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96)

<28화>

달칵. 문이 열리고 어둑한 방 안에 복도에서 들이치는 조명이 만들어 낸 빛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선 성현은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창밖의 달빛이 새어 들어와 어스름한 방 안을 스윽 둘러본 성현이 액자 여러 개가 걸린 벽 앞에 섰다.

지연이 개원하는 날, 어디까지나 그들 기준에서 아담한 병원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과 권씨 집안 사 남매의 졸업식 사진을 지나 한 사진을 찾아낸 성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유치원 학예회 날,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무대에서의 사진.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울고 있는 어린 남자애의 얼굴은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아이의 뺨에 쭉 내민 입술을 가져다 붙인 심드렁한 표정의 어린 한아연은 심각하게 귀여웠다.

시끄럽기나 하고 정신머리를 쏙 빨아 가는 어린애들의 존재라면 질색부터 하고 보는 성현으로서는 보기 드문 감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아연에 관해선 무엇이든 예외부터 두고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우리 본가엔 아직도 너랑 내가 입술 비비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사실 꽤 오랜 시간 동안 존재조차 잊고 살던 사진이었다. 어째서 자자고 꼬시는 와중에 이 희미한 기억 속의 사진 하나가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툭 던진 것처럼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을 떠올린 이후론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덕분에 꽤 오래간만에 아버지, 윤재의 서재에 발을 들인 성현이었다. 사진 속 우는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어린 아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 자란 그는 어린애처럼 키득거렸다.

사진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한아연에게 이 사진을 장난처럼 언급한 제가 꽤 짓궂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이것 또한 한아연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순진한 한아연이 굉장히 대단하게 여기는 그들의 과거와 관련된.

액자에서 시선을 떼어 낸 성현은 창가에 놓인 커다란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 한편엔 나무로 된 고급스러운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잠시 가만히 응시하던 성현이 케이스를 열었다.

한때 대단한 애연가였던 윤재는 주변의 성화로, 정확히는 은애의 엄숙한 경고에 따라 어렵사리 담배를 끊었지만, 이따금 보상처럼 시가를 피우는 아이러니한 취미를 만들었다. 그마저도 은애의 감시 아래 피울 수 있는 개수가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다시 말해, 이 안에서 시가 한 개를 슬쩍하면 그만큼 윤재가 피울 수 있는 시가의 개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일 테지만 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케이스 안에서 시가 하나를 빼 들었다. 옆에 놓인 H 문양이 새겨진 재떨이를 함께 들고 테라스로 나간 그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시가에 불을 붙였다.

제 것인 양 시가를 입에 문 성현은 깊게 빨아들인 후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어둑한 밤하늘, 미지근한 공기로 희뿌연 시가 연기가 섞여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시가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던 성현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의 담배를 훔쳐 피운 게 얼마 만인지. 자연스럽게 과거 속 기행의 공범을 떠올리는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날의 한아연은 사진에서의 어린 꼬맹이만큼이나 심각하게 귀여웠다.

저와 함께 아버지의 방에 숨어들었을 때부터 순진한 얼굴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미적거리는 등을 떠밀자, 밀지 말라고 신경질을 부리던 귀여운 몸짓.

담배를 빨아들이는 제 입술을 한껏 긴장한 채로 침을 꼴깍 삼키며 뚫어지게 바라보던 얼빠진 표정.

불붙인 담배를 내밀었을 때 머뭇거리다가 서서히 벌어지던 붉은 입술. 그 위에 제가 머금었던 담배 필터가 닿자 움찔거리던 입술의 움직임. 그 짜릿한 감각.

나쁜 짓을 공유했다는 이상한 연대감과 순진하기만 한 한아연을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유치한 가학성.

“후우.”

성현은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하며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희미해지는 연기 사이로 그날의 기억이 그려진다.

떨리는 손끝.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뜨끈하게 열이 오르던 귓가.

그는 그날, 한아연과 키스하고 싶었다.

제가 빨았던 담배를 그녀가 빨았던 것처럼, 그 붉은 입술을 정신없이 빨고 싶었다. 그가 무심코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떨어뜨렸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손가락을 벌려 아연의 머리카락 안으로 집어넣고 뒷덜미를 잡아 제 쪽으로 당기고 싶었다. 동그란 머리통을 움켜잡고 막무가내로 입술을 부딪치고 싶었다.

입술의 감촉은 어떨까. 혀를 집어넣으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혀를 뿌리까지 감아올리고 세게 빨아들이면, 어떤 소리를 낼까.

넌 나를 밀어낼까. 아니면 끌어당길까.

갑자기 들려온 윤재의 호통 소리가 아니었다면, 성현은 그대로 아연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윤재의 등장에 아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털썩 주저앉은 순간 성현이 느꼈던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몰래 담배를 훔쳐 피운 것을 들켰을 때 응당 가져야 할 두려움, 근심, 걱정 따위는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담배를 떨어뜨렸던 허벅지에 남은 화상 자국이 점차 희미해질 때까지, 그것을 볼 때마다 제 눈앞에서 천천히 벌어지던 아연의 입술을 수없이 떠올렸었다.

“멍청하네.”

성현은 입술 끝에 시가를 가져다 붙인 채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며 제 입장에 치중해 약간 왜곡되었을지 모를 광경을 다시금 떠올린다.

마치 아연이 일부러 보란 듯이 느릿하게 입술을 벌리기라도 했다는 양 발랑 까진 해석을 더하고, 입술 안쪽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던 선홍빛 혀는 그저 그 존재만으로 그를 유혹했다는 듯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며.

그에게는 그렇게 다소 퇴폐적으로 각색된 기억을 남긴 그날이 한아연에게는 아마도 ‘죄책감’이란 감정을 새기는 날이었겠지.

늘 아연에게 자상하던 윤재가 처음으로 호통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꽤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동안 종종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던 것과는 달리 그날 이후 아연은 그의 본가에 발길을 끊었다.

이유를 물으면 시답잖은 변명이나 둘러대곤 했는데, 그때마다 허옇게 질리는 얼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 한들 까마득한 과거의 일일 뿐인데.

더군다나 그때 윤재가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은 온전히 성현을 향한 것이었다. 아연을 향한 분노는 한 톨만큼도 없었다. 누가 봐도 제 아들이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아연을 꼬여내 질 나쁜 짓을 하게 만든 게 분명해 보이는 그림이었으니까.

그날 아연이 집에 돌아간 후 성현은 아버지의 서재 한가운데에 엎드린 채 윤재에게 엉덩이를 맞았다. 아버지가 휘둘렀던 게 골프채였던가? 그가 집어 들었던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 건, 맞는 와중에도 정신은 완전히 딴 데 팔려 있었던 까닭이다.

긴장해서 몰아쉬던 밭은 숨소리. 크게 깜빡거리던 풍성한 속눈썹. 담배 연기를 마신 후 콜록거린 탓에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 겁먹은 눈망울.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엉덩이에 불같은 충격이 떨어져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더 열 받는 바람에 몇 대 더 얻어맞았더랬지.

그러게 아버지는 제게 화가 났으면 저한테만 화를 내면 될 일이지, 왜 한아연 앞에서 펄펄 뛰어서는 오해를 사, 오해를. 그렇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면서.

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제 부친의 무뚝뚝한 외모에 탓을 돌리고선 시가를 깊게 빨아들였다.

일부 언론이나 커뮤니티에서 성현은 재벌만 하기에는 아까운 얼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태초에 그에게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를 고스란히 물려준 이가 바로 그의 부친, 윤재였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저와 일맥상통하는 분위기를 가진 아버지의 얼굴을 두고 그저 험악하게 생겼다고 일축한 성현은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얼굴로 테라스의 난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깊숙이 묻혀 있던 기억을 파헤치고 나니 엉켜 있던 실마리가 연쇄적으로 풀린 것처럼 생각이 이어졌다.

아마도 그즈음이었다. 그가 몽정을 한 것이.

그 입술. 겨우 그 입술에서 시작된 혼자만의 지저분한 시나리오.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간 봉인돼 있던 더러운 욕정이 갑작스럽게 잠금쇠가 풀려 버린 양 미친 듯이 날뛰었고, 제 스스로의 천박한 면모를 때늦게 마주하게 된 그는 몹시 당혹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저를 상대로 얼마나 상스러운 상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고 말갛고 순진하기만 한 아연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성현은 그야말로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삽질도 가지가지 했네.”

자조적으로 피식 웃으며 반쯤 피우다 만 시가를 주저 없이 비벼 끈 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 *

벌컥, 냉장고 문을 연 아연이 망설임 없이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샤워하기 전 냉동칸에 옮겨 둔 맥주 캔의 외부는 그녀가 딱 좋아하는 온도로 식어 있었다.

아연은 맥주 캔의 입구를 따며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여름에도 뜨거운 물 샤워를 선호하는 그녀의 뺨은 욕실 안의 온기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치익. 기분 좋은 탄산 소리를 내는 맥주를 입 안 가득 삼키자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온종일 카페 안을 종종거리며 뒤집어쓴 먼지도 따뜻한 물에 깨끗하게 씻어 내고, 차게 식힌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와중에 웬 한숨이람.

자조를 삼키며 아연은 소파에 등을 툭 기대었다.

며칠 만에 갖는 혼자만의 여유인지 모른다. 성현에게 그 황당한 제안을 받고, 말투만 자상하게 꾸민 반쯤은 협박에 가까운 유혹에 기가 막혀 했던 것도 벌써 일주일 남짓이 지났다.

그의 담백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빌리자면, ‘섹스라는 재미가 더해진 친구 사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개소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보기 좋게 휘말려 버렸다.

보기 좋다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성현의 입장에서나 보기 좋을 거라는 얘기다. 아연에게는 여전히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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