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6)화 (46/63)

#46화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가급적 외출을 금하려 했으나, 방 안에서 말라만 가는 아란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성화에 아란은 가끔 집 뒤편의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객사한 사람은 한이 많아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시신도 없이 얼마 없는 옷가지와 유일하게 돌아온 갓을 태워 그 한을 달래고 바람에 놓아 주었다. 그래서 아란은 유독 현경 생각이 나는 날마다 언덕에 올라 맑은 샘물을 떠다놓고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만큼은 방 안에만 있을 때보다 한층 편안한 얼굴을 하는 아란을 보며 뒤를 따르던 여종도 아란이 가자 하고 일어날 때까지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곤 했다.

언덕을 내려오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흙장난을 하는 동네 아이들이 보였다.

“팔구야, 팔구야, 팔구야.”

“다시.”

“왜, 세 번 했잖아.”

“손 빼면 안 된다구 했잖아.”

아이들은 흙을 모아다 손등 위에 올리고는 제멋대로 두드리며 떠들고 있었다. 아란이 그 옆을 지나가려 하니, 여종이 슬쩍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얘들아 마님 지나가셔야지, 근데 뭘 하고 있는 거야?”

“우리 아부지 꿩 잡으러 갔는데 여태 안 와서, 빨리 오라구요.”

“이렇게 해놓고 보고 싶은 사람 이름 세 번 말하면 금방 돌아온대요.”

아이는 흙더미 안에 손을 넣고는 다시 아비의 이름을 불렀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마님도 해보시라며 아란을 졸랐다. 옆에 있던 여종이 난감하여 아이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것이 꼭 자기가 한 말을 안 믿어 주는 것 같아서 한 아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마님 손 더러워지지 않게 제가 해줄게요, 이름만 부르셔요.”

“…….”

아이는 꼬물대는 손으로 제 손등 위에 흙을 턱턱 얹어두고는, 아란을 올려다본다. 아란은 입을 열려다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란은 대신 흙을 두드려 준다던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아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현경아.”

현경아.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아란에게로 모였다. 현경아. 아란은 웅크려 앉아 치마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아이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꿈속의 현경은 그저 아란을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대나무 숲에 또 함께 가자고 했다가, 아란의 노래 소리가 듣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면 어느새 아란은 꿈속에서도 눈물만 흘리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란이 잠에서 깨면 꿈속에서 본 현경의 모습을 한 자 한 자 적어 두었다. 마치 그 하루를 온전히 현경과 함께 보낸 것처럼 상세하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붓을 들어 일기를 써내려갔다.

꿈에 현경이 나오지 않은 날에는 종이 위에 방점 하나만을 찍어 두었다. 한동안 연이어 방점이 찍히는 날에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슬퍼했다. 눈을 뜨면 세상은 밝았지만 그 마음은 문이 닫힌 느낌이었다.

현경은 때때로 숲을 내려오던 그 악몽 같았던 날이 꿈에 나오곤 했다.

거의 정신이 나간 채 아버지가 혹시 살아 있지는 않을까 휘청거리는 다리로 절벽 아래를 굴렀다. 그렇게 한참 숲속을 헤매다가, 어둠이 내리면 얼어붙는 추위에 다신 눈을 뜨지 못할 사람처럼 웅크려 있었다. 그러다 어김없이 아침이 밝으면 눈을 뜨고 숨이 쉬어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눈이 자꾸 감기려 할 때마다, 살아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헤매고 또 헤매다 겨우 버려진 작은 초가집 안으로 기어들어가 하루를 꼬박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산에 땔감 주우러 온 한 꼬마가 버려진 폐가 안에서 시체처럼 쓰러진 현경을 보고 소리를 빽 지르며 줄행랑을 쳤는데,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현경이 고개를 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계곡에 뛰어 들어가 땀과 눈물로 엉겨 붙은 얼굴을 씻어내고 또 씻어냈다.

“사, 사람이죠? 귀신 아니죠?”

다음날, 또 다시 폐가에 고개를 들이밀고 찾아온 꼬마 아이는 일단 현경이 귀신이나 시체가 아님에 안심했고, 전보다 멀끔해진 얼굴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거 줄까요?”

저 먹으려고 가져온 감자 한 알을 내미는 아이를 보며 현경이 웃었다. 아이는 그날부터 폐가에 사는 수상한 여자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아이는 가끔 땔감을 주우러 오는지, 일부러 현경이 있는 곳까지 와서 기웃거리곤 했다. 그리고 올 때마다 다 쓰러져가던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신기해했다.

“난 부실이에요, 우리 아부지가 나 태어난 날 부시리 잡았다고 그리 지었대요.”

“아.”

“근데 부시리 부시리 하니까 촌스러워서 부실이로 하려구요, 부시리 아니에요. 부, 실, 이에요.”

“그래, 부실아.”

“언니는요? 언니는 이름 뭐예요?”

“언니?”

언니라는 말에 현경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부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현경이 작게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안 가르쳐 줄래.”

“왜요, 언니 이름도 나만큼 웃기구나?”

“…….”

“참나, 뭐 그리 비밀이 많아요.”

아이가 입술을 비죽 내밀어 뾰로통해 했다. 이름도 나이도 안 알려주고. 어쩌다 이곳에 쓰러져 있었는지 물어도 현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하고 싶은 말에만 대답을 하는 현경 때문에 부실은 괜히 약이 올라 콧바람을 흥흥, 불었다.

“나는, 내 이름 불러줄 사람이 없어 이제.”

방금 전까지 싱긋 웃으며 말하던 사람이 금방 그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숨죽여 운다. 부실은 순식간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현경을 보며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안 물어볼게요! 울지 마요, 언니.”

이처럼 실실 웃다가 금방 울어 버리는 이상한 여인이지만, 부실은 동네에서 또래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산 속 폐가에 오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분명 딱 봐도 여인이면서 바지저고리를 내내 입고 있는 데다가, 옷이 없구나 싶어 치마저고리를 얻어다 줘도 입지 않더니, 허옇게 바랜 저고리는 또 입는다. 부실은 아무래도 현경이 흰 옷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산 속 돌을 주워다 쌓고 있길래 그게 또 재밌어 보여 조약돌도 잔뜩 주워다 줬다. 부실은 그럴 때마다 희미하게 웃는 현경의 표정이 왠지 슬퍼 보였다.

현경은 널찍한 돌을 긁어 글자를 쓰더니, 쌓아둔 돌무더기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 그 앞에서 절을 했다. 어린 부실은 현경이 엎드린 채 소리 내 우는 것을 보고, 그 돌에 써있는 글자가 사람 이름이라는 걸 눈치껏 알게 되었다. 이름이 쓰여진 돌은 두 개였다.

“뭐해요, 그걸 왜 뜯어요!”

현경은 문살에 발라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저러면 밤에 들어오는 찬바람은 어쩌려고. 부실의 잔소리에도 현경은 구멍이 송송 뚫린 창호지도 마저 뜯어냈다. 안 그래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뼈만 남은 생선처럼 앙상해 보였다.

현경은 뜯어낸 종이 위에 타다 남은 숯 조각으로 뭔가를 써내렸다. 현경이 손을 움직이면 멋진 글자들이 그려져 조각난 종이를 채웠다. 한자를 저렇게 멋지게 쓰는 여인을, 부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글도 모르는 주제에 글씨가 써진 창호지 조각이 어쩜 그리 탐이 나던지. 부실은 현경이 휘갈겨 쓰다만 종잇조각 몇 개를 주워다가 몰래 품에 숨겼다. 그리곤 인사도 없이 숲을 빠져나와 마을 어귀에서 종이들을 늘어놓고 이리 저리 돌려보며 구경을 했다.

“허, 이거 설마 니가 쓴 거니?”

“아뇨. 그, 주운 거예요.”

“그래, 그럼 이것 나에게 팔아라.”

길을 지나던 어느 양반 하나가 바닥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감탄하며 부실에게 엽전 몇 개를 쥐어주고 그 종이쪽들을 사갔다. 얼떨결에 손에 쥐어진 엽전 몇 개를 들고서 부실은 벌벌 떨며 다시 현경의 폐가로 찾아갔다.

“너 언제 갔었어?”

“흐윽.”

현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진 부실은 미안하다고 현경에게 싹싹 빌었다. 대뜸 울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자 현경이 당황해서 아이를 달랬다. 부실은 부들부들 떨며 꼭 쥐고 있던 엽전들을 현경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안 판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없어진 종이들을 찾고 있던 현경은 그제야 우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아이가 준 엽전 중에 하나를 다시 부실에게 쥐어 주었다.

“야아, 누구 덕분에 굶진 않겠네.”

부실이 판 그 종잇조각들은 강무와 아란에게 올릴 제문 중 일부였다.

그렇게 싹싹 빌며 울던 부실의 순진한 모습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후로 지난번 글을 사간 양반이 부실을 알아보고 마을에서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양반의 입소문으로 현경의 글을 찾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자, 현경은 생각지도 못하게 부실을 통해 글을 대신 써주고 그 값을 받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마을 양반들의 선물용 족자라도 하나 써주는 날엔 묵직한 엽전 꾸러미가 부실의 손목에 들려오기도 했다.

처음엔 쭈뼛거리며 현경에게 미안해하던 부실도 현경이 심부름 삯으로 챙겨 주는 용돈에 맛을 들렸는지, 이젠 저가 되레 현경에게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쓴 것 중에 괜찮은 거 없어요?”

“너 어린애가 벌써부터 장사꾼처럼 그러면 못 써.”

“다 언니 좋으라고 그러는 거지.”

글을 팔아 돈을 사다니, 아란이 알면 혼쭐난다며 꾸중 들을 일이었다. 현경은 씁쓸히 웃다가 이내 고개를 휘 젓고는 받은 돈 만큼의 허울 좋은 글들을 써내렸다. 그 돈으로 또 다시 붓과 종이를 사고, 그리고 술을 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현경은 잠들지 못했다.

여느 날처럼 폐가에 놀러온 부실은 집 주위를 둘러보다가 비탈에 놓인 경상을 괜히 툭 건드렸다. 절에서 내다 버리려던 것을 주워왔다고 하는데 다리길이가 안 맞아 기우뚱거리는 것을 현경은 돌무더기 앞에 놓아두었다. 가끔 현경이 산에서 따온 과일들이 그 위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저 경상에 달린 작은 서랍 안에는 글자를 모르는 부실이 봐도 유독 글자 모양이 예쁜 종이들이 들어 있어서, 부실은 늘 저 서랍 속을 탐냈다.

“이 서랍에 있는 것 좀 꺼내 봐요, 되게 예쁘던데. 값도 많이 쳐줄 걸?”

“그건 파는 게 아니야.”

부실이 슬쩍 꺼낸 말에 현경이 순간 표정을 굳힌다. 현경의 표정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침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부실은 괜히 머쓱하여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돈도 좀 생겼겠다, 이불이라도 한 채 해요. 아씨가 사는 집이 이게 뭐람.”

“내가 돈이 어디 있어.”

“맨날 술 사 먹느라 그렇지. 아주 술을 담그지 그래요.”

“그래야겠네.”

부실은 그렇게 매일같이 좁은 방 안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글을 쓰는 현경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엔 절대 내려오지도 않고 가끔씩 부실이 놀러오면 종이와 술 심부름을 시켰다.

여인이면서 글도 잘 알고 또 술도 말술이었다. 보면 볼수록 여태 본 적이 없는 신기한 부류의 사람이라 부실은 틈만 나면 먼 길을 감수하고도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늘 색이 바랜 홑옷만을 입고 있던 현경이었는데. 부실이 키가 한 뼘 더 자란 것을 자랑하러 오랜만에 숲을 찾았던 어느 날엔가, 집 밖에 나와 돌무더기 앞에 서 있던 현경은 부실이 가져다 준 청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언니, 오늘은 흰 옷 안 입었네요?”

“이제 그만 입으려고.”

“왜요?”

“음, 계속 입고 있으면 좋은 데 못 갈까봐.”

“누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아이를 보며 현경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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