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넌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성현이 낮게 읊조린다. 아연은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만큼은 나도 동의해. 요즘 들어 아무래도 내가 널 잘못 봤다는 생각을 많이 하니까.”
- 날 어떻게 봤는데.
“그야, 성질머리는 좀 더럽고 무뚝뚝해도, 기본적으로는 친구를 존중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춘 인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 맞게 봤네.
성현은 태연하게 응수했다. 성질이 더럽다는 말마저도 기껍다는 듯 옅게 웃음기가 밴 목소리가 어쩐지 달콤하기까지 했다.
“존중할 줄 아는 인간이……! 사람 말하는 건 귓등으로 흘리고 저 하고 싶은 대로만. 네가 날 존중한다면 그럴 수가 없지.”
- 그건 네 섹스 취향을 존중해서 그러는 거고. 내가 발정 난 개새끼처럼 거칠게 굴수록 넌 말도 못 하게 더 흥분해서는 아래를 귀엽게 적시니까.
아연은 그저 말문이 막혀서 얼빠진 얼굴로 어버버 말을 흐렸다. 누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곧장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변태가 따로 없었다.
찬찬히 돌이켜 보면, 성현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짐승처럼 굴 때마다 버겁기는 했을지언정 끝내는 덩달아 몸이 달아올랐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하나, 말뜻의 진실성을 떠나 말본새 자체가 몹시도 천박하고 저속해서 무조건 반박부터 해 보자는 심정인 것이다.
그런데 대화의 방향이 왜 이리 갑자기 망측한 쪽으로 흐르게 된 건지.
“네 입이 그렇게 지저분한 말을 좋아한다는 걸 그동안 미처 몰랐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너랑 대화하다 보면 매번 이렇게 돼 버려서 이젠 내 귀까지 더러워지는 것 같아.”
- 적어도 이번엔 네가 먼저 시작했다는 자각은 없어?
그랬나?
부드럽고 다정한 되물음에 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간 대화를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신이 온통 어지러워서 도무지 파악이 불가했다.
성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빙글빙글 휘말리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그러다 결국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나 끄덕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하여간 발랑 까진 게 누군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 순진한 날 타락시킨 게 대체 누군지.
거의 세뇌 수준으로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이라 이제는 반박할 의지조차 흐려진 지 오래였다. 아연은 체념한 듯 불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있잖아.”
성현은 ‘책임’이라는 말에 굉장히 흡족한 듯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낮게 웃었다.
드디어 포만감을 느낀 맹수처럼 돌연 온순해진 기색. 덩치가 집채만 한 날짐승이 늘어지게 드러누워 고롱거리는 그림 따위가 그려졌다.
무릎 위의 카탈로그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아연은 소파에 가로누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그가 어디론가 방을 옮기고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 내 방으로 옮겼어. 아깐 서재였거든.
아연이 궁금해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그가 대수롭지 않게 제 현재 위치를 설명했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더욱 잠겨 든 것을 보면, 그 또한 소파에 드러누운 아연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기대 누운 듯했다.
“아아.”
- 좀 곤란해서.
“뭐가?”
- 아버지 서재에서 발기해서 앉아 있기엔, 아무리 나라도 좀 찝찝하거든.
말투가 너무 다정하고 평이해서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릴 뻔했다.
기껏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한다는 소리가 저딴 음란한…….
그 흉측하기 짝이 없는 물건의 안부 따윈 물은 적도 없었다. 졸지에 굳이 알고 싶지 않은 현황을 들었을뿐더러, 익숙하게 그 모양새가 눈앞에 생생히 상상되기까지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십 번도 더 관찰하고 만지고 신나게 훑어 내리기까지 했으니, 눈앞에 그 굴곡마저 고스란히 그려지는 게 당연…….
아연이 끙 하고 침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 놓고 대체 누가 누굴 타락시켰다고 우기는 건지. 권성현이야말로 저를 음탕한 나락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었다.
“대, 대체 어떤 지점에서, 그게 왜.”
아연은 손바닥으로 감은 눈을 턱 가리고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정작 발기한 사람은 태연한데, 어째서 제가 더 당황해서는 말까지 더듬어야 하는 건지.
이해는 안 되지만 권성현과 뒹군 이후 이해의 영역을 넘어간 게 워낙 많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네 섹스 취향을 논할 때부터.
은근슬쩍 논한다는 표현을 얹었지만 결국,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 혼자 세웠다는 소리였다.
“때와 장소도 분간 못 하는 네 몸의 생리적 현상에 날 끼워 넣으려 하지 마. 일상적인 대화 중에 혼자 흥분해서 섰……, 그렇게 됐다는 게 꼴사나워서, 어떻게든 날 거기 엮어 보려는 시도는 알겠다만.”
- 네 목소리 듣는 순간부터 좆이 뻐근해지는 걸 점잖게 잘 참고 있었는데, 네가 음란한 소릴 해 대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참아.
음란한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다 했으면서 뻔뻔한 책임 전가는 무엇이며,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발기가 시작되었다는 고백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말투만큼은 사랑 고백이라도 하듯 달콤하고 나긋해 더욱 황당함을 더했다.
- 네가 날 책임진다는 부분에선 거의 쌀 뻔했고.
아연은 이제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날이 상스러워지는 성현의 언사는 그렇다 치고, ‘쌀 뻔했다’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싸는 장면을 떠올리는 자신도 만만치 않은, 심각한 변태라는 깨달음으로 원래도 하얀 아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 안 되겠다. 갈게.
망연자실 앉아 있던 아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성현이 통보하듯 던지는 말은 단정하고 차분하기만 한데, 어쩐지 급박함이 느껴졌다.
“뭐, 뭐라고? 가다니? 어딜?”
- 어디겠어. 집이지. 30분 후에 올라와.
30분이라니.
그의 본가인 태송현에서 청담동 빌라까지의 거리를 30분 만에 주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가에서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나와 차에 올라탄 후, 몇 개 정도의 과속 카메라는 무시하고 가열차게 액셀을 밟아야 가능했다.
물론 성현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슬그머니 피어올랐지만, 아연은 얼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고 물었다.
“지금? 오늘 거기에서 자는 거 아니었어?”
- 이 상태론 못 자.
“못 잘 건 또 뭐야. 자면 자는 거지.”
- 불쌍하지도 않아? 혼자 좆 붙잡고 흔들다가 허공에 대고 싸는 거 꼴사납잖아. 내가 꼴사나워졌으면 좋겠어?
“혼자 잘만 하잖아.”
실제로 두어 번은 아연을 눕혀 놓고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며 그녀의 앞에서 스스로 기둥을 움켜쥐고 자위한 적도 있던 성현이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짐승 같은 정력 때문에 몇 번이고 이어진 정사 후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아연이 백기를 들며 나가떨어진 까닭이었다.
- 그건 네가 관객이었으니까. 자위하는 거 구경하다가 꼴려서 결국은 못 참겠다는 듯이 네가 다시 달려들었고.
아연은 어이가 없어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꼴렸다는 거야, 이 변태가…….”
- 그 변태한테 자진해서 올라탄 것도 너야.
마치 변태란 말이 칭찬이라도 된다는 양 기꺼운 반응이었다.
- 처음엔 내 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서는 허둥거리던 게, 이젠 알아서 허리까지 흔들면서 날 잡아먹는 걸 보면 귀여워서 돌아 버릴 것 같아. 알아?
속삭이듯 잦아드는 말꼬리에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그의 말투에는 아연을 놀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남에게서 귀엽다는 평을 듣는 건 생전 처음인데, 하필 그게 그의 위에서 어색한 몸짓으로 끙끙거릴 때의 모습이라니.
알아서 허리를 흔든다는 성현의 말과는 달리, 여전히 그 자세가 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그가 아래에서 위로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에 맞춰 그의 목을 끌어안고 흔들리기 바쁜 아연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집요한 눈으로 저를 관찰한다 싶더라니.
침대 위에서 벌어진 일을 가지고 와서 사람을 이렇게 놀릴 줄이야. 물론 침대 위에서만 벌어졌던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머릿속에 와르르 쏟아지는 음탕한 기억들을 애써 외면하며 아연은 새침하게 반박했다.
“내가 자진해서 올라탄 기억도 없을뿐더러, 사람을 제멋대로 들었다 놨다 아무 데나 내려놓는 건 바로 너잖아.”
- 아무 데나라니, 정확히 내 좆 위에 내려놓았는데. 그럴 때마다 넌 당연하다는 듯이 다리를 벌려서 그걸 삼켰고. 잊었어?
“하아, 네가 그렇게 상스럽게 말할 때마다 머리가 다 아파.”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아연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느껴졌다.
-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뭐가 상스럽다는 건지. 나랑 더한 짓도 잔뜩 해 놓고. 설마, 부끄러워?
“…….”
- 새삼스럽기는. 네가 갑자기 이렇게 부끄러워하면, 난 그게 그렇게 꼴리더라.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야릇하게 귓등을 할퀴었다. 목덜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설 정도로 야한 목소리. 아연은 입술 끝을 꾸욱 깨물었다.
전화기 너머 거칠게 갈라진 숨결이 그 역시 몹시 흥분했음을 여지없이 전달해 주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가슴 언저리가 부풀어 올랐다.
그가 눈앞에 있었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정신없이 입술을 겹쳤으리라.
도무지 이런 강렬한 욕구에는 면역이 없었다. 아연은 그저 무력하게, 턱 끝까지 차오른 더운 숨을 색색 내쉴 뿐이었다.
- 30분이야. 이따 봐.
아연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양, 전화가 대뜸 끊어졌다. 아연은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5분 정도 떠든 것 같은데 핸드폰 화면에 찍힌 시간은 한 시간에 가까운 숫자였다. 대화를 돌이켜 보면 온갖 시답잖고 지저분한 음담패설뿐이었는데, 그걸 한 시간씩이나 주고받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화면에 찍힌 통화 시간을 응시하던 아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달아오른 얼굴에 끼얹어 세수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흥건한 두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울 속에서 혼란과 설렘이 뒤섞여 일렁이는 자신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연은 작게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해.
이미 발도 뺄 수 없을 만큼 모조리 휘말리고 나서야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