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한낮의 해도 기울고, 그나마도 더위가 한풀 꺾이자 마을 곳곳의 텃밭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나와 감자 수확이 한창이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한다며 호미질을 하는 손길들이 분주했다. 한 번 땅을 헤집을 때마다 감자알들이 호미 끝에 우수수 매달려 나오면, 그 재미에 마을 사람들은 구슬땀을 식혔다.
집으로 돌아가던 현경은 텃밭에서 호미를 들고 있는 정암댁의 모습을 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사를 받은 정암댁은 현경이 글을 배운 향교 스승의 부인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곱상한 현경을 보며 정암댁은 그 인자한 눈매를 접어가며 웃었다.
“오늘도 혼자 장에 다녀오는 모양이구나.”
“예, 요샌 날이 더우니 산책도 자주 못 나오네요.”
“각시 애지중지하는 건 안다만, 그렇다고 너무 집안에만 숨겨두지 말고.”
“예.”
현경이 머쓱하게 웃으며 갓 끝을 만지작거렸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려다 현경은 발길을 돌려 다시 텃밭 앞에 섰다. 정암댁은 우물쭈물 서있는 현경의 표정을 금세 읽어냈다.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눈빛을 조금은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저, 요새 부인께서 좀 우울해하는 거 같아서요. 제가 뭘 해주면 좋을까 하고…….”
그 말에 감자를 캐내고 푹 파인 고랑을 포실한 흙으로 덮어 부드럽게 다지던 정암댁이 잔잔히 웃었다.
“이제 고향 내려온 지도 제법 되었지?”
“예.”
“현경이 너는 좋은 것 보고 맛난 음식들 상에 올릴 때마다 가끔 아버지 그립지 않던.”
“아…….”
“내 어머니께선 혼인하시고는 친정 한 번 못 가보고 눈을 감으셨단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우리 영감도 수염이 하얗게 샌 다음에야 깨달았던 것인데, 그 마음 헤아려준다면야 그것이 고맙지.”
정암댁이 다시 싱긋 웃었다.
“길목에 들꽃들이 곱구나, 안방에 꽃내음이 돌면 훈장댁의 기분도 한결 나아지지 않겠니.”
“꺾어다 드리면 아마 혼쭐이 날걸요, 꽃은 두고 보는 것이지 꺾어다 쥐는 게 아니라하시면서요.”
“그 대쪽 같은 성심 앞에선 강선생 체면도 별 볼 일 없나 보구나.”
정암댁이 농을 하며 호호 웃자 현경도 따라 웃었다. 허리춤 높이까지 들꽃들이 늘어선 길 앞에 현경이 다가섰다. 잡풀들을 손등으로 거두며 들꽃을 들여다 볼 뿐 현경은 꽃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현경의 소맷자락에 꽃잎과 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가 사라락 흘렀다.
“과연, 소맷자락에 들꽃의 향만 담아갈 참이니.”
“예, 부인께서 기다리시니 제가 더 고운 모습으로 돌아가야지요.”
현경의 미소에 정암댁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소리 내어 파안대소 하였다.
아란은 얼마 전부터 부쩍 이른 저녁에도 먼저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았다. 어디 몸이 안 좋은가 싶어 현경이 얼굴을 살펴도 아란은 말없이 그저 싱긋 웃고 마는 것이 전부였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현경은 불 꺼진 안방을 돌아보다 그만 잘까 싶어 몸을 일으켰다. 마루 위를 오르던 현경은 문득 툇마루 기둥 뒤로 숨겨 놓은 듯 쌓인 서책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공부하러 온 아이들이 가끔 이곳에 책을 놓아두고 다니긴 했지만, 그 사이에 유난히 오래되고 낡은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현경이 마루 아래 쪼그려 앉아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서책을 꺼내보니 그 옛날 아란이 현경에게 처음 주었던 서책이었다.
“부인도 참, 내다 버리셨다더니.”
현경이 가보로 남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걸, 아란이 불쏘시개 감으로 쓰겠다며 빼앗아갔었는데 이곳에 숨겨두고 혼자만 봤던 모양이었다. 현경이 히죽 웃으며 서책을 만지작거리는데 책장 사이에서 뭔가가 툭, 현경의 발치에 떨어졌다.
뜯어진 책장인 줄 알았던 그것은 누렇게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한 봉투였다. 현경이 의아해하며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보니, 이내 그 안에 든 서신 속의 필체에 그만 현경은 숨을 죽였다.
‘웃고 있느냐,
매일 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모습 떠올라
네 어미는 오늘도 별당에서 밤을 지샌다.
혹여 하늘이 도와 네가 이 글을 보거든
그저 웃고 있다, 한 자 적어 보내주겠느냐.
늙은 아비의 마음은 다만 그뿐이면 족하다.’
낡은 서신 속에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딸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이 가득했다. 오랜 시간동안 이리저리 돌고 돌았던 서신이 어떻게 아란에게까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만큼이나 해진 봉투가 현경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현경이 보아도 제현의 착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니, 아란은 오죽했을까. 혹여나 이 서신을 받고서 많이 울지는 않았을까 현경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말도 않고 혼자 삭이고 있었을 아란 생각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웃고 있느냐, 라는 서신의 첫머리를 읽으며 현경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지런히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 아란이 모로 누워 있다. 조심스레 그 옆에 누운 현경은 뒤돌아 있는 아란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란은 배에 둘러진 현경의 팔 위로 손을 올려두었다. 방안이 고요하니 아란이 작게 뒤척이는 소리마저도 현경의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저 때문에 깨셨어요?”
현경이 묻는 말에 아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현경은 아란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아란에게 잡힌 손을 살살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아란이 작게 웃으며 현경의 손등을 가만 쓸었다.
“왜 주무시지 않구요.”
“떨려서 잠이 안 와요.”
“잠이 안 와요?”
웃음기 어린 아란의 잔잔한 목소리가 현경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자장자장. 현경의 손등을 아란이 다독이자 현경이 아란의 등에 더 가까이 붙었다.
“저, 옆마을 갔다 만났던 김씨가 그러는데.”
“…….”
“새로운 서책들이 도성에 잔뜩 들어와 있대요.”
아란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고향에 온 후로 은근히 피하던 도성 이야기를 꺼내는 현경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사흘 후에 도성으로 가는 상단이 있다 하니, 따라가면 수월하게 갈 수 있겠지요.”
“…….”
“그러니 함께 가요.”
단순히 서책을 사러 도성에 가자는 말이 아니라는 건, 현경의 다정한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란은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정 많은 마을 사람들과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으니 감자골의 생활은 충분히 행복했지만, 나고 자란 곳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아란의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현경에게는 선뜻 꺼내기 망설여졌던 속내였다.
“그, 도성 갈 채비는 제가 조금 해두긴 했는데 혹시 부인께서도…….”
아란이 슬며시 돌아누워 현경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아란은 끝내 현경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현경은 앞섶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그저 끌어안은 팔을 들어 조심조심 아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강선생은 도성에 서책 보러 간다더니 웬 짐이 이리 많소?”
“이게 많습니까? 좀 모자라지 않나 싶은데.”
상인 김씨가 현경을 알아보고 다가오더니 챙겨온 짐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현경이 도성에 가기 전에 빈손으로 가는 것이 뭣하여 마을 어른들께 물어물어 다과며 옷감 등 선물을 잔뜩 준비한 탓이었다. 아란이 아무리 말려도 현경은 여태 뭐라도 더 준비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날이 밝으니 출발을 서둘렀다. 현경과 아란 말고도 상단과 함께 도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서찰을 전하는 발꾼들이나 유랑객들도 여럿 있어 제법 무리가 컸다. 함께 말에 오른 아란과 현경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둘러보며 지난 기억들을 더듬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냥, 이 길을 지나니 모든 게 마치 어제일 같아서요.”
“그러게요. 가마 안에서 한심하다는 듯 저를 보던 부인 표정이 어제 일처럼 아직 선한데.”
“제 표정을 어찌 아셨어요.”
“알다 뿐입니까. 그게 보통 눈빛이었나요, 그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데.”
“모자란 칠푼이처럼 실실 웃던 그 아이가 제 배필 될 줄 알았으면야 제가 일부러 그리 했으려구요.”
“하, 칠푼이라니.”
현경이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시늉을 내는데 그 바람에 말이 살짝 몸을 털어 두 사람이 휘청하였다. 현경더러 가만히 좀 있으라며 말고삐를 빼앗아 든 아란이 부드럽게 말을 달래었다. 말 위에서 달달 떨며 저에게만 의지하던 아란의 모습은 이제 옛말이었다. 이젠 제법 겁먹지 않고 말 위에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아란은 이번에도 현경과 함께 말에 올랐다.
날이 어두워지니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 주막을 찾았다. 여럿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방을 넉넉히 구하기 쉽지 않아 마을 주막에 겨우 남녀만 나누어 각 방에 다 함께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낭패라는 듯 굳은 표정의 현경만큼이나 아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해 했다. 다들 지친 탓에 머리만 대면 자느라 바쁘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거친 사내들 틈에 몸을 뉘여야 하는 현경의 얼굴은 곤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허, 강선생은 여인들 방 앞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얼른 오시오.”
밤이 깊도록 아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현경을 상인 김씨가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차마 말 못할 사정인지라 아란도 어쩌지 하며 발 동동 구르면서도 별수 없이 잠시나마 생이별을 해야 했다.
다음날 다시 도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상단의 행렬 틈에서 퀭한 눈빛의 현경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룻밤 새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현경의 얼굴을 보는 아란의 마음이 다 짠했다.
“간밤에 눈 좀 붙이셨나요.”
“…….”
현경은 대꾸도 없이 퀭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내들 십 수 명이 한 방에 뒤엉켜 누워 있는 걸 눈앞에 두고 자신도 그 공간 안에 몸을 뉘여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쿰쿰한 땀 냄새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데 어찌나 다들 코를 골던지 현경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었다며 치를 떠는 현경이 가여우면서도 아란은 그 말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한낮의 뜨끈한 햇볕 아래를 지나는 동안, 간밤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현경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탓에 현경이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한 것은 아란의 몫이었다.
“정신 놓으시면 안 돼요, 차라리 저를 붙들기라도 하세요.”
겁먹은 아란의 말에 현경이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는지 아란을 꽉 껴안고 아란의 어깨에 고개를 깊이 묻었다. 완전히 아란에게 제 몸을 얽은 현경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안락함에 눈을 감았고 제 몸을 감싼 현경의 팔을 꽉 붙든 아란이 긴장감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꾸만 현경 쪽을 돌아보았다.
“착하지, 살살 가자.”
말고삐를 쥐고 있던 아란이 느릿하게 걸음을 내딛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덧 다시 해가 지고, 여전히 다른 마을의 주막에도 방이 모자랐다. 다시 무간지옥이 시작되는 거냐며 점점 굳어가는 현경의 얼굴이 아른거려 아란은 결국 현경을 붙들고 주막의 평상에 나와 앉았다.
“내일도 갈 길이 먼데, 얼른 들어가 주무셔야지.”
“별 구경 좀 하다 잘까 하구요.”
얼른 들어가 자라는 일행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나란히 평상에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구간 옆을 지키는 말꾼들도 잠에 빠져들 무렵,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현경이 평상에 벌렁 누웠다.
“오늘도 못 자면 기절할 것 같은데, 부인께선 얼른 방에 들어가 주무세요.”
“서방님은, 여기서 주무시려구요?”
“무간지옥에 비하면 여긴 무릉도원 아닙니까, 여름이라 밤바람이 차지 않으니 딱 좋네요.”
“그래도 어찌 밖에서 혼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란이 잠시 갈등하다가 현경의 옆에 누워 버린다. 현경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탁 트인 바깥에서 하늘을 보고 눕는 게 처음이라 어색한지 아란이 얼른 현경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나란히 누운 아란을 보며 현경은 재밌다는 듯 몸을 일으켜 도포를 벗어다가 아란을 덮어 주었다.
“내 각시 누가 훔쳐보면 아까우니까 가려야지.”
“지금 여기 우리 둘 말고 아무도 없는데, 무섭게 괜히 그러십니다.”
“저어기 위에서 별들이 훔쳐보잖아요.”
“어휴.”
낯간지러운 그 말에 아란이 현경의 도포자락을 얼굴 위로 끌어올렸다. 현경이 키득거리며 그 옆에 도로 누웠다. 팔을 내어주자 아란이 현경의 팔을 베고 누웠다.
쌀가루를 흩어놓은 듯 촘촘한 별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현경은 종종 평상에 누워 보던 밤하늘임에도 곁에 누운 아란 덕분에 오늘따라 새삼스러웠다. 아란은 이렇게 편한 자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치 이 세상에 현경과 저 단 둘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설렜다. 어느새 잠을 잊은 눈망울이 별만큼이나 총총 빛났다.
“왜 집에서도 평상에 누워 계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귓가에 가까이 들려오는 아란의 목소리에 현경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경의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오자 아란은 그 풀어진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아란도 잠이 들 때까지 현경의 숨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