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연을 태운 차가 도착한 곳에는 기와지붕이 으리으리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옥 고택으로 들어선 두 사람 앞에 장지문이 몇 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무슨 식당이 이렇게 비밀스러워.
고풍스러운 내부 인테리어를 살피며 아연은 앞서 걷는 성현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직원이 마지막 장지문을 열었다. 안에는 좌식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뒤의 큰 창을 통해 푸른 정원이 내다보였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김 실장이 미리 전화로 주문해 놓은 모양인지, 메뉴도 묻지 않고 직원이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미닫이문을 스르륵 닫고 나갔다. 성현은 슈트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건 후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의 아연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잘 꾸며진 정원을 내다보는 아연의 차분한 옆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성현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원래라면 산업부 장관이 앉아 있었어야 할 자리였다. 협약식에 장관을 모시고, 그와의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을 회사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애석하게도 성현은 지금 이 상황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장관과의 식사가 날아간 와중에 여자 앞에서 얼빠진 웃음이나 실실 흘리는 제 모습이 굉장히 등신 같아 보이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왜 그동안 아연을 불러내 밥 먹일 생각을 안 했는지. 밀회라도 하는 것처럼 매번 제집으로 불러들여 아연의 옷이나 벗기고 붙어먹기 바빴던 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좀 쓰레기 같아 보이네.
성현은 피식 웃으며 따뜻한 차가 든 찻잔을 아연에게 밀어 주었다.
“마셔.”
아연은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성현이 내민 찻잔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뻗어 가녀린 손아귀에 찻잔을 감싸 쥐었다. 손발이 차가워서 뜨끈뜨끈한 걸 품고 있길 좋아하는 아연의 오랜 습관이었다.
정사가 끝나고 나면 아연은 팔을 내밀어 상대적으로 체온이 높은 성현의 몸을 부둥켜안고 햇살 아래 늘어진 고양이가 그릉거리는 것처럼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곤 했다.
그럴 때면, 어처구니없게도 사정하는 순간보다 더 아찔한 흥분이 그의 온몸을 덮치며 피가 뜨겁게 끓었다.
부드러운 몸을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고, 시답잖은 말이라도 좋으니 밤새 노닥거리면서 이리저리 피하기 바쁜 얼굴에 입술이나 가져다 붙이고 쪽쪽거리고 싶은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아연이 이만 가 보겠다면서 볼일 다 봤다는 양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품에 가득 품었던 장난감을 졸지에 빼앗겨 망연자실한 어린애가 된 것처럼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왜…….”
아연은 찻잔을 감싸 쥔 제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는 성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뜨겁고 단단한 손가락이 얽혀 들어왔다.
“손이 차가워서, 따뜻하게 해 주려고.”
찻잔에서 전해진 온기로 이미 따스하게 데워진 아연의 손에 손깍지를 끼우며 성현이 능청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른 데는 이따가 따뜻하게 데워 주는 걸로 하고, 우선 지금은 손부터.”
엄지로 손등을 쓸며 대수롭지 않게 건네는 성현의 말에 아연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말의 속뜻을 한 박자 늦게 깨우친 아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흘겨 떴다.
정말이지 그놈의 음담패설은 지치지도 않고…….
“웬일로 진지한가 했더니. 대체 네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궁금해? 지금 내 머릿속엔 네가 아래만 벗고 내 위에 올라타서…….”
“아니. 알고 싶지 않아. 설명하지 마.”
“들어 보면 흥미로울 텐데. 내 머릿속에서 너는 꽤 적극적이거든. 뭐, 실제로도 날 벗겨 먹을 때는 굉장히 신이 나서…….”
“설명하지 말라니까.”
한 손을 들어 황급히 귀를 막는데, 장지문이 열리며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연은 몰래 연애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성현에게 잡힌 손을 얼른 떼어 냈다.
얼굴을 붉힌 아연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정원을 구경하는 척하는 사이, 널찍한 상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타락죽과 구절판이 먼저 놓이고 찐 새우와 장어구이가 뒤를 따랐다. 흰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김치의 종류만 네댓 개가 정갈하게 담긴 접시를 각자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널찍한 상이 비좁아 보일 정도의 반찬들이 각자의 자리에 깔리자, 마지막으로 메인임이 분명해 보이는 커다란 돌솥이 들어왔다.
뜨겁게 달궈진 돌솥 안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뽀얀 국물이 퐁퐁 터지는 삼계탕 위에는 송송 썬 부추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복이 먹음직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식사는 솥밥과 잔치 국수가 있는데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직원의 말에 성현이 ‘뭘로 할래?’라고 묻는 표정으로 아연을 보았다. 아연은 거대하게 차려진 상을 질린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많은 음식을 두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직원이 기다리고 있기에 서둘러 대답했다.
“밥으로 주세요.”
직원은 금방 솥밥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와 각자의 앞에 내려 주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성현은 거대한 상 앞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앉아 있는 아연을 향해 말했다.
“뭐 해? 얼른 먹어.”
“……메뉴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아연의 말에 보양식으로 가득 찬 식탁 위를 훑어본 성현이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가 너 이런 거 먹여서 통통하게 찌우고 잡아먹을 것 같아서?”
“…….”
“하여간 한아연, 나보다 더 밝히지.”
“바, 밝히긴 누가.”
“네 기대는 잘 알겠다만, 별로 의도해서 선정한 메뉴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죄다 정력 보충용이긴 하네.”
정말 그런 쪽으로는 생각한 적 없는지 성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아, 한아연. 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서 수치심을 자초해, 자초하기를…….
한정식 메뉴가 다 거기서 거기지. 왜 거기서 메뉴가 노골적이라느니 이상한 헛소리를 내뱉은 건지,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노릇이었다.
머릿속에 음란한 생각이 가득 차다 못해 어디 하나 나사가 풀린 게 틀림없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한다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아연은 부끄러움으로 뜨거워진 낯을 차마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성현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전복을 집어 들더니 아연의 밥그릇 위에 다정하게 얹어 주었다.
“그래도 널 실망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먹고 오늘 힘 좀 더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가 키득거리는 소리에 귓등이 화끈거렸다. 아연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여기서 더 힘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미 지나치거든…….”
“그래. 너야말로 많이 먹고 힘내야지. 사람 달궈 놓고는 맨날 너만 재미 보고 먼저 나가떨어지잖아.”
성현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니면, 힘 나는 것도 먹었는데 색다르게 낮에 한 번 하고 들어갈까?”
아연은 결국 두 손바닥 안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듯 묻어 버리고 말았다.
아연이 카페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사장님, 오셨어요? 늦으셨네요? 얼마나 대단한 걸 드셨길래 식사를 세 시간씩이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 묻는 규영의 물음에 아연은 말문이 턱 막힌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려야 했다. 붉게 물든 귀 끝을 숨길 길이 없었다.
* * *
“여기요! 저희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규영이 발개진 얼굴로 손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직원이 음료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맥주병을 들고 다가오자 아연이 넌지시 말했다.
“꽃갈비살 2인분도 추가해 주세요.”
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벽에 붙은 메뉴판을 힐끔거렸다.
“사장님,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녜요? 고기 아직 남았는데. 돈 너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괜찮아요. 셋이서는 처음 하는 회식인데 이 정도야 뭐. 가격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요.”
“어어, 사장님 그 말 후회하실 텐데.”
아연은 콧등을 찡그리고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규영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세 사람이 함께 일한 이후로 처음 갖는 회식 자리였다.
예전에는 규영과 민재의 근무 시간이 겹치지 않은 터라 시간을 잡기 어려웠고, 카페 마감 후에는 시간이 꽤 늦어지는 탓에 여태 미뤄 왔던 것이다. 오늘만큼은 카페 문을 일찍 닫고 세 사람이 나란히 한우 소고깃집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그 말 참 설레네요. 가격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는 말. 사장님이 남자였다면 사귀자고 했을 것 같아요.”
규영의 말에 아연은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배시시 웃으며 규영은 맥주를 크게 들이켰다.
규영도 아연 못지않게 맥주에 강한 타입이었다. 벌써 몇 병째인지 모를 맥주병들이 테이블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저 잠시 화장실 좀.”
그때 민재가 양해를 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에 비해 술이 약한 민재는 술 한 모금에 물을 한 컵씩 들이켜 대더니 거의 10분에 한 번꼴로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민재가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자 규영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 내고는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사장님. 이런 거 여쭤봐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전부터 너무 궁금했는데 꾹꾹 참았거든요. 근데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죠.”
“뭔데요?”
“그 사장님 친구분이랑은, 무슨 사이예요?”
흔쾌히 뭐든 대답해 줄 기세로 규영에게 상체를 기울였던 아연이 잠시 멈칫하다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무슨 사이긴, 그냥 친구 사이인데.”
저도 모르게 입 안이 탔다. 아연은 맥주잔을 입에 기울여 목을 축였다.
“사귀는 거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