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도성에 올라오는 동안 얼마간은 밤하늘을 보며 두 사람이 함께 잠들기도 했으나, 어떤 날은 열대야에 잠을 설친 이들이 너도나도 마당에 나오는 탓에 오붓함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비라도 내리는 날엔 별수 없이 현경은 몇 번 더 무간지옥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 날엔 유난히 현경이 아란을 더 애틋해하여 한시도 떨어질 줄을 모르니,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어찌 이리도 서로를 더 그리지 못해 안달이냐며 놀리곤 했다.
어느덧 도성 앞에 당도한 일행들은 파루를 기다리며 성문 밖 주막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도성을 오가는 객이 워낙 많은 주막엔 다행히도 방이 넉넉하여 마지막 날이니만큼 일부러 값을 더 치르고 현경과 아란은 따로 함께 방을 썼다.
현경은 막상 도성을 코앞에 두자 사뭇 긴장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올라오는 동안에는 그저 유람하듯 아란과 웃으며 왔지만, 이제부터는 어찌해야 하나 현경은 뒤늦게 막막해졌다. 아란은 그런 현경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부모님을 뵙고 오후에는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니, 서방님은 이곳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죽은 줄 알았다고 생각한 현경이 모습을 드러내면 또 다시 소란이 일 테고, 어떤 형태로든 좋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현경이 애써 용기를 내어 도성에 함께 와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란은 현경이 겨우 찾은 평온함을 흩뜨려 놓고 싶지 않았다. 아란의 말에 현경의 표정이 더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어떻게 부인을 혼자 보내요.”
“제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아무리 오랜만이라 해도 설마 길이라도 헤맬까 봐요.”
“떨어져 있고 싶진 않은데…….”
지금 이 모습으로는 둘이 함께 도성에 들어설 순 없고, 그렇다고 홀로 도성에 들어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아란의 눈에 문득, 근심이 가득한 채로 돌아앉아 있는 현경의 가녀린 뒤태가 들어왔다.
“서방님?”
“예.”
아란은 도성 안에서도 현경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기발한 방도를 떠올렸다. 현경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했던 아란의 표정이 마치 재미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들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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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강선생은 어디 가셨기에 보이지 않습니까?”
“잠시 일이 있으시다기에, 나중에 따로 오실 것입니다.”
“책방까지 같이 갈까 했더니만. 헌데, 옆에 있는 이 분은 누굽니까.”
“제, 제가 부리는 아이입니다.”
“그렇습니까? 여태 못 봤던 것 같은데.”
“그게, 도성에서 마중 나온 아이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아란 등 뒤로 현경이 고개를 숙여 더 가까이 붙었다. 다행히 상인 김씨는 금방 눈길을 거두곤 제 갈 길을 갔다. 성문을 지나며 오랜만에 입는 치마가 자꾸만 발에 치이는지 현경의 걸음걸이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현경을 돌아보며 아란이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경아, 걸음이 어찌 그리 느린 것이야, 얼른 오지 못하겠니.”
“예에, 마님. 얼른 갈 테니 이제 그만 웃으세요.”
아란은 즐거워하며 현경에게 치마저고리를 입혀놓고서 고향의 어른들이 현경을 부르듯 경아, 하고 불렀다. 현경은 오랜만에 입는 치맛자락이 어색한 것보다도 아란이 저렇듯 자신을 부르며 웃을 때마다 자꾸만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로 왔구나. 집 대문 앞에 선 아란은 심호흡을 하며 현경을 돌아보았다. 선물을 싣고 온 말고삐만 꽉 쥐고 서있는 현경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정말 들어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곁에서 함께 있기로 했으니까요.”
아란이 현경의 손을 다정스레 잡아왔다. 부모님께라도 사실대로 말씀드린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현경의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아란이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제부터 하대하는 것을 용서하세요, 서방님.”
“제가 아직 용기가 없어 송구합니다.”
“그런 말 마세요, 저를 또 울리시려구요.”
아란의 눈가가 또 붉어지려 하기에 현경이 얼른 아란의 손을 꼭 쥐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얼른 눈물 거두시고 밝은 얼굴을 보이셔야지요.”
“…….”
“말씀 낮추는 것 잊지 마시구요, 마님.”
현경이 미소 지으며 아란을 달랬다. 아란은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대문을 두드리자 얼굴을 내민 낯선 노복은 아란을 알아보지 못했다. 주인어른께 아뢰겠다는 말을 남기고 대문이 도로 닫히는 것을 보며 아란은 숨을 가다듬었다. 현경은 그저 말없이 아란의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현경이 서둘러 아란의 손을 놓는 순간, 눈물이 그렁하던 아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렸다.
“세상에, 아란이 맞느냐, 아란이구나. 내 딸 아란이구나…….”
“어머니, 아버지…….”
아란을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는 제현 부부를 지켜보고 있던 현경도 한 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로 축축한 눈가를 가렸다. 대문에 들어서자 곧바로 보이는 마당 너머의 사랑채와 흐드러진 나무, 현경이 머물렀던 동재도 모두 그대로였다. 현경은 새삼 감격하여 금방 추억에 젖어들었다.
아란의 어머니는 딸아이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아버지 제현도 아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감복하여 어서 오라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아란이 서신 한 장만을 남기고 속세를 떠났다는 말에 잠을 못 이루던 제현이었다. 겨우 소식을 알아내어 아란이 머문다는 암자에 서신 한 통을 보내어 봤지만 이미 아란은 그 암자에서조차 떠났다는 말을 끝으로 하염없이 세월만 흘렀다.
혹여 거친 길가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설마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걱정과 달리 아란의 얼굴이 평온하니 제현 부부는 하늘에 감사했다.
“천지신명이 도와 내 글이 너에게 닿았구나.”
“큰 시장에 나가는 길에 시주받으러 오신 암자 스님을 우연히 뵈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아버지의 글이 발길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하셨구요.”
“그래 그랬구나.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긴 세월 불효가 깊어진 것을 용서하세요.”
“혹 마당에 저 짐들은……, 그럼 지금 함께 하는 이가 있는 것이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란을 보며 제현 부부는 아란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어디까지나 아란을 살아서 다시 보게 된 것만 해도 제현 부부에겐 지극한 기쁨이지만, 함께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또 그 사람이 이렇듯 아란을 배려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다행이라 여겼다.
혼인한 여인조차 친정에 편히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데, 후첩으로 들인 여인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아란을 친정에 보내주고 선물까지 챙겨 보내는 걸 보니 인자한 사람과 함께인 것 같아 부모는 마음이 한결 놓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인가 넌지시 묻는 의중에 아란은 어찌 말을 해야 할까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없을, 좋은 분입니다.”
“그래, 너의 얼굴만 보아도 좋은 이라는 것만은 알겠으니.”
“저는 과분한 복을 누리고 살고 있으니,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마음 놓으세요.”
“그래, 웃고 있구나. 그거면 되었다.”
아란이 부모와 함께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당에서 집안을 둘러보며 서있던 현경은 말에서 자신이 가져온 선물들을 내리는 노복들을 돕고 있었다.
얼굴을 익혔던 집안 노비들 대신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 대부분이라 현경은 새삼 그동안의 세월을 실감했다. 하여 집안 노비들 또한 현경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현경은 마음 졸일 일을 덜었으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때마침 아란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현경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아란은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란은 얼른 현경을 다정히 불렀다.
“경아, 이리 오너라. 먼 길 오느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으니 좀 쉬자꾸나.”
“우리 아란이와 함께 온 아이구나, 내 따로 말을 하여 방을 마련해 줄 테니 편히 쉬거라.”
“아닙니다, 어머니. 동무처럼 아끼는 아이라 별당에서 저와 함께 지냈으면 합니다.”
“그래, 너 편한 대로 하려무나. 경이라고 했니. 그간 우리 아란이를 잘 살펴주어 고맙구나.”
“예에.”
유독 현경을 아끼고 좋아하던 제현 부부였기에 그 얼굴을 마주 본다면 분명 알아볼 것 같아 현경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현경의 안부 인사는 마음속으로나마 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란을 뒤따라 걸으며 별당 쪽으로 향하던 현경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던 중이었다.
“경아.”
“예.”
“…….”
아란이 저를 부르고는 뒤에 이어지는 말이 없자 현경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란을 바라보았다. 빤히 현경을 보고 있던 아란과 눈이 마주쳤고 아란이 웃기 시작했다. 별당 앞마당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서방님을 참 좋아하셨는데.”
“말씀 낮추세요, 마님.”
“제 방 안에서도 몸종 노릇을 계속하려 하십니까.”
“이 도성 안에 있는 한은 경이로 지내야지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란은, 현경이 제 뒤만 졸졸 쫓아오는 것도 그렇고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조신하게 있는 게 마냥 사랑스러워 보였다. 경아, 하고 부를 때마다 어린 현경의 모습이 떠올라서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란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우두커니 서서는 현경에게 팔을 벌리고 섰다.
“경아.”
“예.”
“나 좀 한 번 꼭 안아줄래.”
“예.”
현경이 다가가 아란을 끌어안으니 그 품에 기대고 선 아란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그저 곁에 있고 닿아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이 마음을 어찌 다 전할까 싶어 아란이 현경의 품 안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로 언제든 내 옆에 있구나.”
“…….”
“이마저도 좋다 하면 내가 너무 못됐지.”
“부인이 좋다 하시면 저도 좋지요.”
더 맞닿을 틈도 없이 부둥켜안고 있으니 현경의 숨이 아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란이 살짝 몸을 떼고서 현경의 얼굴을 가만 살피니 현경이 그 눈길을 따라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경아.”
“예.”
“도포를 걸칠 땐 멋이 나더니 치마를 입어도 이리 곱구나. 이를 어쩐다.”
그 말에 현경은 도로 아란을 꼭 끌어안은 채로 뒤뚱뒤뚱 발을 내딛으며 보료까지 걸어 들어갔다. 보료 위에 아란을 앉히고 두 팔 안에 가두고서 눈을 마주하니 아란이 두 손으로 현경의 볼을 감싸 쥐었다.
“어쩌시려구요.”
“괘씸하니 벌을 주어야지.”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달아야지.”
아란이 먼저 다가가 현경에게 입을 맞추었다. 현경이 아란의 허리를 감싸던 손을 올리려 하자 아란이 다시 그 손을 제자리에 두었다.
“너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엄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현경이 웃으며 아란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아란이 현경의 얼굴 곳곳에 짧게 입 맞추었다. 현경이 간지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아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울렸다. 이렇게 환한 얼굴의 아란을 보고 있으니 현경의 마음엔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이 채워졌다. 행복한 마음은 맞닿아 있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걸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성에 머물면서 아란이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현경은 기꺼이 ‘경이’로 지내기로 결심을 했다.
아침에 아란이 씻을 세숫물을 떠다주고 아란의 아침상도 챙기는 일이야 평소에도 현경이 하던 일이니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때마다 아란은 현경을 보며 괜히 웃곤 했다.
“왜 자꾸 웃으세요.”
“오래 부린 몸종노릇이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평소에도 제가 서방님을 많이 부렸나봅니다.”
“말씀 낮추시는 것 자꾸 잊으시지요.”
“이러다 버릇되면 어쩌지.”
아란이 어머니와 함께 안채에서 밥을 먹을 때 현경은 부엌에서 집안 노비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 댁 주인어른은 잘해 주시는지 등등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라 그런지 그들도 텃세를 부리는 것 없이 현경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고 현경도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살결이 뽀얀 탓에 의심의 눈초리를 좀 받긴 했지만, 현경은 그저 살던 곳이 물이 좋은 마을이라 그렇다며 대충 둘러댔다.
부엌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현경은 제현 부부가 아란이 사라진 뒤에 얼마나 간절하게 아란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공덕을 쌓으며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제현부부는 오랜 시간 집에서 일해 온 노비들에게 재산을 조금씩 나누어 노비 신분을 면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주인의 횡포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남의 집 노비들의 빚도 대신 갚아주고 이 집에 들이기도 했다고. 현경을 모르는 노비들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손맛이 좋아 부엌에서 찬을 담당한다는 여인은 행주치마를 둘러매더니 현경 앞에 놓인 밥그릇을 치우며 혼잣말을 했다.
“이 댁 아씨도 전에 뫼셨을 땐 말도 없으시고 깡 마르셨는데 저리 웃고 하시는 걸 보니 참말로 보기 좋네.”
“아주머니, 우리 부…… 아니, 우리 마님을 아세요?”
“응, 내가 원래 안방마님 친정에서 일할 적에 잠시 내려와 계셨던 분이라.”
“아.”
“하필 그때 갑자기 사라지셔 가지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거든. 그런 일 있고나서 얼마 안 있다가 여기로 오게 되었지.”
“…….”
“우리 딸이 아씨랑 사이가 좋았었거든, 딸을 모셨던 아이가 있다는 소식에 이야기라도 듣는다 하시면서 불러들인 거지. 에휴, 나도 딸 가진 어민데 그 마음 오죽할까 싶어서 군말 없이 올라오긴 했는데, 지금은 오길 잘했다 싶고 그래. 또 이렇게 따님도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아주머니 따님이 혹시…….”
“응, 못 봤지? 얼마 전에 심부름 나가서 아마 올 때가 됐는데. 아 저기 오네, 얘 부실아! 얼른 와 밥 먹어라.”
“엄니, 뭐 어디 손님 오셨나봐? 못 보던 말이……, 어?”
“부실아?”
“언니!”
부엌에 들어서던 부실은 현경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와락 안겨들었다. 키가 훌쩍 자란 부실이 달려들자 현경의 몸이 기우뚱했다.
“어이구, 둘이 아는 사이야?”
부실 어미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에 부실은 이게 얼마만이냐며 현경을 붙잡고 방방 뛰었다. 전에는 키가 가슴팍에나 겨우 오던 꼬마 부실이가 훌쩍 자라 소녀가 되었으니 현경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우리 동향사람이던가? 우리 딸을 어째 안대?”
“아냐 엄니, 그냥 좀 아는 언니야. 산에 살던 예쁜 언니.”
씨익 웃는 부실의 입매가 시원스러웠다. 밥 먹으라는 어미의 말에도 부실은 됐다며 현경을 이끌고 나와 부엌 뒤로 향했다. 그리고는 누가 오나 슬쩍 주위를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경의 팔을 잡고 다급히 물었다.
“아니, 웬 종살이를 하고 있어요? 언니 설마 했는데 노비였어?”
“아휴, 부실아 일단 이거 좀 놓고 말해라.”
“어느 집 노비로 들어갔는데? 혹시 이 댁으로 팔려 온 거예요? 주인어른이 좋기는 한데, 그래도 왜? 어쩌다가…….”
혹여나 팔다리 성하게 붙어있나 싶어 저를 살피는 부실을 보며 현경이 한참을 더 웃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까마득하기도 하고 아직 얼떨떨하기도 해서 현경은 그저 대강 둘러대고 말았다.
“좋은 주인 만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마.”
“뭐, 얼굴 때깔 좋은 걸 보니 잘살고 있는 것 같긴 하네.”
“그것보다 부실이 너, 훌쩍 커버려서 진짜 못 알아보겠다야.”
“그럼, 엄니가 나 시집갈 나이라 했어.”
헤헤 웃으니 또 그 옛날 부실의 앳된 얼굴이 그대로인가 싶기도 했다. 현경도 지난 세월을 실감하며 부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젠 현경이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제법 팔을 높이 올려야 부실의 머리에 손이 닿았다.
“경아.”
그때 마당 쪽에서 아란이 현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경은 아란이 있는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부실은 저 언니 이름이 경이었던가,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경아, 내일 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더 머무르지 않으시구요?”
“문중 모임이 있어 부모님께서도 내일 오후에 떠나신다고 하는구나.”
“아…….”
역시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현경은 시일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 괜히 아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표정을 알아보고 아란은 괜찮다는 듯 현경의 볼을 가만 쓸었다. 마침 부엌 뒤에서 현경을 따라 나온 부실이 아란을 보고서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어? 별당마님!”
“……부실이니? 여기 와있다는 얘기를 막 듣고 온 참인데. 세상에, 많이 컸구나.”
“어찌된 일이에요.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시고 온 집안이 난리였는데.”
“미안하다, 사정이 좀 있었어.”
“뭐,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됐어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부실은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티를 내었다. 그러다 나란히 서있는 아란과 현경을 번갈아보던 부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언니가 모시는 분이 별당마님이세요?”
“어? 응, 맞아.”
“재밌는 인연이네. 별당마님, 요새도 저 언니 한 번씩 앓아눕고 그래요?”
“얘가 별 소리를 다하네.”
부실이 아란에게 대뜸 묻는 말에 현경이 얼굴을 붉혔다. 현경은 아란에게 홀로 산에서 살았을 때의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란이 곁에 없어 어두운 시간이었다며 쓸쓸히 웃을 뿐. 보고 싶어도 서로를 볼 수 없어 아파했던 날들이야 아란도 다르지 않았으니 구태여 현경에게 묻지 않았다.
“글쎄, 근래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전에는 많이 앓았나 보다.”
“전에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좋은 분을 모시고 있어 그런가. 언니 얼굴빛이 좋아서 제가 다 마음이 놓이네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의 부실을 보며 아란이 미소를 지었다. 부실은 내일 제현 부부의 문중 모임에 동행해야 하기에 준비할 것이 많다며 행랑채로 돌아갔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현경을 아란이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경아, 날이 더우니 우리 좀 씻을까.”
“예?”
“준비 좀 해줄래.”
화들짝 놀란 현경의 두 눈이 커지자, 아란이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