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15)화 (15/63)

#15화

현경이 터덜터덜 동재로 돌아오니 형님 셋이 쭈뼛거리며 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어기 박형이 산다 하니 한잔하러 가자.”

“전 됐습니다, 일찍 잘 테니.”

“어허이, 거 형님들이 가자면 냉큼 따라오지 녀석이.”

“아, 무슨 허구한 날 기생집입니까, 정형은?”

“오늘은 기생집 안 간다, 이놈아. 주막에 갈 거야.”

현경이 안 간다고 버티는 걸 김형과 정형이 양팔을 잡고 기어코 주막까지 끌고 갔다. 어색하게 앉아 눈치만 보던 넷은 탁주 몇 사발씩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풀어져 속엣말을 털어놓았다. 실언은 현경이 아니라 내가 했다느니, 네 말이 맞니 틀리니 하며 얼큰히 취해 꺼내는 말들은 각자의 진심이었다.

“네 놈 그렇게 뛰쳐나가고 내가 가만 생각하다 보니, 아 갑자기 내 막냇누이 생각이 문득 나는 거야.”

“맞어, 이 집 막내가 똘똘했거든.”

“그 불쌍한 것이 누워서 했던 말이라고는, 자기는 다음에 꼭 사내로 태어날 거라고, 매상 하던 말이 그거였어. 가기 전까지.”

김형은 벌겋게 익은 코끝을 잠시 훌쩍였다. 동향 사람인 정형도 김형의 막냇누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헤아렸다. 현경이 제현을 쫓아나가는 것을 보고 놀란 마음에 따라나섰던 세 사람은 제현과 현경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정말 제현의 말처럼 틀린 것 없는 현경의 말에 새삼 자신들이 했던 말들을 되새겨 본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을 더 마시다가 동재로 돌아온 현경은 노복으로부터 강무의 답장을 건네받았다.

강무의 답장은 말도 없이 떠난 현경에 대한 노여움보다는 당혹스러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옆 동네 마실 나간 아이가 도성에 와있다 하니 그 황당함이야 어찌 다 알겠느냐마는, 그나마도 강무는 당장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느 댁에서 머물고 있는지, 언제까지 도성에 있을 생각인지를 묻고는 그 나머지는 전부 조심하라는 말뿐이었다.

여인인 것을 들켜 소란이 일거나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으니, 몸가짐을 주의하고 섣불리 낯선 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랜만에 그리운 아버지의 글씨를 보며 미소를 짓던 현경은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답장을 써내렸다. 마침 제현의 문중 모임을 따라가는 노복이 가는 길에 서신을 전해드리겠다 하기에, 현경은 하고픈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아 급히 붓을 놀렸다.

다음날 아침, 제현을 배웅하고 돌아온 현경은 방에 누워 빈둥대고 있었다. 정형은 잠시 외출했고, 어제도 고향 생각이 자꾸 난다던 김형과 박형은 강연이 없는 동안 고향에 내려갔다 온다며 길을 떠났다. 현경은 책을 읽을까 하다가 혹시 궁금한 게 생길까 봐 꾹 참고 있었다.

“책을 못 읽으니, 딱히 할 것이 없네.”

낯선 도성에 동무도 없고 형님들도 없으니 현경은 금방 따분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현경이 누워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현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께서 서책을 챙겨 별당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아란을 모시는 여종이었다. 현경을 수상한 눈초리로 보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공손히 와서 부르는 통에 현경은 얼른 아무 서책이나 집어 들고서 가죽신부터 신었다. 분명 처음 가보는 길일 텐데 어찌 먼저 와본 사람처럼 자신보다 앞서 걷는 것인지, 여종이 기이하게 여기며 현경의 들뜬 발걸음을 겨우 쫓아 걸었다.

현경이 별당에 도착하여 가지런히 가죽신을 벗어놓고 아란의 방에 들어섰다. 지난밤엔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아란의 방 한 편에는 서책이 가득했다. 아란은 방에 들어온 현경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현경은 아란이 입은 미색 저고리와 분홍치마가 참 곱다는 생각을 하며 아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막 자리에 앉던 현경은 아란의 말에 엉거주춤 선 채로 멍한 얼굴이다가 이내 감동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 어쩜 이렇게 사려 깊으신지.”

아란은 바로 어제, 문중 모임을 가신다던 아버지가 찾아와 자신이 없는 동안 문하생들이 모르는 것을 묻거든 답을 해줄 수 있는지 묻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처음엔 얼떨떨했다. 과연 여인에게 글을 물어올 리가 있을까 반문했더니, 아버지는 누구라는 말없이 그저 그러고 싶다고 한 사내가 있다 하셨다. 혹시나 했던 그 사내는 역시나 현경이다. 어찌 됐든 아버지께서도 총명하기 이를 데 없다고 칭찬하던 사람이니 아란은 사뭇 진지하게 현경의 질문을 기다렸다.

“헌데 제가 이럴 줄 모르고 미처 준비를 못했는데.”

“그럼 내일 다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 그러면 조금 더 있다가 가지요, 기왕 왔으니.”

아란은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길은 서책에만 있었다.

“참, 동재 앞 은행나무에 노란 단풍이 참 고와요.”

“예.”

“언제 한 번 보러 오세요.”

“…….”

문하생들의 숙소인 동재에 아란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란은 대답할 것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말없이 마저 책장을 넘겼다. 현경은 어제 끼워둔 은행나무 잎이 생각나 들고 온 서책을 펼쳐 들었다. 현경이 손에 든 책 사이에서는 노란 은행나무잎 대신 납작하게 마른 메꽃이 툭 떨어졌다. 현경이 맨 처음 도성에 온 날 동재 뒤에서 꺾어다 끼워둔 것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네. 어쨌든 직접 보면 아가씨도 감탄하실 겁니다.”

그러고는 납작해진 메꽃을 조심히 주워다 아란의 책상 위에 올려둔다. 연한 분홍빛이 고왔을 메꽃은 비쩍 마르고 짓눌려 갈색 빛이 돌았지만 꽃자루의 모양이 제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꽃을 뜯어다 먹는 이는 보았어도 말려다 간직하는 이는 처음 보기에 아란이 그제야 서책에만 머물던 시선을 옮겼다.

“꽃은 꺾지 않고 가만히 두고 보아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지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아란은 현경이 준 메꽃을 다 읽은 서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 현경이 그 모습을 보고는 수줍게 웃었다. 다른 책을 꺼내어 첫 장을 넘기는 아란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고 여전히 곧았다. 현경은 아란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나, 계속 쳐다보았다가는 한소리를 들을 게 분명하기에 그만 시선을 거두었다.

현경은 방을 둘러보다가 서책이 꽂혀 있는 선반에 관심을 돌렸다. 읽을 만한 서책이 없나 뒤적이다가 한 권을 골라 책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는 척하며 힐끔 아란을 보았지만 아란은 여전히 독서 삼매경이다. 현경은 대충 책장을 몇 번 넘기다가 다시 선반 위에 놓아두고 뭐 재밌는 게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바느질함 옆에 놓인 수놓은 천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바느질은커녕 손에 바늘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현경의 눈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이거, 아가씨가 하신 겁니까?”

“…….”

“저도 자수나 배워 볼까 봐요.”

대답하는 것도 귀찮을 만큼 현경에게 신경을 쓰지 않던 아란도 현경의 그 말엔 조금 티 나게 비웃었다.

아란은 점점 어수선해지는 현경의 움직임 때문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괜히 있으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되었다. 현경은 방 안의 화초 끝을 손으로 톡톡 건들이다가, 서책을 뒤적거리다가 이번엔 바느질함을 뒤적이고 있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현경의 행동을 의식하고 있던 아란은 그저 애처럼 산만한 현경을 보며 저런 이가 책은 또 진득이 본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뒤돌아 앉아 한창 바느질함에서 이것저것 꺼내고 있는 현경을 보던 아란은 현경의 도포 끝자락이 뜯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계속 눈에 거슬릴 것 같아 아란은 현경을 불렀다.

“그 바느질함 가지고 이리 앉으세요.”

현경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가 아란의 말대로 바느질함을 들고서는 얌전히 아란 앞에 앉았다. 아란이 책을 덮고 책상을 한쪽으로 치워두더니 현경더러 도포를 좀 벗어 보라 한다.

“예? 벗으라니요?”

“옷이 상한 데가 있어 그럽니다.”

“아.”

현경은 머쓱한 표정으로 도포를 벗어 아란에게 건넸다. 아란은 바느질함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어 능숙하게 뜯어진 부분을 꿰매었다. 현경은 그런 아란의 손길이 신기하여 바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란이 또 해진 곳이 없나 도포를 이리저리 살피자,

“아 저, 소매 쪽도 좀…….”

현경이 수줍게 말끝을 흐린다. 아란이 소매를 펼쳐보니 소매 안쪽 자락이 제법 크게 찢어져 있었다. 여태 이걸 어찌 입고 다녔나 싶어 아란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뭘 했길래 소매가 이 지경입니까.”

“그, 도성 올라오던 길에 나뭇가지에 스쳤나 봅니다.”

“옷이 상하거든 동재에 있는 여종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혹, 다른 의복은 더 없으십니까.”

“그때 워낙 정신없이 도성에 올라와서.”

민망한 듯 현경이 괜히 웃는다. 도성에 올라온 지가 언젠데 고작 이 도포 한 벌로 버텨 왔으니 하얀색 도포는 누더기가 될 판이었다. 이런 누더기를 입고도 기생들이 따른다 하니 우스울 노릇이다. 아란의 눈에 능글맞기로는 여느 사내 뺨치는 현경이라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 같기도 했다.

“갓도 이리 주세요.”

현경은 얌전히 아란이 시키는 대로 갓도 벗어 건넨다. 아란은 역시나 갓 끈이 해진 곳을 찾아내어 꼼꼼히 박음질하였다. 현경은 자신을 챙겨 주는 아란을 보며 괜히 히죽히죽 웃는다.

“왜 웃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바느질을 하던 아란이 물어도 현경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스스로도 왜 웃음이 나오는지 분명히는 알 수 없었지만, 뱃속이 간질간질 한 것 같기도 하고 뒷덜미가 따끈해져 오는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현경은 아란이 꿰매 준 도포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요즘 들어 현경은 아란을 볼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 일렁이는 것이 부쩍 잦았다.

“이 참에 도포 한 벌 마련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느질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란이 말했다. 보아 하니 이렇게 일러 주지 않으면 현경은 사람을 부려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고 저 도포만 계속 입을 게 뻔했다.

“괜찮습니다. 형님들 도포 얻어 입으면 되지요, 뭐. 고향에서도 그랬는걸요.”

“…….”

곧 날도 추워질 테고 고작 한 벌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란은 긴말 없이 바느질함에서 줄자를 꺼내들었다. 몸 치수를 재자 하니 현경이 몸을 감싸며 유난을 떨었다. 하지만 아란은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다른 이가 하면 혹여나 말이 새나갈 수 있으니, 잠자코 서세요.”

“아…….”

“한 번 품을 재두면 침모에게 부탁하기에도 수월하니까요.”

그제야 현경은 얌전히 팔을 벌리고 자리에 섰다. 등 뒤로 아란의 팔이 둘러오자 현경은 그 찰나에도 사뭇 긴장이 되어 숨을 죽였다. 부푼 가슴을 단단히 내리누르고 있는 붕대 때문에 현경은 숨을 크게 쉴 때마다 멈칫 하곤 했다. 어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현경의 가슴팍 위로 줄자를 가늠하던 아란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러면……, 좀 낫습니까.”

“예? 무엇이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란은 현경의 소매 길이도 마저 재고는 다 되었다며 현경에게서 물러났다. 현경은 의아한 얼굴로 가만 서있었다. 그때, 별당 밖에서 저녁상을 준비해 올릴지를 묻는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현경은 서둘러 벗어둔 도포를 걸치고 갓을 썼다.

“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별당을 나서니 밖에서 기다리던 여종이 현경을 중문까지 모셨다. 현경은 동재로 향하는 내내 아란의 말을 곱씹었다.

“이거, 치수를 적은 것인데 분이어멈한테 좀 전해 줄래? 도포 한 벌 부탁하려고.”

“예. 어라? 아가씨, 방금 도포라고 안 하셨어요?”

“응, 맞는데. 왜?”

“품이 두 자 반이면 대감마님께 너무 적지 않아요? 아가씨가 입으실 것도 아니구.”

아란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버지 제현의 것이 아닌 다른 사내의 도포를 지어 달라 하면 분명 허튼 소리가 돌 게 뻔했다. 게다가 보통 사내들의 치수와도 다르니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제현의 집 바느질을 도맡아 해주는 분이어멈은 조용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지만, 그의 남편 되는 자가 다소 입이 가볍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내가 잠시 착각했다, 도포는 됐고. 저녁은 어머니와 함께 먹을 테니 준비해 주렴.”

“예, 아가씨.”

여종이 별당을 나간 후, 아란은 반닫이 장을 열어 지난번 자신의 저고리를 해 입고 여분으로 남은 옷감을 꺼내 놓았다. 마침 대부분의 시간을 별당 안에서 자라온 아란은 언젠가 아버지 제현의 도포도 직접 지어본 적이 있었다. 가위로 얼추 필요한 만큼의 명주 천을 끊어내던 아란은 재단된 천을 바닥에 늘어놓고 가만 내려다보았다.

키는 아란보다야 현경이 좀 더 크다지만, 현경이 입을 도포 천을 펼쳐놓으니 마냥 크지만도 않다. 미처 여물지 못한 그 여린 몸통 안에 현경은 대체 어떤 세상을 품고 있기에 여인의 몸을 감추면서까지 사내 행세를 할까. 단지 꿈이라는 그깟 게 다 뭐라고.

아란은 펼쳐놓은 천을 다시 잘 포개어 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녕 현경이 사는 세상은 자신의 세상보다 좀 더 나을까, 묻지 못한 말이 다시 머릿속에 맴돈다. 만약 자신이라면 현경처럼 살 수 있을까,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현경은 저녁을 먹은 후에 한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밖에서 우지끈 하며 요란한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얼큰히 취한 정형이 방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현경이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문 밖에 선 노복이 난감한 표정으로 현경에게 말을 전해왔다.

“아이고, 도련님께서 술김에 동재의 방문고리를 죄다 뜯어 놓으셔 가지고.”

술에 취해 방을 못 찾으니 인사불성이 되어 엉뚱한 김형의 방문을 열었다가 돌쩌귀를 부숴먹고 박형의 방문은 단고리를 뽑아 버리더니, 정작 자기 방에 가서는 문짝을 통으로 뜯었다 했다. 제 방 문짝을 뜯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긴 했는지, 막상 자려고 누우니 뜯긴 문으로 들어오는 밤기운이 차서 불이 켜져 있던 현경의 방에까지 온 것이다.

“박형 방은 문고리만 뜯기고 문짝은 멀쩡하니 거기나 들어가 주무시오.”

“아, 그 형님 방은 쿰쿰한 냄새가 지독해서 못 잔다!”

“정형 술 냄새는 어쩌고, 어어, 어딜 눕습니까!”

“이리 오니라 우리 막내, 형님 품에 안기련.”

이부자리에 벌렁 누워 팔을 휘적이는 정형을 보고 현경은 질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얼른 일어나라며 발로 밀어도 꼼짝 않던 정형은 금세 드르렁 코를 골며 뻗어 버렸다. 당혹스러워 하는 현경의 속도 모르고, 밖에 선 노복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문을 수리할 테니 오늘만 사이좋게 주무시라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결국 현경은 읽던 책을 들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뜯긴 방문 두 개를 지나쳐 그나마 멀쩡한 박형의 방문을 여는데 훅 끼치는 역한 냄새에 현경은 머리가 다 아찔했다. 하는 수 없이 동재를 벗어나 강연장 마루에 앉아 달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데, 밤바람이 제법 차갑게 현경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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