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7)화 (37/63)

#37화

아란도 처음엔 정말 현경에게 급하고 중한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아란의 귀에 들려오는 말들은 중한 일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뿐이었다. 현경이 기방에 아예 눌러 살려고 한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는 분명 관복 차림으로 아침에 나간 현경이 어느새 도포로 갈아입고 오전부터 기방에 있더라는 말까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관직을 얻은 현경을 시기하여 그런 말들이 도는가 싶었는데, 아주 허튼소리는 아닌 것 같아 아란은 점점 마음이 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란이 지나가면 수군대며 뒤따르는 말들이 있었다.

“벼슬을 얻자마자 술과 기생이라니.”

“잘 사는 것 같더만 어째 그럴까, 신랑 나이가 너무 어리긴 했지?”

“그 댁 마님만 불쌍하게 됐지 뭐.”

“에휴, 그 강도령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역시 사내는 출세해 봐야 안다고.”

“아 왜, 그 홍옥이 하고는 전부터도 각별했다잖아.”

아니다, 아닐 거라, 그런 게 아닐 거라. 아란의 믿음도 점점 흔들려 속이 상했다. 대강의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나 불안하고 속이 상하진 않을 텐데.

아침에 혼자 서둘러 입궐 준비를 하고 있는 현경에게 아란이 다가섰다. 혼자 하겠다는 걸 관복 매듭을 당겨 굳이 현경을 마주 세워놓고, 아란은 묵묵히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오늘도 많이 바쁘시겠지요.”

“예.”

“또 기방에 가십니까.”

“…….”

현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란을 보았다. 저에게만큼은 비밀이 없던 사람이 또 말을 숨기려 하기에 아란도 갑갑한 마음에 못난 마음이 삐죽 나오고 만다.

“하고픈 일이 그리 많다 하시더니, 이젠 기생첩이라도 두시려구요.”

“그런 거 아닙니다, 다 아시는 분이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게 뭔지, 이젠 모르겠습니다.”

아란은 한숨처럼 그 말을 뱉고는 관복 매듭을 정돈하여 묶었다. 대체 뭘 그리 숨기는 겁니까. 억울한 듯 저를 보는 그 눈망울이 더 야속해져서, 아란은 손에 쥐고 있던 매듭을 꾹 짚고는 현경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차라리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면 모를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도 불안하고 불편해 하니,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올라오다가도 말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뭔가를 잘못하기라도 했나, 엉뚱하게 번져가는 생각에 아란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아란은 여종마저 따르지 못하게 하고 홀로 대문 밖을 나섰다. 생각해 보니 현경과 함께 산책을 나간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늘 함께 다니던 두 사람인데 부쩍 아란 혼자 다니는 모습이 많이 보이자 거리의 사람들은 그런 아란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아란은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그 시선들을 지나쳐 걸었다. 그러다 문득 현경과 함께 갔던 강가에 바람이나 쐬고 싶어져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길이라 역시 혼자 걸으려니 더 겁이 났다. 그냥 돌아갈까, 강가에 가도 왠지 낯선 사내들만 있을 것 같아 아란은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그때 길목 옆에 있는 야산 쪽에서 스스 하며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 이 길목을 으슥하게 느끼는 것은 이 산에서 나오는 음산한 기운 탓도 클 것이다. 아란은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군데군데 쌓인 돌무더기들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무슨 용기에서인지 야산 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소반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성황당이 보이고 그 주위 나무는 저들끼리 부딪치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아란이 시선을 돌리니 족제비 같은 산짐승 하나가 돌무더기 하나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훠이, 저리 가.”

아란은 손에 들고 있던 쓰개치마를 휘두르며 산짐승을 쫓아냈다. 무너져 버린 돌무더기를 보며 아란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돌들을 주워 하나하나 다시 쌓았다.

“산짐승이 그런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아란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혼잣말을 했다. 누군지도 모를 돌무더기 주인을 달래며 조심스레 돌을 쌓았다. 돌을 쌓다 보니 다른 잡념이 들지 않아 아란은 금세 집중하여 돌을 다시 쌓았다.

합장하여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웬 여인 하나가 저만치 떨어져서 아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란은 흠칫 놀라 등골이 오싹했다.

귀신.

도성 외곽 쪽 야산엔 사람 아닌 것들이 많으니 함부로 가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이 뒤늦게 떠올라 아란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전보다 더 예쁘게 쌓아놓으셨네요.”

예상과 달리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아란은 순간 참았던 숨을 훅 놓았다. 그런 아란을 보며 여인이 빙긋 웃는다. 아란은 저보다 두어 살 정도 더 어려 보이는 여인의, 파리한 느낌마저 드는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 근처에 사는 분이신가요.”

“저는 저 산 밑에 살아요, 가끔 혼자 여기 오는데 오늘은 고운 분이 계시길래.”

옷차림이 허름한 것을 보니 양반가 규수인 것 같진 않고 길게 땋은 머리를 보니 나이가 많지 않은 소녀 같기도 했다. 여인은 아란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저는 그저 족제비가 헤집어 놓았기에, 그냥 두기가 그래서요.”

“아마 그 돌무더기 주인이 아가씨 고운 마음을 고마워 할 거예요.”

여인이 또 맑게 웃었다. 아란은 여인의 그 미소가 어쩐지 낯설지 않아서, 문득 동그란 얼굴 하나가 떠올라 집에 두고 온 현경이 보고 싶어졌다.

현경은 관복 차림으로 정문을 통해 입궐을 하면 뒷문을 통해 도포 차림으로 궁을 빠져 나왔다. 기한이 곧 다가오는데 조사는 잘 되어 가냐고 물어오는 조내관에게 현경은 표정 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이 짧아 다행입니다, 오래 할 일이 못 되네요.”

“아직 궁 안인데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올리면 안 됩니다, 나리.”

“임무 마치면, 주상전하께 포상 받는 것 대신 청 하나만 올려도 됩니까.”

“무슨 청을 드리려 하십니까?”

“그냥 임무 마치면요.”

“전하께서 판단하시겠지요.”

비밀문을 열어 주며 조내관은 수척해진 현경을 보았다. 현경은 이제 복면을 쓰지 않고 한걸음에 숲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기방에 현경이 나타나자 기부는 익숙하게 현경을 방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어떤 아이를 들일까요.”

“이번엔 이쪽에서 한잔하려 하는데.”

현경은 어제 보았던 행랑채 같은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부가 그 말에 놀라며 재차 확인하였다.

“나리께서요?”

“안 되는가?”

“아뇨, 안 되긴요. 저 그럼 얼마간 머무르십니까?”

“사흘 정도?”

현경은 사흘치 값을 치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한낮이라 그런지 옆방에선 코고는 소리만이 들렸다. 어제 혼자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쯤이면 누군가를 만나겠지. 현경은 옆방에 귀를 기울이며 기부가 들여온 술상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일어나려나.

얼마간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현경은 얼른 벽에 바짝 붙어 소리에 집중했다.

간혹 다른 방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정체 모를 이상야릇한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묻히기도 했지만 현경은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워 차근차근 대화를 듣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대감께서도 이제 성가셔 하신다.’

‘쉿, 깬다.’

한참 코를 굴던 암행어사가 일어났는지, 괄괄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게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날카롭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금세 암행어사와 어울려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노름판이 벌어지고 기생이 들어왔는지 여자 목소리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한참을 떠드는 소리에 현경은 뻐근한 목을 주물러 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내 중 한 명이 기생들을 내보내는 것 같았다. 아쉬워하는 암행어사를 달래며 세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게 저희가 돈을 빼오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해서.’

‘어렵기는, 내가 모든 것을 손 써두고 나온 것인데.’

‘전에 드린 돈은.’

‘에이, 그깟 푼돈으로 뭘 하나. 대감께서도 나이가 드시니 이제 배포가 영…….’

‘하하, 그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말이 나와 말이지, 자네들이 모시는 도련님 때문에 나만 이게 뭔가. 나 아니었음 시골서 썩었을…….’

‘허어, 목청이 참. 고정하시고 어째, 술을 더 들여야겠지요?’

그 뒤로 술상이 몇 번 더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웃다가 고함을 치기도 하고, 목소리를 낮추라며 달래는 소리까지 귀 기울여 듣다보니 대충 정리가 되었다.

호조판서가 돈을 주고 암행어사를 매수했다. 매수된 암행어사는 지방에 있던 호조판서의 조카와 외손자를 추천하여 궁에 입성하도록 왕에게 거짓 서계를 올렸다. 그중 호조판서의 외손자가 유독 평판이 좋지 않은 바람에 추궁을 피하고자 암행어사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신, 호조판서를 압박하여 그에게 매번 돈을 받아낸다는 방편까지 만들어 놓고서.

받은 돈의 출처가 호조에서 빼돌린 나랏돈일지도 모르는 정황도 있었다. 엉망이구만. 현경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이제 서계만 올리면 되겠다 싶은 생각에 겨우 안도를 했다.

잠잠하던 옆방에서 다시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경이 또 다시 귀를 쫑긋 세우고 벽에 붙으니, 두 사내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하지만 어쩐지 아까 전부터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요상한 소리들이 더 크게 섞여 들어서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현경은 하는 수 없이 벽 대신 문 틈에 기대어 문 밖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갈수록 액수를 높이는데.’

‘귀찮은 놈, 빨리 처리해야지.’

‘헌데, 이 옆방 너무 조용하지 않나.’

‘누구? 옆방에 누가 있어?’

‘혼자 들어간 자가 있다던데, 좀 수상한데.’

현경은 순간 소름이 돋아 기침이 나올 뻔했다. 그때 사내들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다가 작게 들려왔다.

‘정 찜찜하면 이따 한 번 들여다보고 혼자 있거든 가서…….’

‘혹시 모르니, 저 자가 나오면 내가 처리하지.’

어, 어쩌지. 현경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머리를 굴렸다. 그때 문 밖에서 기생들 여럿이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경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문틀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방 앞을 지나던 기생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나으리, 혼자 뭐하셔요?”

현경은 다가오는 기생의 손목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이름이, 어떻게 되오?”

“어머나, 나으리는 내가 좋은가 보네. 나 기다리다 나오신 거예요?”

현경이 일부러 주정부리듯 눈을 반만 뜨고 묻는데, 그런 현경을 보며 기생이 방긋 웃으며 화답했다. 지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져 현경은 하는 수 없이 기생의 손목을 좀 더 잡아끌어 방으로 들였다.

“아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에.”

“잠깐만 여기 있어요.”

현경은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현경의 손에 이끌려온 기생은 수줍어하면서도 샐쭉 웃으며 기부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아양을 부렸다. 날이 어두우니 홀로 집에 가긴 틀렸다 싶어 현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 어쩐다.

현경이 술에 취해 쪽방에 기생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에 기방 안이 술렁였다. 손을 보내고 잠시 처소에 들어가 쉬려던 홍옥은 기생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기부가 사흘치 값 받았던데.”

“그래서 들어간 애가 누구래? 아휴, 좋겠다아.”

어제 쪽방에 대해 묻더니 현경이 기어코 그곳에 들어갔구나. 홍옥은 고민 끝에 내버려둘 수가 없어 쪽방 쪽으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홍옥은 현경이 있다는 쪽방 앞에 섰다. 홍옥이 마당에 나와 있자 기방 안에서 술을 마시던 다른 선비들이 의아하여 바라보았고, 어린 기생들이 다가와 홍옥을 말렸다. 홍옥 주위로 사람이 모여들자 현경의 방 앞을 서성이던 사내들도 다른 쪽으로 비켜섰다.

“언니, 행수 어른 보시면 큰일 나요.”

“…….”

홍옥은 저를 말리는 눈길을 뒤로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는 현경이 기생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고 있었다. 홍옥의 등장에 안에 있던 기생이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술병을 놓쳤다.

홍옥은 쪽방 안으로 들어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기생에게 이만 나가보라 했다. 그리고는 기방 기부에게 사람들을 물리라 말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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