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96)

<33화>

“저번에 그 멍청하게 생긴 직원 놈 보러 오는 손님도 은근히 많다면서. 나 없는 동안 그놈더러 예쁘게 하고 나와서 잘 팔아 보라고 해.”

성현은 상체를 더욱 아연에게 밀착시키며 자신만만하게 속삭였다. 언젠가 그녀가 지나가듯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임을 아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째서 저런 시시콜콜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하여간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뭘 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네 오해야.”

아연이 당황하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진정하라는 듯 성현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아연.”

“…….”

“네가 나 이용해 먹는 거, 난 상관없어.”

“…….”

“그걸로 네가 약간의 부채 의식 같은 걸 느낀다면, 오히려 더 좋고.”

네가 나한테 빚을 좀 졌으면 좋겠어. 가능하면 많이. 평생 가도 다 못 갚을 만큼.

그가 음흉하고 음험한 속내를 달콤하고 야릇하게 속살거렸다.

아연은 당혹감에 벌어진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짙어진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성현은 그 흔한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아연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의 흐름조차 가늠하지 못할 만큼 팽팽하게 맞물려 있던 시선이 불현듯 어긋난 것은 성현이 무표정한 낯으로 고개를 옆으로 튼 후였다.

서로에게 엮인 시선을 그가 먼저 떼어 낸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인지라, 그 장면이 뇌리에 잔상처럼 남아 마음을 할퀴었다. 난데없이 가슴이 뻐근해졌다.

“권성현.”

다시 한번 눈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성현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아연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엘리베이터 문에 어른어른 비추는 것은 음습하고 삐뚤어진 욕구를 어느새 능숙하게 갈무리한 얼굴이었다.

땡.

요란한 알림음과 함께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연은 떠밀리듯 바깥으로 나갔다. 뒤에서 찰싹 달라붙은 커다란 몸에 숨도 못 쉴 만큼 짓눌린 채로 아연은 겨우겨우 걸어 자신의 집 문 앞에 간신히 멈춰 섰다.

이제는 좀 떨어져도 좋으련만 성현은 아연의 정수리에 떡하니 턱을 얹은 채 말없이 그녀의 납작한 아랫배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아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뻗어 도어 록의 키패드를 눌렀다.

키패드에 불이 반짝 들어옴과 동시에 배를 어루만지던 손이 불쑥 올라와 젖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받치듯 감싸 쥐었다.

성현은 손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말캉한 가슴을 제 것처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아연이 문을 여는 것을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연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손을 무시로 일관하며 왼손을 비스듬히 기울여 비밀번호 누르는 손을 본능적으로 가렸다. 그런 아연을 발견한 성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뭘 가려. 내가 훔쳐보고 밤에 쳐들어가서 야한 짓거리라도 할까 봐 겁나?”

“널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 의심이라면 진작 했었어야지.”

“뭐?”

“처음 데려다준 날 다 봤고 벌써 외웠거든.”

“……진짜야?”

“그리고 너 비밀번호 진짜 한결같은 거 쓴다. 온갖 비번 다 똑같은 걸로 돌려쓰면 어쩌라는 거야. 하여간 한아연답다.”

아연은 제 등에 달라붙어 있던 성현을 멀찍이 떼어 내며 눈을 흘겼다. 그가 짓궂은 얼굴로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네가 이렇게 허술한데, 이러고도 내가 널 혼자 돌아가게 내버려 둘 수 있겠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내가 허술한 게 아니라 네가 음흉한 거지. 남이 비밀번호 누르는 걸 왜 몰래 지켜봐, 지켜보길!”

“양옆만 열심히 가리면 뭐 해. 위는 안 가리는데. 널 위에서 내려다보는 내 눈에 훤히 보일 수밖에 없잖아. 이건 뭐, 구멍 속에 제 머리만 집어넣으면 남들이 자길 못 볼 거라고 믿는 토끼도 아니고.”

“지금 나더러 머리 나쁜 짐승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마음 같아선 안까지 쳐들어가서 너 무사히 씻고 침대 안에 들어가 눕는 것까지 보고 가고 싶은데 예의상 참는 거야.”

성현은 새된 눈으로 그를 흘겨보는 아연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키패드 위의 숫자를 따박따박 눌렀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여유로운 속도로 여덟 자리 숫자를 모두 누르자 삐리릭, 아연을 놀리듯이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도어 록이 해제되었다.

“숙녀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단정한 얼굴에 걸린 질 나쁜 미소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기가 막혀서 멍하니 벌어진 아연의 입술에 성현이 기습적으로 다가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을 짧게 빨아 당기고 멀어진 그가 거짓말처럼 표정을 바꾸었다.

언제 짓궂게 굴었냐는 양 성현은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 상냥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아연에게 이만 들어가 보란 듯이 태연히 눈짓했다.

아연은 어쩐지 말려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으로 성현에게 등이 떠밀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고 몸을 돌리자, 정확히 문밖에 발을 디디고 서 있던 성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연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입술이 빨고 도망갔던 자리를 엄지로 스윽 어루만진다.

잘 자, 한아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그가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아연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성현의 손가락이 스치는 곳마다 솜털이 와르르 곤두섰다. 아연은 그저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머리칼을 스치는 감각이 홀연히 사라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문 바로 밖에서 복도 쪽으로 멀어지는 기척이 전해졌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는 성현의 걸음걸이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아연은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 * *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외관의 검은색 세단이 용인 톨게이트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김 실장이 태블릿 안의 문서를 확인한 후 몸을 돌려 뒷좌석을 향해 공손히 건넸다.

“본부장님, 오전에 있었던 협약식 배포용 자료입니다. 홍보실에서 최종적으로 올라온 안으로, 본부장님 컨펌 후 각 언론사로 배포될 예정입니다.”

권민환 회장이 쓰러진 직후 성현은 태강전자의 경영전략본부 본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회장의 일신상의 이슈를 위기로 인식하여 그룹 내부적으로 감행된 갑작스러운 인사 결정이었다. 물론 이에는 권민환 회장 본인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자는 태강이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회사로서 그 위용을 떨칠 수 있게 한 사업체로, 산술적으로 보더라도 태강그룹 전체 시가 총액의 3분의 2 가까이에 육박하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다.

그만큼 권민환 회장의 애정이 깊어, 권 회장은 전자의 인사권에 유독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비워 둔 것처럼 최근 몇 달간 공석으로 두었던 경영전략본부 본부장 자리에 성현의 이름이 박히자, 항간에는 권민환 회장이 그를 후계자로 공표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사진은 다른 걸로 바꿨으면 하는데.”

김 실장에게서 태블릿을 건네받아 배포용 기사 내용을 확인하던 성현이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김 실장이 몸을 틀어 태블릿 안의 사진을 흘끗 쳐다보았다.

오전에 용인 공장에서 있었던 상생 협력 협약식에서 정부 측 참석 인사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성현이 악수를 나누는 사진이었다. 본래는 권윤재 부회장이 의전했어야 할 자리였지만, 근래에는 성현이 그를 대신하는 일이 잦았고 정부 측에서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 홍보실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선택하긴 했을 텐데…….”

김 실장이 난감하단 듯이 말끝을 줄였다. 사진은 그룹 홍보실의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진의 포커스가 철저히 성현에게 맞춰져 있었고, 산업부 장관의 존재감은 몹시 흐릿하여 얼핏 봐서는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다지 웃는 법이 없는 성현이 입꼬리를 당겨 올리고 눈부시게 미소 짓는, 그야말로 귀하디귀한 사진이었다.

김 실장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숨 막히는 정적에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성현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태블릿을 회수했다. 그리고 긴장한 손끝으로 백업된 사진을 찾아냈다.

더듬거리며 폴더를 여는 사이, 얼마 전 기업 이미지 광고 시안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 김 실장의 뇌리를 스쳤다.

결정권자로 참석했던 임원들 중 나이만 지긋하지 눈치는 없는 이가 회의가 끝나 갈 무렵 농담이랍시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시안에 높은 비용을 퍼붓고 공들이는 것보다는 우리 태강그룹의 황태자인 성현을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는 게 더 좋은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느냐고.

제 말이 꽤 재치 있었다는 양 껄껄 웃는 웃음소리를 끝으로 회의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성현은 그 흔한 실소조차 머금지 않은 완벽한 무표정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아버지뻘 나이의 임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인이 실언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남자가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회의실의 다른 모든 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그 후로 누구도 공공연한 자리에서 성현의 황홀한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재계에 데뷔하여 언론에 얼굴이 노출된 이후 태강그룹의 주가가 나날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웃지 못할 사실 또한 부정할 순 없었다.

“본부장님, 후보군 사진은 여기 있습니다.”

성현이 다시 태블릿을 받아 들고 후보 사진 중 산업부 장관에게 적당히 집중된 사진을 최종적으로 낙점하고 기사에 싣도록 지시했다.

김 실장은 컨펌된 사항을 홍보실에 전송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지시하셨던 기사 추적 건 관련해서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새롭게 게시될 예정인 기사가 사전에 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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