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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56화 (257/260)

256화

주인 잃은 에너지들은 과포화된 채 여왕으로 빚어낸 마정석 주변을 돌고 있었다. 지호는 홀린 듯이 그 거대한 마정석을 매만졌다.

이형 에너지가 모여듦에 따라 이전 대형 균열에서 준영이 각성할 때와 비슷하게 보현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가져가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까. 본디 여왕을 중심으로 빼곡히 쌓였던 에너지들은 이제 지호를 향해 움직였다. 에너지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이제 그가 모르는 일들을 머릿속에 속삭여 줄 존재조차 사라져 버렸으니 그저 추측밖에 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지호의 소망과 의지에 반응이라도 하듯, 마정석을 중심으로 모여든 에너지들은 보현 쪽으로 흘러갔다. 쏟아져 내린 별빛들이 모래처럼 흘렀다.

그러나 보현 부근에 쌓인 빛은 그에게 흡수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준영이가 되살아날 때는 분명히…….

두 번째 기적을 기대했던 지호의 가슴이 바스러졌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공을 떠도는 에너지들을 끌어모았다. 다시 보현에게 밀어 넣으려 하지만 흡수되거나 여타 작용 없이 그저 흘러 쌓이기만 하는 힘이 지호를 당황스럽게 했다.

“왜 안 일어나요?”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보현 쪽으로 걸어간 지호는 그 앞에 조용히 몸을 숙였다. 이형 에너지에 둘러싸여 새하얀 빛무리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보현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마지막까지 보현에게 매달려 있던 지윤은 하나 때문에 억지로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준우가 필사적으로 보호한 덕분에 여왕의 마지막 발악에서도 부러지거나 깨진 곳 없이 무사한 신체다. 지윤의 힘이 외상 정도는 치유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보현은 눈을 뜨지 않는 상태.

그 위로 이형 에너지들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지호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느릿하게 생각했다. 각성자의 각성은 언제나 균열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균열 밖에서도 타인을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각성자는 균열 안에서만 나타났다.

각성이란, 본디 옛 여왕의 본질이었던 이형 에너지가 이타심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작용이 아니었을까.

지호는 그가 보아 온 무수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원치는 않았으나 여왕과 몸을 공유하고, 또 그와 정신을 부딪치며 얻게 된 단편적인 지식들 역시 지호의 추측을 긍정했다. 하나는 간신히 질문했다.

“이긴 거야?”

“네.”

“그럼, 얼른 게이트로 가자. 임보현 헌터가 일어나지 않아. 장비가 필요해.”

“당장 그쪽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아요. 여왕의 에너지나 이쪽으로 모인 이형 에너지가 게이트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서.”

본디 악성 균열 자체는 닫혔지만, 균열이 열렸던 자리는 둥근 반원형 구로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다른 세계와의 연결 자체는 끊겼으나, 그 공간에 밀도 있게 채워진 이형 에너지들은 느리게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지호는 여왕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세계와 연결이 끊긴 자리, 즉 균열 소멸기를 겪는 균열 자체가 이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라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양쪽 세계가 겹쳐지니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고, 이형 에너지의 밀도 차이로 눈에 띄는 모양이 남는다.

진짜 균열이 열렸을 때처럼 인간이나 괴물 중 한쪽은 통과하면 사라져 버리는 경계가 있지는 않다. 일정 수준 이상 강한 괴물이 그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되는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이형 에너지의 바다에 불과하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흩어져 사라질 이형 에너지로만 이루어진 반원형 구 형태. 균열의 흔적은 게이트를 향해 가기에 충분한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지호는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했다. 거대한 광석처럼 보이는 마정석 덩어리는 다른 에너지들에 둘러싸여 바닥에서 살짝 떠 있었다. 다른 것들과 확연히 다른 모양새. 담긴 힘 역시 그렇다.

“장비가 있으면 언니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지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라도 붙어 있으면, 심장이라도 조금 뛰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러자고 당장 환자를 챙겼을 것이다. 그 반응 때문에 지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남은 에너지를 지윤에게 보태던 소민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윤이 연신 미안하다고, 죽을힘을 써도 보현이 눈을 뜨지 않는다고 울먹거리는 것을 뒤로한 채 지호는 느릿하게 보현에게 몸을 굽혔다. 보현 곁에 있던 세 사람은 부근에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보현의 몸은 생채기 하나조차 회복되지 않았다.

“언니.”

나직하게 보현을 부르는 지호의 음성엔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섞였다. 그의 목소리가, 시선이, 웃음이 여전히 떠오르는데 그것을 보여 줄 이는 이제 없다. 지호는 왈칵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범람하는 슬픔에 심장이 떠내려갈 것처럼 아팠다.

“언니. 끝났어요. 이제 균열에서 언니 이름 막 불러도 괜찮아요. 임시 대장직도 내려놔도 되고, 그 헌터님 안 해도 돼요. 제가 이겼거든요. 비밀을 알게 된 괴물들도 다 죽었고…….”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이 눈 앞을 가려 주변 풍경이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호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전투는 다 끝났는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숨을 어떻게 내쉬고 들이마시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보현의 눈가를 매만진 지호는 연신 현실을 부정했다.

“이렇게 될 것 같았어요. 이래서 언니가 이쪽으로는 오지 않기를 바랐던 거였어요. 계속 그랬잖아요. 나한테 뭐라고 했으면서, 진짜로 몸을 아끼지 않고 균열에 뛰어들었던 건 언니였잖아요. 내가 누구를 보고 배운 것 같아요?”

무슨 소릴 하느냐며 장난스럽게 한 대 쥐어박아 줄 보현은 여전히 감은 눈을 뜰 줄 모른다. 지호는 그들에게 의미 있던 추억들을 중얼거리며 보현의 감은 눈가를 쓸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죽은 이에게 건넨 말들은 목적을 잃고 흩어졌다. 지호는 흐느끼며 보현의 몸 위로 무너졌다.

“언니를 지키려고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언니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지호는 흐느끼며 보현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정신계 능력자들 특유의 정신 반작용이 일어났다. 지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고, 그의 움직임에 놀란 이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쪽을 보는 것을 보며 되물었다.

“방금 움직였나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지호의 물음을 들은 준우가 어느새 다가와 다급히 보현의 목에 손을 짚었다. 물론 금세 실망한 기색이 드러난다. 지호는 거기 모인 누구도 정신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알았다. 정신계 능력자들이 죽은 영혼을 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보현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었다.

지호는 다시 보현을 붙잡았다. 아까 능력끼리 반발하며 튕겨 나온 부분.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손을 얹는다. 생명의 근원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힘이 미약하게 지호를 튕겨 냈다.

살아 있어.

지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퍼져 나갔다. 지호는 김 반장이 어떻게 힘을 운용했는지 그 감각을 떠올리려 애쓰며 보현에게 손을 얹었다. 처음 느껴진 건 거부감이었다. 지호는 그 감정의 흐름을 읽어 내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차단한 채 보현의 정신에 집중한다. 모인 이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소리도 낮추며 지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명확하진 않은데 조금 보여요……. 언니 몸이 거의 다 망가졌고, 다시 균열로 돌아올 수도 없을 테고, 도준우가 사람들 사는 곳으로 넘어갈 수도 없으니까……. 혹시 여왕이 저와의 싸움에서 이겨 버리면, 언니가 살아남는 게 인류에게 최악의 재앙이 되니까?”

거기까지 보현의 정신을 읽어 낸 지호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보현의 옷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의 몸이 형편없이 끌려 올라왔다. 지호는 자기 손을 쳐 내는 준우의 손에 정신을 차렸다.

“임보현 헌터님 살아 있어요?”

하나의 질문에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도로 저었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 경계에 걸쳐 있는 애매한 상태다. 그마저 근방의 에너지들이 보현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숨이 붙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언니가 죽긴 한 것 같아요. 결과를 모른 채 죽었으니 남아 있는 감정은 다 저런 것뿐이에요. 지금 제 눈에 이형 에너지가 언니를 각성하던 시절처럼 되살려 내려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그걸 거부하고 있어요.”

“각성을 거부할 수도 있는 거였어요?”

“어, 일반인 때와 달리 이형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긴 한데. 정확히 모르겠어요. 제가 각성하고 나서 죽어 봤어야지…….”

지윤은 인상을 팍 쓰며 그런 농담 하지 말라고 지호의 어깨를 퍽 쳤다. 지호는 아프다고 엄살 피우면서도 이형 에너지와 대립하는 보현을 빤히 응시했다.

보현은,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거기 모인 모든 각성자들이 그러했듯, 죽음에서 재차 일어날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 생도 가능한지야 알 수 없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분명 각성 현상처럼 보였다.

“계속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상황을 언니 생사로 실험하고 싶진 않은데…….”

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그 생각의 끈을 툭 자르며, 준우가 지시했다.

“저 에너지를 제대로 써라.”

“응?”

“여왕의 것이었던 에너지. 이제는 주인을 잃고 너를 새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저 힘을 써. 임보현이 거부할 힘 이상을 퍼부으면 일어나지 않겠나? 많은 에너지가 있는 곳으로 모여드는 외부 에너지만 쓸 필요 있나? 거부하기 어려운 힘을 퍼부으면 눈 떠서 그만하라고 화라도 내겠지.”

“그러다 더 나쁜 결과가 벌어지면 어쩌자고?”

“이대로 내버려 둔다고 저 고집쟁이가 눈 뜰 것 같진 않아. 네 말처럼, 싸움의 향방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숨을 거둔 녀석이야. 여왕이 살아 버티는 세계에서 다시 눈 뜨는 걸 원하지 않기에 버티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은 사람에게 대화 걸 능력 있는 사람 여기 있나?”

명확하지 않은 결과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불안한 건 도준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보현을 건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지호 때문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 그토록 그리워하다 다시 만났는데 그 끝이 또 한쪽의 죽음이다.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언니의 몸이 상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냥 이형 에너지를 퍼부으라는 게 아니야. 치유 능력이 있지 않았나? 소질 없는 힘이어도 그 양이 무지막지하면 없던 효과까지 생기게 되어 있어. 아니면 네가 지금 나와 연결된 것처럼, 이 녀석에게도…….”

“그만. 그런 짓을 해서 언니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어요. 바라지도 않을 거고.”

“네가 이겼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받아들일 거다. 기회라도 가질 수 있게 해 줘.”

무슨 이야기를 해도 준우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지호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했다. 사실 그 역시 누구보다 보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호는 준우의 말에 동의하며 모두에게 손짓했다.

“일단 다들 멀찌감치 물러나요. 무슨 영향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치유 에너지가 왜?”

“저는 지윤 씨처럼 전문적으로 의학 공부를 한 것도 아녜요. 아마 재생 능력 촉진 정도가 한계일 텐데,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잖아요. 지금 사실 이게 옳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근데 아무것도 안 하고 언니를 보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제가 저 힘을 사사로이 쓰겠단 게 아니고, 그러니까…….”

“알아요.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거리 유지할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중단해요. 지호 씨가 더 중요하니까. 알죠?”

다른 둘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소민은 마지막까지 지호 부근을 서성이다 제일 늦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가늠하고, 자기에게 남은 이동 에너지를 확인하는 모양새에 웃음이 났다. 지호는 그가 왜 저 셋과 친구가 되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끼리끼리라더니, 다들 닮아서는.

지호의 의지는 어떤 전조도 신호도 없이 여왕의 것이었던 에너지를 움직였다. 독특한 경험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곳을 채우고 있던 밀도 높은 이형 에너지가 빠르게 폭풍우 치기 시작한다.

지호의 행동은 도훈이 했던 것과 비슷했다. 에너지를 집중시키기 위한 이미지로는 이미 본 것을 답습하는 게 제일 빨랐다. 다시 불어오기 시작한 폭풍에 세 사람은 서로를 붙잡았고 도준우는 몸을 낮추었다. 보현에게로 응집되는 에너지들이 녹색으로 빛나다 못해 뭉치고 뭉쳐 그 형태를 알아보기 점점 어렵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문득 그것이 어떤 형태와 닮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호는 눈을 크게 떴다.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그것이 열렸다.

“균열?”

중심은 보현의 몸, 그것을 이루는 것은 거기 집약적으로 모여든 에너지들이었다. 지호는 두 번 망설이지 않고 거기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 힘을 통제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써야 했던 짧은 틈을 파고든 사람이 있었다.

“임보현!”

도준우가 뛰어들었다. 그다음 지호가 움직였고, 지호는 거기서 폭발하려던 에너지를 파괴적으로 억눌렀다. 그러나 쌓인 힘이 너무 컸다. 균열이 열린다. 세 사람이 너무 가까웠다. 지호는 비명처럼 외쳤다.

“더는 아무도 잃을 수 없어!”

여왕의 것이었던 에너지들이 그 순간 지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열리려는 균열을 향해 쇄도한 힘이 균열을 여는 힘과 충돌하여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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