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부루퉁하게 말을 마친 아연은 무의식중에 입술 끝을 짓씹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굉장히 뻔뻔하게 느껴져 낯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네가 말해 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거리면서 나 피해 다니는 동안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냐.”
“살금거리긴 누가.”
순간 그의 손이 올라왔다. 피할 겨를도 없이 성현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아연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억지로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손가락이 어르듯 치아 아래 짓눌려 있던 입술을 부드럽게 뭉개뜨렸다. 깨물지 말라는 것처럼 다정하게 달래는 움직임. 아연의 눈썹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네 맘대로 만지지 마.”
“일일이 허락 맡을까, 그럼.”
아연의 매몰찬 반응에도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성현은 빙글거리는 낯으로 대꾸했다.
“하아…….”
아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건 모두 내가 쌓아 올린 죄다.
저 스스로 꼬아 버린 실타래를 풀어내는 심정으로 아연은 차분히 그를 부르며 시선을 마주했다.
“있잖아, 권성현.”
“말해.”
“그날.”
“그래. 우리가 붙어먹은 날.”
성현이 곧바로 아연의 말을 보다 적나라한 표현으로 대체했다.
맙소사.
아연이 경악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온화한 낯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술궂게 보였다. 아연은 어쩐지 소름이 돋은 제 팔을 슬그머니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제가 그를 대놓고 따돌리고 피해 다니는 동안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싶었다. 짜증이 날수록 성현의 가식적인 미소가 짙어진다는 걸 잘 아는 아연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쉽지 않은 대화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질척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연은 구슬리듯 달래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애석하게도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은…… 내가 좀 미쳤었어. 너 나 궁금한 거 못 참는 거 알잖아.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참을성은 얄팍하고, 도덕심도 별로.”
성현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를 타이르기 위해 애써 꾸며낸 말일 뿐인데, 그가 동의하자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설득되는 듯한 분위기에 힘을 얻은 아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너는……, 그래.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서 나랑 같이 어울려 주느라 그랬던 거 알겠는데.”
착한 사람치고는 미친 짐승처럼 굴었던 모습이 차마 잊혀지지는 않지만, 뭐 어쨌든.
“계속 이러니까 좀 당황스럽거든. 너 내가 연락 안 받고 너 피해 다니는 거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눈치도 빠르면서 왜 모르는 척해.”
아연은 원망스러운 눈길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니 성현은 그런 아연이 안타깝다는 듯 쓰게 웃었다. 미소 띤 입술이 벌어지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그날 날 당황스럽게 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지. 네가 나 졸라서 벗겨 먹었잖아.”
제 설득이 전혀 통하지 않자 아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자중하겠다잖아.”
“자중이라면.”
“네 눈에 당분간 띄지도 않고, 그날 일은 최대한 빨리 기억에서 지울 수 있도록…….”
“네가 잊으면.”
성현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사납게 끼어들었다.
어째서인지 그사이 더욱 신경질이 난 모양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으면 가식적으로 빙글거리던 그의 얼굴은 이내 완벽한 무표정이 된다. 사람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의 힘을 가진 얼굴.
“어?”
“내가 다 기억하는데, 너 혼자 잊어버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
말문이 막힌 아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물론 별로 소용은 없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얼빠진 대답은 머릿속을 맴돌기만 했다.
성현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에 그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낚싯줄에 걸려서 하릴없이 딸려 올라간 물고기처럼 그의 시선에 완전히 얽매인 아연의 눈동자가 가늘게 진동했다.
“그날 네가 내 아래에 깔려서 헐떡거릴 때.”
“…….”
“네 얼굴, 네 가슴, 네 배꼽.”
성현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을 때마다 시선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마다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기.”
그의 시선이 아연의 골반 근처를 의도적으로 희롱했다.
수치심이 화르르 치솟아 올랐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아연이 주먹을 쥐고 성현의 가슴을 퍽 내리쳤다.
“이…… 너, 변태야?”
성현은 그녀가 마음껏 솜방망이를 날리도록 가슴팍을 내주고는 피식 웃었다.
“비웃는 거야, 지금?”
화를 돋우는 비웃음에 아연이 더욱 분기탱천한 주먹질을 가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뻔뻔스럽게 등허리를 스윽 감아 오는 힘이 느껴졌다.
피할 새 없이 등줄기를 꾸욱 누르는 손끝에 귓가에 난 솜털이 와르르 곤두섰다. 순식간에 아연은 단단한 몸에 턱 부딪치며 빨려들어 가듯이 그의 품 안에 갇히고 말았다.
“키스할래?”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제가 구구절절 내뱉은 설득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한 뻔뻔하고 태연자약한 얼굴에 기가 막혔다. 아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가 단단히 엮은 팔 아래에서 버둥거렸다.
“우리가 왜.”
두 손으로 성현의 가슴팍을 쭈욱 밀어내며 안전거리를 확보했지만, 여전히 허리에 줄기처럼 감긴 손 때문에 하체는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몹시 신경 쓰였다. 아랫배를 꾹꾹 짓누르는 딱딱하고 커다란 무언가가.
아연의 머릿속에선 비명이 난무했다. 대체 언제부터? 지금껏 그들이 한 것이라곤 대화뿐인데 왜 그가 발기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아연이 이를 악물고 엉덩이를 뒤로 빼자, 이번에는 성현이 자비를 베풀듯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아연을 내려다보았다.
“섹스는 괜찮은데 키스는 안 된다니, 이해가 안 돼.”
아연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벽과 대화를 하는 것도 이보단 쉬울 것 같았다.
“그날은 많이 했잖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집요한 시선이 아연의 입술 위를 핥듯이 배회했다. 무의식중에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듯 문지르며 아연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날 많이 했으니까 됐잖아.”
“되긴 뭐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키스 말하는 거야, 섹스 말하는 거야?”
“당연히 둘 다……!”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른 아연이 제 목소리에 지레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숨죽이고 잠시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아연은 별다른 기색이 없자 이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 오른 이마를 짚으며 그녀는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신에 기가 쭉 빠져나간 듯 힘없이 늘어졌다.
성현은 능구렁이처럼 다가와 그녀의 옆에 바짝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이마를 짚은 아연의 손을 손쉽게 떼어 내더니 그 위에 제 손을 덮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가린 시야가 어두워졌다.
“거짓말이지?”
“뭐가.”
“이제 안 한다는 말.”
아연은 온통 복잡한 심경이 뒤엉켜서 무거워진 머리를 등받이에 툭 기대며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왜 해. 진심이야.”
담담하게 말을 끝맺자마자 아연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귓가에 축축한 숨결이 닿았기 때문이다.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붙인 성현이 야릇하게 속삭였다.
“더 하자.”
“……안 해.”
“몇 번만. 더 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아연은 어이가 없어서 그의 손을 치워 내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는 피식, 바람 빠지듯 실소를 흘리며 다시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쪽쪽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아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혀가 귓속을 질척하게 파고든다. 목덜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녀는 굳게 다문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목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뒤로 빼자, 성현이 그대로 아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높다란 콧대를 목덜미에 문지르며 그가 유혹하듯이 읊조렸다.
“더 잘할 수 있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젠데. 나 별로였어?”
그가 아연에게서 상체를 떼어 내며 물었다. 그 와중에 못했다는 평가는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별로이지 않았던 게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잠잠한 그녀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성현의 낯빛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마치 커다란 대형견이 덩치에 맞지 않게 애교 부리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아연의 목덜미에 묻고 비벼 대며 말했다.
“그날은 내가 좀 거칠게 굴었어. 처음이라, 흥분해서.”
“뭐, 뭐라고?”
어느새 목에서 얼굴까지 올라와 눈에 보이는 대로 핥아 대는 그에게 한쪽 뺨이 눌린 채 아연이 멍하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잘할 수 있다고. 나 몸으로 하는 건 뭐든 금방 익히는 거 알잖아. 몇 번 더 하면…….”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처, 처음이라고?”
아연이 그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성현의 머리통을 멀찍이 밀어내며 고쳐 앉았다.
“너 처음이었어?”
그게 처음이었다니. 분명 처음일 수가 없는 능숙한 몸놀림이었다. 오히려 너무 능수능란해서 괜히 기분이 상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권성현이 섹스를 잘하는 데 제가 왜 기분이 나빠지는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무슨 의도로 그가 저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몰라, 아연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성현은 그런 그녀를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왜 놀란 눈이야? 너 알았잖아. 나 처음인 거.”
내가? 아니?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