 안 만들어.”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쥔 아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성현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고작 그녀를 갖고 싶은 일시적인 마음에 무엇을 감수하려는 건지도.
“……네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연의 말에 성현이 그녀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아연을 꿰뚫을 것처럼 직시했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 속에서 보았던 광기와 분노, 절망이 깃들었던 그 눈동자가.
“모르는 척하지 마. 회피하지 말고 네 마음이 어떤지 똑바로 봐. 날 안 좋아한다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 말 못 믿겠는데.”
속마음을 모두 까발릴 것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는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연은 고개를 모로 틀었다. 까딱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사람 질리게 하지 말고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성현이 이를 악물었다. 남자다운 건장한 턱이 격정으로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부정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결혼해야 한다고 했지? 나랑 하면 되잖아.”
“…….”
“좆도 모르는 새끼랑은 마지못해서 결혼할 생각까지 하면서 나랑은 하기 싫다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너야말로 지금 억지 부리고 있잖아, 아연아.”
“…….”
“너희 어머니 나 좋아하시잖아. 우리가 이래야 할 이유 없어. 너희 부모님, 내가 설득할게.”
내 엄마가 널 좋아하는 것, 바로 그게 문제라고.
아연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너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지겹도록 붙어 다니면서, 어떻게 된 애가 사고 한 번을 치지를 않는지.’
‘넌 대체 뭐가 문제라서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남자애한테 여자로서 전혀 어필을 못 하는 거니? 내심 기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거야 원. 젊은 혈기에 확 사고라도 쳐서 금테 두른 발목을 확 낚아채 올 줄 알았는데 내가 꿈이 커도 너무 컸지.’
미련이 넘치는 끈적끈적한 시선을 성현에게서 떼지 못하던 희수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걸 멍청히 듣고만 있던 자신이 끔찍했다. 아연은 눈을 질끈 감고 토해 내듯이 말했다.
“시궁창이라며. 너 결혼이 시궁창이라고 했잖아.”
언젠가 성현이 그렇게 말했었다.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렇게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줄 어떻게 알고서…….
“근데 왜 네 손으로 그 진창을 뒤집어쓰려고 해. 왜. 내가 불쌍해서? 부모한테 떠밀려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랑 억지로 결혼해야 한다고 하니까 연민이라도 생겼어? 네 그 잘난 동정심으로 적선하듯 결혼해 주겠다고 하면 나는 넙죽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그래?”
성현에게 쏟아붓는 악다구니가 도리어 제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 왔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데, 성현이 아연의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의 열기가 전염병처럼 번져서, 그와 맞닿은 곳이 불에 데는 것만 같았다.
“이게 어떻게 동정심이야.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냐. 너도 이제 알잖아. 내가 얼마나 성질 좆같은 개새끼인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졸지에 너랑 같이 흙탕물 뒤집어쓰게 될 너희 가족들은…….”
한강 둔치에서 맞았던 미지근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것만 같아 목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퍽퍽하게 마른 목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난 너네 가족, 무서워. 나랑 결혼하겠다느니, 그런 가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마.”
“내가 너 좋다는데, 문제 삼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아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성현아. 그런 골치 아픈 일 감수하면서까지…… 그 정도로, 나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눈에 아연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간절하지 않아.”
쐐기를 박는 아연의 말에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손의 힘이 스르륵 풀어졌다.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얼굴에서 기다란 눈매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가에 결국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난 그냥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은 사람이야. 그런데 넌……. 성현아, 나는 너 감당 못 해. 네가 너무 부담스럽고, 싫어.”
“너한테 아무것도 감당하라고 안 해. 넌 그냥 지금처럼…….”
아연은 다급하게 쏟아 내는 성현의 말을 끊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우릴 다 망쳐 놓은 것 같아. 내가 그때 너를……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내가 너무 싫어. 미친 듯이 후회돼.”
“그렇게, 말하지 마. 나랑 진짜 끝낼 것처럼 그렇게…….”
성현이 고통스러운 숨을 삼켰다. 목소리가 조각조각 끊어졌다. 그가 얼굴을 파묻은 아연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아연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습관처럼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쓰다듬으려던 손길이 간신히 허공에 멈추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은 이내 성현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친구니 뭐니 하면서 서로 기만하는 것도 이제 그만하자.”
“…….”
“나 이제 너 끔찍해. 안 보고 싶어. 다신 내 눈앞에 보이지 마.”
아연은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귀를 찌르는 이명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누워 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귓가에 맴돌던 인기척이 이윽고 점차 멀어졌다.
달칵. 나지막한 문소리가 거짓말처럼 심장을 쿵 때렸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기어이 참아 왔던 눈물이 속절없이 차올랐다. 닦아 내는 것도 귀찮아서 눈꼬리를 타고 흘러 이불을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도무지 풀 엄두가 나지 않던 어려운 숙제를 겨우 끝마친 뒤처럼 막대한 피로가 소나기같이 몰려들었다.
아연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숙제를 하나씩 지워 갔다.
한강 둔치. 기사가 인쇄된 종이. 사진 몇 장.
여전히 사소한 숙제는 남았지만, 조금 전 해치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시작될 거고, 약간은 권태롭고 약간은 지루한, 그러나 조용한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면…….
퓨즈가 나간 전구처럼 아연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아연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커피를 픽업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진동벨을 호출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다가와 커피를 받아 갔다. 칼 같은 정장을 차려입은 것을 보아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카페인을 충전하기 위해 들른 인근 회사의 직원인 듯싶었다.
아연이 한산한 카페 내부를 돌아보며 무심코 한숨을 내쉬는데, 규영이 불쑥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사장님, 우리 카페도 배달 시작해 보는 거 어떨까요?”
“배달요?”
“네. 요새는 앱으로 커피도 엄청 시켜 먹잖아요. 여기 인근 카페는 대부분 다 하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 안 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연은 고민하듯 턱에 손을 댄 채 휑한 카페 내부를 돌아보았다. 규영이 난데없이 배달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해졌다.
성현이 카페에 나타나지 않은 이후로 매출은 지속적인 하향 곡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본부장직을 겸한다면서 바빠진 이후로 카페를 찾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아예 발길을 뚝 끊은 뒤부터는 손님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탓에 괜히 직원들만 사장 눈치를 보는 중인 듯했다.
그날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깊은 상흔 같았던 날. 성현이 떠나고 혼자 남은 집에서 아연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아주 깊고 오래도록.
겨울잠에 빠진 동물처럼 끝없는 잠에 취해 있다가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규영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사장님! 아프시다면서요. 역시 그동안 너무 무리하셔서 그래요. 한여름에 웬 감기예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아무튼 카페는 걱정하지 마시고 이참에 푹 쉬고 나오세요. 아픈 얼굴로 나타나시면 직원 권한으로 쫓아낼 거예요!]
집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했던 시간 동안 성현이 카페에는 아프다는 핑계를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짓을 해 두었다니,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다행스러웠다.
그러고 또 며칠을 잤던 것 같다. 밥을 먹는 것도 귀찮아서 우유나 조금 마시고 말았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속이 쓰려서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연은 다음 날이 카페 여름 신메뉴를 출시하기로 계획했던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재료는 계속 거래해 오던 거래처에서 납품받는 데다 능력 좋은 직원이 두 사람이나 있으니 자신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니 거짓말처럼 출근 시간에 눈이 딱 떠졌다. 그렇게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선보았던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대뜸 만나자길래 일하는 중이라고 거절했더니 다짜고짜 카페에 찾아오겠다는 소릴 해서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재차 난색을 보이자, 겨우 포기하고는 다음을 기약했다.
‘제가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출장이 있어서요. 저번 주에 아연 씨 뵙고 나서 계속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번 주말에 제대로 된 데이트 신청을 해야지 생각했는데, 핑계같이 느껴지시겠지만 출장 준비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연 씨한테 무례를 범했네요. 출장 다녀와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하핫.’
제가 무어라 대답했는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이 정도면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아서 쓸데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