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23. 함정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으나 아파트는 대체로 안전한 편이었다. 균열에 휘말릴 때를 대비해 설계된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지를 제외하곤 지옥에 가까울 것이다. 네 사람은 황급히 서로를 돌아보았다.
“장비 가져온 거 있어요?”
“전 여기 들렀다가 곧장 훈련 갈 예정이라 다 있어요.”
하나와 지호만 제대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지호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쓰러진 자들을 흔들어 깨웠다.
“다들 일어나요! 악성 균열이 열렸다고요!”
보현과 주리는 금세 일어났으나 다은과 세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 반장은 보현의 장비 창고를 털어 지윤과 소민을 무장시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갑자기 악성 균열이 말이 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다은은 깨진 카메라와 어수선한 실내, 그리고 무장 중인 헌터들을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경보가 터져 균열 지역을 알리는 알림이 떴다. 급성 균열 지역이 넓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내부의 헌터들이 괴물 수를 빠르게 줄이지 않으면 피해 지역은 더 넓어진다. 문제는 넓어지는 균열 경계에 닿는 각성자가 있을 시 그것이 균열 폭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세진과 다은은 지호의 전투복들을 받아 들곤 황급히 환복했다. 어디 들어가 옷을 입고 말고 할 시간이 없었다.
지호는 한쪽에 얌전히 놓인 신체 보호용 보조구를 보현의 팔에 채우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보현이 균열에 갇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도훈이 말하기를 악성 균열은 여왕이 뚫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게이트를 넘어가 괴물들의 세계를 관측하고 돌아왔을 때 여왕이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것은 아닐까? 하필이면 지호 부근에 생겨나기 시작한 균열의 중심을 기억했다. 지호는 이를 악문 채 보현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이거 절대 풀면 안 돼요. 무거워도 안 돼요. 알죠?”
“제 한 몸 잘 건사하죠. 우선 다들 모여 봐요. 본인 특기가 뭔지 이야기하고.”
이형 에너지를 다루는 것 중에도 에너지 방벽에 특화된 4세대 헌터 강하나와 염동력을 다루는 이동 능력자 최소민, 치료계열 주력에 이형 에너지로 물체 구현화가 가능한 장지윤을 비롯해 정신계 능력 외에 모든 계열 능력 보유자인 지호까지 4세대 헌터가 네 사람.
그리고 신체 계열 퓨어 3세대 헌터 이주리와 정신계 특화에 이형 에너지를 미미하게 보유한 김동주 반장, 마찬가지로 정신계 능력을 보유한 신체 계열 최세진 헌터와 이형 에너지와 감지계를 듀얼로 쓰는 2세대 신다은 헌터.
그리고 본디 염동력과 정신 방벽, 이형 에너지를 특출나게 다루기로 유명한 1세대 헌터지만 현재는 약해진 몸 때문에 섣불리 전투에 나서기 어려운 임보현까지 총 아홉 명이 모였다. 이쪽 단지가 각성자들이 많이 들어오는 정부 소유 임대 단지라 뒤져 보면 더 많은 각성자나 헌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모으고 할 새가 없었다.
“저는 전투 인력이 아니니 제외하고 두 팀으로 나누죠. 임시 팀이지만 잠시 존칭 생략하겠습니다. 이쪽 팀에 김동주, 그리고 저쪽 팀으로 최세진. 감지계 두 사람도 갈라져. 이지호와 신다은이 따로 간다. 이쪽에 치유 계열 능력자가 없으니 장지윤이 최세진 팀으로. 신체 계열 능력자가 부족한 최세진 팀에 만일을 대비해 이동 능력자 최소민을 포함한다. 강하나와 이주리는 김동주 팀에 합류하도록. 나는 최세진 팀을 보조한다. 우리 집을 거점 삼아. 11층 위치 확인하고 움직여라. 되도록 전투를 피하고 정찰에 집중해. 팀 태깅!”
둘로 나뉜 헌터들은 곧 서로를 태그했다. 곧 각자의 어플에 팀원들의 위치 정보가 떴다. 곳곳에서 난무하는 비명과 고함, 무언가 부딪치며 무너지는 소리, 발소리에 포효가 섞이며 몸이 찌릿할 정도로 강력한 이형 에너지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해당 방향에서 밀려온 힘을 느낀 헌터들은 뻣뻣하게 굳었다. 보현은 방향을 파악하고 냉정하게 지시했다.
“저쪽으로 접근하지 마라. 최악에는 균열 내부의 헌터가 우리밖에 없다고 상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아파트 외벽의 특수 처리 덕분에 단지 내에 돌아다니는 괴물은 몇 없었다. 아마 건물 내부의 괴물도 일반적일 때보다 수가 적을 것이다. 지호는 다은과 반대 방향으로 뛰며 감지 파장을 펼쳤다. 잡히는 기척이 다수.
“각성자가 많아요!”
“임보현이 알아서 할 거다. 전투 대신 지휘를 맡았잖아. 위험한 놈은?”
“부근엔 없어요. 이주리 헌터, 하나를 챙겨요. 뜁시다!”
지호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김 반장을 번쩍 들어 어깨에 얹었다. 체구가 큰 사람이라 붙잡아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는 기겁했고, 지호가 11층 창을 열어 아래로 뛰어내리자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고층에서 뛰어내리면 당연히 무리 가지 않을 리가 없었고, 지호는 아래로 내려오며 속도를 줄인 다음 뛰어내린 주리의 속도를 조절해 주어 두 사람을 아래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시간대가 애매하여 대부분은 직장에 나가 있었을 것이다. 거주구에 균열이 열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호는 파장을 거두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각성자 다수 감지. 괴물과 교전 중입니다.”
“합류한다. 우리 첫 번째 목표는 마주치는 각성자들에게 현장 상황을 알리고 피해 없이 일반인들을 구조할 수 있도록 안전 지역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상황 파악 후 사냥에 돌입한다.”
네 사람은 단지 입구에서 벌어진 싸움에 뛰어들었다. 본인은 전투 계열이 아니라고 툴툴대 왔던 김 반장은 정신계 트랩으로 괴물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하나는 방벽을 유지한 채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일반인들을 보호했다. 주리는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빠르게 빼내 하나의 방벽 쪽으로 던졌고, 지호는 괴물과 교전하는 자들에 합류해 괴물 집단의 머리를 찍어 내리며 양팔에 에너지를 칼날처럼 둘렀다.
지호는 제대로 숨 쉴 틈도 없이 다섯 번의 공격을 한 번인 것처럼 연달아 휘두르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일반인들을 보호한 각성자 앞을 막아섰다.
“사람들 지키느라 고생했어요. 단지 안으로 들어가요. 방비 시설 때문에 내부엔 괴물이 얼마 없고, 다른 팀이 놈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안전할 겁니다.”
“이지호 헌터?”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생각보다 도움이 됐다. 지호를 본 자들은 그 명령에 수긍하며 아파트 단지 쪽으로 도망쳤고, 하나와 주리가 수습한 사람들 역시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단지 입구에 설치된 마정석 방어 설비들은 뜻밖에도 생각보다 효율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파트 주민이 아닌 나머지 두 사람에게 있었다. 주리는 신체 계열 퓨어 헌터라 균열 경계와 마찬가지로 드나드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김 반장과 하나는 아니었다.
“이런, 여기 주민들 위주로 보호하는 것 같은데요? 다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사방이 난리가 났어.”
큰길 쪽에서 치솟는 연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괴물의 포효 같은 것이 저릿하게 몸을 울렸다. 넷은 지호의 능력에 감지되는 괴물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사방을 뛰어다니는 놈 중에 강한 것은 얼마 없었다. 나타난 괴물들끼리 서로 영역 다툼하며 싸우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일부러 그냥 지나갔다. 일부 생존자를 구출하며 보현에게서 아파트 단지가 안전 구역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뒤, 지호는 그제야 악성 균열이 열린 범위를 제대로 확인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설상가상으로 메두사 출현 경보가 떴다. 여왕이 연 균열이니 놈의 호위대가 돌아다니는 건 당연하겠지만……. 지호는 범위 안에 들어간 승찬의 집 위치를 확인하고 초조함에 지도를 확대했다. 두 번 봐도 균열 내부다. 경계와 가깝다면 노련한 구조대원답게 빠르게 탈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악성 균열의 중심부는 남동구 구월동 한복판. 범위는 넓지 않지만, 주안동 일부와 간석동 일부, 그리고 관교동과 만수동을 포함한 중소형 균열이다.
보현이 정보를 올린 것인지 균열 안쪽 지도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가 녹색으로 표시됐다. 안전 지역. 보호 구역. 이쪽으로 대피해 오라는 의미다. 살아 있다면의 이야기겠지만.
“일반인들은 상관없는데 각성자들은 곧바로 들어가진 못할 거예요. 생존한 사람 중에 입구에서 출입 등록 처리를 할 사람이 필요해요.”
주변 지역을 정리한 뒤 잠시 숨을 돌리고 아파트로 귀환하려던 김 반장 팀은 단지를 보호하는 방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유일하게 거부 반응이 없었던 지호는 안으로 들어가 경비실 문을 붙잡았다. 잠긴 상태다. ‘나중에 보상할게요.’하며 문을 뜯어 낸 지호는 거기에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지네 형태의 괴물과 마주치곤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안쪽엔 시신도 안 남은 핏자국만. 지호는 빠르게 내부를 훑고 상황을 파악했다. 외부에서 괴물이 들어올 수는 없으나 안쪽에서 생겨난 것들은 사람들을 먹는다. 있는 힘을 다해 놈의 대가리를 으스러뜨린 지호는 녹색 진액이 사방에 튄 경비실을 둘러보며 속이 안 좋아짐을 느꼈다. 어떻게 조작해야 할지 몰라 좀 헤매다가 운 좋게 서랍에서 매뉴얼을 찾았다. 새 거주자 등록. 다행히 입구에서도 가능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며 세 사람의 얼굴을 촬영하고 난 뒤엔 모두 무리 없이 단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경비실에서 지호의 비명을 들었던 주리는 등록 절차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쪽으로 달려왔는데, 안쪽에 늘어진 괴물 시신을 보곤 속이 좋지 않은 얼굴로 돌아 나갔다. 지호는 거기 시신을 내버려 두지 않고 놈의 몸에서 마정석을 추출했다. 잡은 괴물들을 모두 마정석으로 화하여 수를 줄여야 악성 균열의 피해가 줄어든다. 필요한 작업이었다.
보현에게 연락이 왔다. 아파트 내부가 ‘거의’ 안전 지역이 되었으나 숨은 괴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공지였다. 너무 빨리 알려 주는데. 물론 어디에서나 괴물이 튀어나올 수 있긴 하지만.
“메두사 출현 경보가 마음에 걸리는군. 놈들이 정신계 공격에 약하다고 했었지.”
“그래서 최세진 헌터랑 김 반장님이 팀 리더인 것 같네요.”
하나는 지호가 넘겨주는 마정석을 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애써 밝은 태도로 그걸 챙겨 넣으며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지호 씨 팀이니까 일 끝나면 정산금 좀 기대해도 되겠어요.”
“지윤 씨만 또 울겠네요. 있다가 시간 나면 들러서 긁힌 상처 치료라도 받아야겠어.”
부근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두 팀은 단지 초입에서 합류했다. 입주민 없는 빈집을 파악하고 있던 보현은 그런 보조적 업무를 맡아 줄 각성자 몇 사람을 섭외했다며 그들이 구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마 마정석을 에너지원 삼는 방벽이라서 몸 튼튼하기만 하고 별다른 능력 없는 괴물들은 그냥 들어올 수 있을 거예요. 주기적으로 순찰 돌고 입구에 경비 병력을 세워요. 너무 강한 괴물이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고. 알았죠?”
헌터도 아닌 사람들이 지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 임보현의 이름자 아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지호는 새삼 유명세의 이점을 깨달으며 지원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들 중에는 지호네가 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가 꽤 된다. 아파트에 각성자가 많단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모아 두고 보니 그래도 든든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