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유리창을 등진 채 모니터를 응시하는 성현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져 있었다. 의미 없이 책상 위를 툭툭 두드리는 손끝에서도 알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요 며칠 새 그를 성가시게 하는 모든 짜증의 근원은 고민할 여지 없이 명확했다.
모든 건 한아연으로부터 시작한다.
정확히는 그날 밤,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텅 빈 침대를 맞닥뜨렸을 때부터.
수영을 비롯한 갖가지 운동을 즐기는 성현은 강도 높은 운동으로 전신의 근육을 혹사시킨 뒤 녹진하게 풀린 몸 위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날, 한아연과 섹스한 직후의 샤워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온몸의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나른한 감각과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느긋하게 욕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순간, 콧노래마저 흘러나올 정도로 어린애처럼 고조됐던 기분은 곧바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침대 시트마저 홀랑 벗겨서 사라진 걸 보고 어찌나 황당했던지.
‘어디야?’
성현은 곧바로 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긴 신호음 끝에 겨우 통화가 연결된 것조차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 왔어.’
‘왜.’
‘왜긴. 늦었잖아. 나 아침 일찍 카페도 나가야 하고.’
할 것도 다 했고. 들릴까 말까 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좆도 까 봤고 볼일 다 끝났으니 인사도 없이 홀랑 튀었다?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성현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
‘기다리지. 데려다줬을 텐데.’
‘뭐야, 우리가 언제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사이였다고.’
아연이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다.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기에 한아연이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갈 때 그의 배웅은 늘 현관 앞까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때는 우리가 섹스하지 않았으니까.
‘앞으론 데려다줄 테니까 말없이 가지 마.’
‘…….’
‘한아연.’
‘……알았어.’
‘침대 시트는 왜 가져갔어?’
‘아, 세탁해서 돌려줄게.’
‘그냥 두라고 해도. 하여간 고집은.’
몸도 정상은 아니었을 텐데 그 와중에 꾸역꾸역 거추장스러운 침대 시트를 싸 들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아갔을 한아연을 생각하니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아무튼, 좀 피곤하다. 잘래.’
평범하게 밤 인사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한아연이 제게 이럴 줄은 몰랐다.
드르륵.
책상 위에 던져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성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 막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의 곧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택배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가 마치 그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한아연과 통화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성현은 오래도록 몸을 뒤척여 봐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침실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소파에 기대앉아 아연과의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핸드폰을 집어 들었었다.
그때 주문했던 해외 브랜드의 콘돔이 도착했다는 문자 알림이었던 것이다.
그의 사이즈는 9.3인치.
집에 있던 국산 콘돔은 고작 18cm에 불과했기에 그야말로 좆을 욱여넣어 터질 듯한 데다, 씌우다 만 모양새였던 게 당연했다. 그 꼴을 해서는 정신 나간 짐승처럼 굴었으니, 하다가 콘돔이 찢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었다.
성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오늘 밤 당장이라도 새로운 콘돔을 써 보고 싶은 음흉한 마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문제는…….
한아연이 지난 며칠간 그를 살금살금 피해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빚 독촉에 시달리는 채무자라도 된 것처럼 아연은 그의 앞에서 꼬리를 감추었다.
다음 날 아침 카페에서 그를 보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답지 않게 경직되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한아연은 아침의 카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없는 카페에선 눈에 익은 직원이 그를 맞이하며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묻지도 않은 변명을 전했다.
‘사장님은 아직 안 나오셨어요. 저기 새로운 직원이 이제 풀타임 근무라 일손이 충분하거든요. 사실 지금까지 매일 사장님이 오픈부터 클로즈까지 계속하신 게 대단하시죠, 하하. 요즘 몸도 좀 안 좋으신 것 같고…….’
그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한아연이 그를 피한다.
성현은 커다란 손으로 턱 끝을 문지르며 사뭇 심각하게 고민했다.
겉으로는 머릿속이 온통 음탕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단정하고 진중한 얼굴이었다.
‘설마 나랑 한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았나?’ 하는 최악의 가정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으나,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불길한 가정을 부정했다. 마치 홍수가 난 것처럼 흥건하게 젖어 철벅거리던 아연의 아래를 생각하면 분명 괜한 기우일 뿐이다.
혹여 만에 하나 아연의 기준치가 대단히 높아 약간 실망했을지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을 꼽아 본다고 하더라도, 딱 한 번 해 보고 결정하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나.
그는 다음에, 그리고 그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 온 신체는 몸으로 하는 건 무엇이든, 어떤 스포츠든 금방 체득해 늘 평균치의 능력을 상회했으니까, 섹스라고 다를 리가 없다.
어느새 또다시 아연과의 섹스가 떠오르자, 불시에 하체로 피가 몰렸다. 성현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제 다리 사이에서 빳빳하게 부피를 키우는 물건을 성가시단 눈으로 흘겨보았다.
‘씨발. 무슨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자꾸 이게 뭔 짓거리야.’
한아연이 그의 일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날 이후 매일 밤 생생한 꿈속에 찾아오는 한아연도, 갑자기 그를 투명인간 취급 하는 한아연도, 모두 마뜩잖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짜증 나는 건, 고작 섹스 한 번 했다고 고삐가 풀린 것처럼 자꾸만 벌떡벌떡 서 버리는 제 음란한 몸뚱어리였다.
속옷을 축축하게 적신 채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그 자괴감이란, 철없던 중학교 시절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그의 인격과 자긍심을 훼손했다. 그는 발정 난 스스로를 비난하며 모멸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만큼 온종일 한아연 생각이 머릿속을 침범해서 그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치 최고 수위에 다다라 범람하기 직전의 댐처럼 매 순간 그의 얄팍한 인내심을 시험해 댔다.
성현은 의자를 뒤로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서자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마천루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까마득한 건물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사무실이 너무 높은 층에 위치한 탓에 아연의 카페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카페에 나와 매장 안을 종종거리고 누비면서 손님들을 향해 해맑게 미소 짓고 있겠지.
오늘도 성공적으로 나를 따돌렸다고 안도하면서.
성현은 팔짱을 낀 채 카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한아연이 언제까지 이렇게 자신을 피해 다닐 수 있을지 여유 있게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정작 여유를 잃은 것은 제 쪽이었다.
사람을 함부로 건드려서 이따위로 타락시켜 놓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성현은 미소 띤 얼굴로 정장 상의를 집어 들고 팔을 꿰어 넣으며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 * *
“사장님, 원두 재고 파악 끝냈어요.”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아연이 민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다가온 민재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태블릿을 아연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번엔 좀 소진이 빨라서 정기 주문 넣기 전에 아슬아슬할 것 같기도 해서요. 내일 추가 주문 한 번 더 넣으려고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수고했어요.”
“그리고 이건 제가 그냥 한번 생각해 본 건데요, 제가 다니는 케이크 공방에서 디저트류를 몇 가지 납품받아 판매해 보는 건 어떠세요?”
“디저트요?”
“절대 제가 중간에 무슨 커미션을 받거나 하는 건 아니고요. 우리 카페에서 지금은 시판 제품만 판매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구색 맞추기용이라는 느낌이 들고, 팔아 봐야 별로 남는 것도 없는 것 같아서요.”
틀린 말은 아니다. 아연은 좋은 원두를 고르고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하여 신선도를 높이는 쪽으로, 커피 맛에 집중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페 위치상 바쁜 회사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테이크아웃의 비율이 월등히 높고 음료 외 디저트류의 판매 실적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직원 두 사람 모두 로스팅이 가능한 인력으로 채용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만든 것도 그렇고, 공방에서 판매하는 케이크가 꽤 높은 가격에도 잘 팔리거든요. 제가 공방 쪽에 슬쩍 운만 띄워 봤는데 카페에 납품하게 되면 가격도 맞춰 줄 수 있다고 하셨으니 한번 생각해 봐 주세요. 절대로 부담은 갖지 마시고요.”
민재는 태블릿에 공방 웹페이지를 띄우며, 카페에서 판매하기 좋을 만한 디저트 몇 개를 아연에게 보여 주었다.
“음료 맛도 중요하지만 카페에서 판매하는 디저트의 퀄리티가 어떤지에 따라서도 SNS에 입소문이 나고 하니까, 매출도 그렇고 카페 이미지에도 좋을 것 같아요.”
“음, 그렇긴 하죠.”
“물론 우리 카페야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입소문이 나기는 했지만요. 하하.”
아연의 손에서 다시금 태블릿을 받아 들며 민재가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 그 입소문이란 카페의 마스코트 격인 권성현 효과를 의미했다.
“아무튼, 생각해 보시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좋은 아이디어 내 줘서 고마워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민재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아연이 문득 그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