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96)

<23화>

처음이라더니, 어쩌다 저렇게 성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버린 걸까.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한 줄기의 책임감이 들썩거렸지만, 아연은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성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논리를 찾아볼 수 없는, 말투만 온화하게 바꾼 협박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야말로 한바탕 뒹굴어 버린 상대와 친구 사이를 유지하자고 우기는 꼴이었으니.

이쯤 되니 아연도 눈 딱 감고 철판을 깔기로 했다.

“난 됐으니까 다른 친구 찾아봐.”

아연의 말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듯, 온건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성현의 입술이 거칠게 씰룩거렸다.

“어쩌지. 난 다른 친구 사귈 생각이 없는데. 네가 다른 새끼랑 벌거벗고 놀게 놔둘 생각도 없고.”

“…….”

“말하지 않았나. 난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다고.”

이젠 당혹을 넘어 사뭇 혼란스러워지기까지 했다.

핀트가 엇나간 채 주고받는 대화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어지럽혔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그가 원하는 바가 그다지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가 단언하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제안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우린 계속 친구일 거고, 그냥 우리 사이에 섹스라는 재미가 더해진 것뿐이야.”

아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날 선 공기를 가르고 짧은 적막이 흘렀다. 물끄러미 성현을 쳐다보던 아연이 말했다.

“언제까지?”

아연의 물음에서 제 회유가 먹혔다는 긍정적인 기색을 읽은 성현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너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줄게.”

이제 와서 굉장히 관대해진 듯한 성현의 태도에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껏 제 말은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안 하던 고집 센 벽창호가 취하기엔 몹시 뻔뻔한 자태였다.

“선택권이라면…….”

“네가 질릴 때까지.”

아연은 잠시 말없이 성현을 응시했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쳐 오는 그는 태생적인 자신감과 확신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거부할 리 없고, 혹여 거부하더라도 끝내 밀어붙이고 말리란 양아치다운 면모를 그럴듯하게 감춘 채.

“네 말대로 질릴 때까지 해서 결국 서로의 몸이 지겨워지면, 그땐?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가자고? 그러니까, 더 이상 섹스하지 않는 친구 사이로?”

아연의 말에 성현의 반듯한 눈썹이 꿈틀하고는 이내 미묘한 모양새로 기울어졌다. 웃는 듯 마는 듯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의 그가 불현듯 아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얼마든지.”

* * *

“흐읏……!”

그의 성기가 거칠게 속살을 헤집고 단번에 깊숙이 처박혔다. 다급하게 턱을 치켜든 아연이 차마 다물지 못한 입가로 맑은 타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대체 몇 번째 이어지는 정사인지. 언제부턴가는 세는 것조차 무의미해져서 그만두었다. 앞선 몇 차례의 행위 끝에 이제야 겨우 처음으로 침대에 등을 붙인 채 그를 받아 내고 있다는 점이 야속할 따름이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섹스.

그러니까 그 시작은 거실의 널찍한 소파에서부터였다.

대립각을 세운 지난한 대화로 이미 흠씬 진이 빠진 아연은 제게 몸을 붙여 오는 성현을 밀어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끌어당겼던 것도 같으나 기억은 아득하기만 했다.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데에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양 야릇하게 미소 지은 성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을 겹쳐 왔다. 이제는 사뭇 익숙하게 그녀의 입술 사이를 열고 혀를 얽으며 무게를 실어 아연의 몸을 뒤로 밀어뜨렸다.

아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파에 길게 가로누운 자세로 그의 아래에 깔려 헐떡거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동안 그의 입술은 뺨과 턱, 목으로 서슴없이 이어졌고, 희수가 친히 골라 입힌 우아한 원피스는 허물 벗겨지듯 끌려 내려가 소파 뒤쪽으로 던져졌다.

마치 젖 냄새를 맡은 아기처럼 정신없이 그녀의 가슴부터 찾아 입에 문 성현은 거침이 없었다. 젖꼭지를 입에 물고 뭉근하게 혓바닥 위에서 굴리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은 속옷의 끈을 잡아당겼다. 여린 레이스 끈은 속절없이 허벅지를 스치며 떨어졌다.

바짝 선 분홍색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문질거리다가 짓궂게 잡아당길 때마다 참지 못한 신음이 터졌다. 뾰족하게 세운 혀로 유륜을 덧그리고 아예 한가득 입에 물고는 쪽쪽 빨아 삼키는 그의 얼굴은 야하기 짝이 없었다.

만족할 때까지 가슴을 빨아 대던 성현은 온갖 감각이 뭉쳐 한껏 예민해진 젖꼭지를 입에서 뱉어 내고는 고개를 내렸다. 아연은 움푹 들어간 명치를 핥으며 내려가는 그의 머리통을 다급하게 붙잡아 세웠다.

‘잠깐만. 나 씻고, 씻고 해. 씻고 올게.’

저도 모르게 씻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듯 중얼거린 제게 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자긴 들어가는 쪽이니 씻었을 뿐, 딱히 상관없다고 했던가.

하아, 들어가는 쪽이라니.

하여간 무슨 말이든지 필요 이상으로 음란하게 표현해 내는 하등 쓸모없는 재주가 뛰어난 인간이었다, 권성현은.

아연이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사이, 성현은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개처럼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밀어내거나 잡아당기다가 달래듯이 쓰다듬는 것을 정신없이 반복했다. 어떻게 진정시켜 볼 여력도 없이 몹시 흥분해서는, 그녀의 몸이 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성현은 아연에게 몸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가 바지와 브리프를 장골까지 끌어내려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를 바깥으로 꺼내어 놓는 것을 보며 아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흠뻑 젖은 음부를 찌르더니 이내 단번에 깊숙이 밀려들었다.

‘아흑!’

이런 걸 받아 냈었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성현은 안쪽을 가득 채웠다.

한 명은 쫓고, 한 명은 도망가려는 첨예한 관계의 구도 속에서 아연이 이제껏 고수해 오던 다소 회피적인 태도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을까.

뜨겁게 열 오른 굵직한 페니스가 여린 속살을 짓치고 들어와 거칠게 드나들수록 어느샌가 그녀 또한 성현의 속도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침대까지 갈 것도 없이 소파 위에서 바로 붙어먹으면 얼마나 기분 좋을지, 저에게 뒤로 박히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냐고 태연하게 묻던 사람답게, 성현은 그 모든 궁금증을 친절히 해소해 주겠다는 기세였다. 아연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마구잡이로 쑤셔 대는 것으로 그녀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겨우 끝났나 싶어 소파 위에 늘어진 아연의 몸을 불쑥 허공으로 들어 올린 성현은 씻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의심스러운 명목하에 욕실까지 따라왔다.

풍성하게 만든 비누 거품으로 몸 구석구석을 살뜰하게 닦아 주는 행위에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아연은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매번 허무하게 커다란 손아귀에 허리를 휘어잡히고 말았다.

그때마다 의도적으로 엉덩이 골 사이에 끼워 맞춘 듯 꾹꾹 짓누르는 거대한 성기의 윤곽에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던 것도 여러 번. 끝내 그녀를 욕실 벽에 손을 짚고 서게 한 후 엉덩이를 뒤로 쭉 내민 수치스러운 자세로 만들어 놓고는 뒤에서 박아 넣는 것으로 성현은 제 시커먼 흑심을 드러냈다.

삽입과 동시에 비명과 비슷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속살을 거칠게 짓치며 들어올수록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버티지 못한 온몸이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아연이 마음대로 무너지도록 놔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성현은 더욱 난폭하게 허리를 쳐올릴 뿐이었다.

그녀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자 한 손으로 어깨를 붙잡아 상체를 똑바로 서게 하고는 다른 손은 앞으로 뻗어 민감하게 달아오른 클리토리스를 문질러 대며 자극을 더했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아.’

제발. 그만. 잠깐만. 비슷한 종류의 애원이 몇 번이고 터져 나왔다. 아연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릴 때마다 귓가에 부서지는 짐승 같은 숨소리가 더욱 짙어진 흥분에 겨워 고조되었다. 원망과 오기 따위가 일순 피어올랐다가, 그가 거칠게 성기를 찔러 넣으면 단숨에 흐릿해져 버렸다.

그러니까 이제껏 거실, 욕실,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어둑한 복도를 거치며 몇 번이고 그를 받아 냈는데도 불구하고, 맥없이 늘어진 몸을 침대 위에 털썩 누이자마자 어째서 또다시 그의 몸 아래에 깔려 있게 된 건지 아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을 몰아세운 게 대체 누구냐고 되묻고 싶었다. 걱정을 실어 묻는 목소리가 온화하기 짝이 없어서 오히려 가식적으로 들렸다.

아연은 생리적인 반응으로 물기가 잔뜩 어린 눈망울을 힘겹게 들었다. 갈색 눈동자 안엔 짙은 노여움과 혼란, 분노가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사람 말은 말 같지도 않다는 것처럼 무시해 놓고서는…….”

조명을 등진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몹시 다정해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가 정말 다정한 인간이라면 ‘제발, 그만, 잠깐만’ 따위를 두서없이 연발하며 간절히 애원하던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미친 사람처럼 허리를 흔들어 댔을 리 없는데.

그는 잘 꾸며낸 가면 아래 대화도 논리도 통하지 않는 난폭하고 이기적인 짐승을 숨기고 있었다.

황태자의 사회적인 가면, 사사롭게는 소꿉친구로서의 자상한 가면.

그것마저 모조리 벗어 버린다면, 완전한 날것으로 물든 성현의 민낯은 대체 어떤 모습일지 두려운 한편, 음습한 호기심이 치미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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