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45)화 (45/63)

#45화

자꾸만 깊은 숲길로 말을 이끄는 나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땐 해가 곧 떨어질 듯 하늘빛이 변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장에게 고향이 어디인지를 말한 적이 없는데. 거침없이 말을 이끌고 출발하기에 별 생각 없이 말고삐를 맡겼던 현경은 뒤늦게 여기가 어딘가 싶다.

“저, 이보시오.”

“예, 나리.”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가는 것이오?”

“그럼 알지요.”

“이쪽은 길이 없는 숲 같은데, 여기서 나가 큰 길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현경의 말에도 대꾸가 없던 나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멈춘다. 아까부터 계속 약간 오르막길인가 싶더니, 낭떠러지가 눈앞에 보였다.

“잠시 여기서 쉬어 가시지요.”

“무슨, 불안하게 절벽에서 쉬어 갑니까.”

현경은 위험하다며 투덜댔지만 나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영 제멋대로인 나장이 이상했지만 높은 데서 가는 길을 내려다 볼 요량인가 싶어, 현경은 잠시 쉬었다가 나장에게 길을 제대로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경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나장은 들고 있던 주릿대로 말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말이 히힝 울음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고 현경은 높이 치켜든 말 앞발에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흥분한 말은 펄쩍펄쩍 뛰다가 방금 전에 올라온 숲 아랫길로 사라져 버렸다.

멀어지는 말 울음소리가 나무에 부딪혀 울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무 뒤에서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현경이 어안이 벙벙하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나장이 주릿대로 현경의 어깨를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물러서라, 어디 얼굴 좀 보자.”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도포를 입은 사내가 다가와 현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 뒤에는 강무가 서있었다.

“아버지?”

현경이 놀라 강무를 불렀지만 강무는 표정 없이 굳은 얼굴로 현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처음 보는 강무의 차가운 얼굴과 낯선 사내, 복면의 자객들. 현경은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말로만 듣던 얼굴을 이리 마주하게 되었으니.”

“누, 누구시오.”

“과연, 사내라 하기엔 곱상하니. 여태 왜 아무도 몰랐을까. 이 얼굴로 그런 흉측한 복수를 품고 있었단 말이지.”

“복수라니, 아버지, 이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래도 강무 자네에게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니, 보통 치밀한 놈이 아닌가 보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그런 순진한 얼굴로 본색을 숨길 생각하지 마라, 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왕실의 저주고 죄악이야.”

“그게 무슨.”

“널 살려둔 건 강무의 실수였다, 이제 내가 모든 걸 바로잡을 때가 왔지.”

하얗던 현경의 얼굴빛이 박윤의 말에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울컥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참아 내느라 입술을 꾹 깨물어 봤지만, 여전히 관망하듯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서있는 강무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저주, 죄악.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진정 죄이고, 실수였을까.

아버지도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현경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두려운가.”

박윤이 천천히 다가와 옆에 서 있던 나장의 칼을 뽑아들고 현경을 향해 겨누며 물었다.

“네놈 부인은 목에 칼을 대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데, 이제껏 지아비 행세를 해온 자가 이리 두려워해서야 되겠느냐.”

현경이 깜짝 놀라 강무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지금, 뭐라 지껄이는 겁니까.”

“…….”

현경의 눈빛에도 강무는 여전히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이자는 누굽니까. 아버지, 어째서 부인이 왜.”

“어허, 어딜 보느냐 이쪽을 봐야지.”

강무를 바라보던 현경은 치밀어오는 분에 굵은 눈물을 뚝뚝 쏟아냈다.

“네 이놈!”

“이놈이라니, 강무 자네 예절교육이 영 시원찮았군.”

현경이 사내에게 악에 받쳐 소리쳤다. 박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현경을 보며 박윤은 그 눈가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손에 든 칼을 들어 칼끝으로 현경의 갓을 툭 걷어냈다. 현경의 갓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여인의 몸을 하고도 꼴에 부인이라고 신의라도 있다 이건가. 안심해라 네 놈에게 속고 산 것이 불쌍하여 고통 없이…….”

현경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부릅뜬 눈가가 더욱 붉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땅에 짚은 채로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흙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용케도 이제현의 여식을 꾀어 혼인까지 했겠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

“네 놈이 살아 있으니 모두가 불편하지 않느냐.”

박윤이 칼을 세워 똑바로 잡아들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강무가 다가와 박윤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하지.”

“정에 흔들려 그르칠 만한 일이 아니네.”

박윤은 강무를 못미더워 했지만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박윤을 보는 그 눈빛에 비친 살기에 움찔하여 칼을 넘겨주었다. 강무는 고개를 돌려 현경을 뚫어져라 보며 박윤에게 말했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내가 마무리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이번엔 제대로 마무리하게.”

“물러서 있게, 피가 튈지 모르니.”

박윤이 강무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옆에 서있던 자객들도 강무의 눈짓에 뒤로 물러나 조금 떨어져 섰다.

강무는 다시 현경을 내려다보았다. 붉어진 눈에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강무는 달무리 지던 그날, 이 눈망울을 내려다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슬퍼하지 말거라. 불안해하지 말거라. 지켜주마 아가야.

강무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현경을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엔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모든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 불쌍한 것, 이 가여운 것. 절벽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거세다. 바람은 칼끝을 스치며 웅 소리를 내었다.

“현경아.”

강무는 바로 앞에 있는 현경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두려움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으나 현경은 그런 강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무가 현경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그 크고 거친 손으로 현경의 눈가를 슥슥 닦아내었다. 투박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현경이 눈을 깜빡 깜빡 하였다.

“지금까지 저놈이 했던 말은 전부 거짓이다.”

“…….”

“이제부터 이 아비가 하는 말만 듣거라, 이 말들은 다 참이다.”

“아버지.”

“그날 널 도성 밖으로 데리고 나온 순간부터 쭉 넌 내 귀한 딸이었다.”

“…….”

“바지저고리 입었을 때부터는 내 잘난 아들이었고.”

“…….”

“네가 살아 있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이 강무의 머리공이다.”

“…….”

“모두 다 잊고,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살아라, 꼭 살아라. 네 명줄 다할 때까지 살아.”

강무는 현경의 눈을 보며 어깨를 한 번 꽉 쥐고는 현경의 뒷머리를 당기듯이 안아 고개를 숙이게 했다. 강무가 힘주어 누르는 통에 현경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눈물만 툭툭 흘렸다.

목을 내어 칠 것처럼 자세를 잡은 강무는 칼을 내려치는 대신 그대로 뒤를 돌아 오른팔을 힘주어 뻗었다. 단칼에 뒤에 있던 자객 하나가 소리 없이 엎어졌다.

갑작스런 강무의 행동에 깜짝 놀란 나장과 자객이 강무에게 달려들었다. 두 자루의 칼과 한 자루의 칼이 맞부딪쳤다.

“무슨 짓이냐.”

자객의 말에 강무는 대답 없이 눈을 부릅떴다. 짧은 침묵이 신호라도 된 듯 강무가 둘의 칼을 쳐냈다. 쇠가 부딪치는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자객이 휘두른 칼보다 강무의 검이 더 빨랐다.

철컹, 소리와 함께 칼을 떨군 자객과 나장이 쓰러졌다. 바닥에는 후두둑 쏟아진 피가 어느새 흥건했다. 순식간에 셋을 쓰러뜨리고 저 앞에 박윤만이 홀로 남았다.

“강무 네 이놈! 끝까지 미련하기는.”

박윤이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칼을 뽑아들었다. 강무는 그대로 달려가 박윤을 한 팔로 끌어안고 칼을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박윤이 겨누고 있던 칼이 강무의 허리춤에 그대로 파고들었다.

강무의 몸에 칼이 박혀 박윤이 꼼짝하지 못하자, 강무는 박윤을 붙잡은 채 그대로 달려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박윤의 짧은 비명 소리가 금세 불어든 바람에 절벽 아래로 흩어졌다.

사방이 고요해졌지만 현경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고개 숙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힘주어 꾹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비집고 나왔다.

바람 소리가 마치 칼날을 스치는 소리 같아 귀를 막은 채로 현경은 목 놓아 울었다. 현경의 비명은 절벽 아래에까지 닿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라는 건, 평소엔 그냥 지나칠 법한 창틈의 바람 한 점에도, 덜컥 거리는 문소리 하나에도 잔인하리 만치 묻어오는, 마치 온 만물이 보내는 경고와 같았다.

이른 아침 머나먼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올 현경을 기다리면서 아란은 경대를 열어 단장을 준비했다. 그러다 손을 놓치는 바람에 부러져 버린 비녀를 보며, 아란은 아마 곧이어 들렸던 기이한 대문 소리를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마님.”

방 안의 아란을 부르는 여종의 안타까운 목소리, 마당에 혼자 서 있는 조내관의 어두운 얼굴과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현경의 모습도. 그리고 조내관의 입에서 나온 믿기 힘든 말들을 들으며 아란은 이 모든 게 한바탕 꿈인가 싶었다.

악몽을 꾸고 있구나, 지독한 악몽이야. 그래서인지 아란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양반네들의 소매춤을 노린 좀도적들의 습격으로 절벽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궁에 복귀하여 현경이 고향에 잘 도착하였는지 소식을 기다리던 조내관은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그 나장을 수소문하였다. 하지만 궁에서 현경에게 따로 내린 전교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 전교를 전했다는 나장은 몇 년 전 관아에서 탈영한 자였고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현경의 고향으로 급히 보낸 조사관들이 한참만에야 낭떠러지 근처에서 발견한 것은 시신 세 구와 피가 낭자한 흙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갓 하나뿐이었다.

산적 떼의 습격으로 객사하는 일이야 비일비재했던 터라, 관아에서도 죽은 목숨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조사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아란은 조내관이 전해 준 현경의 갓을 받아들었다. 흙먼지가 묻고 모양이 상해 있어 혹시나 현경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잘 못 안 게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현경이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박음질해 주었던 갓끈 부분이 아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현경과 마주 앉아 책을 읽던 나날들이 아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현경이 아란에게 남긴 마지막 글이 되어 버린 서신을 건네는 조내관의 표정은 참담했다.

급히 쥐어준 듯, 봉투에도 넣지 못하고 곱게 접힌 서신 속 글은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만큼이나 짧았다.

늦지 않게 돌아오신다던 님은 돌아오는 길이 고단하여 잠시 쉬다 오시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상례에 들어가는 모든 물자와 비용을 대겠다며 궁에서 벌써 세 번째 사람이 다녀갔다. 거듭 사양했지만 왕은 직접 조내관을 보내 부의를 전했다.

강무마저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현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사돈과 사위이기 전에 아꼈던 제자 둘을 잃었다. 제현은 때때로 깊이 탄식하며 별당 쪽을 바라보곤 했다.

현경의 상여가 나간 후로도 아란은 줄곧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눈을 하고선 별당 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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