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김 반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곧 지호의 두통이 극심해졌고, 그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허겁지겁 손사래 쳤다.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의미심장한 척하길래 뭘 들었나 확인하려고 한 거다. 그나저나 이제 정신 방벽이 꽤 견고해졌는데?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군.”
“그거 다행이네요. 퀸 패러사이트한테 한 방에 당하면 어쩌나 걱정 중이었는데.”
“대원도 그놈을 노리고 있나? 임보현 때문에?”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확히는 보현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전직 헌터 때문이란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김 반장은 거기까진 별 관심이 없는지 지호에게 가하던 힘을 거두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추가 근무는 딱 질색인데 귀찮게 됐군.”
“기억을 지우는 게 어렵나 보죠?”
“없는 기억 끼워 넣는 것보단 쉬운 편이야. 다만 다른 방식으로 우회해서 기억해 내거나 비슷한 절차로 다시금 해당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해. 이 둘은 벌써 몇 번이나 특수반의 감시 대상으로 올라왔던 거로 기억하는데…….”
다은과 세진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입을 다문 김 반장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호는 이제 저 네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김 반장은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며 지호를 돌아보았다.
“일반적으로는 각성자들의 무의식중 능력 간 충돌로 기절한 걸로 처리한다. 특수반 일 하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안 해요, 그쪽 일.”
“반쯤 우리 팀원 아닌가?”
김 반장은 껄껄 웃으며 주리와 보현 쪽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듯 움직였다. 지호가 보기에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잠시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나, 미약하게 느껴진 두통이 정신계 능력의 작용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식으로 진실에 접근한 사람들의 기억을 다 지우고 다니시나요?”
“그게 특수반 업무 중에 제일 중요한 일 중 하나야.”
언제나 지호의 능력을 탐내는 김 반장이 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지호는 쓰러진 자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한숨 쉬었다.
“제가 쉽게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요. 어쩌면 너무 무리하게 기억들을 지우는 건 아닐까요?”
“그러지 않으면. 각성자들이 자기가 괴물이란 사실을 맞닥뜨리고 절망과 우울 속에서 괴로워하게 내버려 두는 쪽이 건강한 방향인 것 같으냐?”
“점진적으로 알리거나 충격을 덜 받는 쪽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각성자들 중에 헌터일 하다 그만두고 사기업으로 돈을 벌려고 사냥꾼 일 하려고 나가 버린 자들의 말로를 봐라. 그들이라고 비슷한 결론을 마주하지 못했을까? 각성자들이 사실 괴물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는 헌터 웹에도 떠돌아다녀. 하지만 그걸 읊어 대는 놈이 별것 아닌 네티즌 한 놈인지 아니면 현직 헌터인지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지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헌터 웹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 중에 진짜가 섞여 있으리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손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가십거리들이 대부분이지. 그 때문에 그런 진실들은 오히려 잘 떠내려가고 거짓 속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된다. 김 반장은 그러는 쪽이 다른 이들에게 나을 것이라며 드디어 손을 떼었다.
“이쪽에 자꾸 손대면 좋지 않은데. 이 둘은 후유증 비슷한 것도 앓고 있을 거다. 정신계 능력에 자주 노출되면 그렇게 되니까……. 상황 봐서 현장 은퇴를 권해야겠군.”
“그 정도예요?”
“차라리 균열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평범한 방송인으로 사는 쪽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알고 있잖아. 헌터 정보를 팔아먹으며 사는 놈들도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정식 방송국에 뒤지지 않을 정보량을 보유한 헌터 유튜브야 당연히 괜찮은 직장 아닌가.”
“하지만 헌터 일을 병행하는 데는 두 분만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실종자를 기다린다고도 했었어요.”
“기다림에는 자격이나 힘이 필요치 않아.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쪽이 덜 초조하겠지. 대원은 그 이지호 헌터에게 접근하려고 연락처를 묻는 집단이 얼마나 협회를 들볶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지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김 반장이 말한 정체 모를 집단들의 연락은 아니었다. 박 팀장 밑에서 뭔가를 조사하겠다던 소민이다. 지호는 어리둥절하여 전화를 받았다.
-지호 씨 지금 어디예요?
“예? 어, 집인데요.”
-그래요? 잠깐 나와 봐요!
“네?”
-지금 문 앞이거든요!
지호는 진짜로 당황했다. 혹시 집으로 들어오면 어쩌지. 여기저기 쓰러진 헌터들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 곤란할 터였다. 김 반장은 턱짓으로 나가 보라며 지시했고, 별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지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폭죽이 팡! 터졌다. 지호는 초인적인 속도로 물러났고, 곧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지윤은 폭소를 터뜨렸다.
“아니 우리가 무슨 짓 하는 줄 알고 도망간 거예요? 서프라이즈도 못 하겠네!”
“예? 아니 무슨…….”
미약한 화약 냄새와 바닥으로 떨어진 종잇조각들. 지호는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현관으로 돌아왔다. 문 안으로 들어와야 웃기지도 않는 거실 풍경이 보이는데, 다행히 세 사람은 안으로 밀고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나는 한참 웃은 다음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요! 우리 선물만 사고 지호 씨 물건은 안 샀잖아요. 고민 많이 해 봤는데, 지호 씨한텐 역시 정신계 간섭 차단 보조구가 제일 필요해 보이더라고요. 다른 건 다 할 줄 알잖아요.”
“각성자 연합에 따로 연락까지 드려서 판매 개시도 안 한 새 제품 받은 거예요. 지호 씨를 위한 선물이라고 하니까 흔쾌히 내주셨어요.”
소민의 설명과 쇼핑백에 찍힌 부평 각성자 연합 마크 덕분에 지호는 그들이 누구에게서 물건을 받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쪽도 정상화되면서 이런저런 도구 개발이 다시금 가능해진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 이거 주시려고 다시 오신 거예요? 다들 일정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시간에 받아 오려다 좀 늦었죠, 뭐. 이거만 주고 가 봐야 돼요. 저 빼고 다들 바쁘신 몸이라서.”
지윤이 툴툴거리며 이불의 따스함을 모르는 불쌍한 헌터들이라고 중얼거렸다. 지호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걸 바라고 드린 건 아니었는데…….”
“우리도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순순히 받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예요. 착용샷 찍어서 올리라고 하기 전에 얌전히 챙기도록. 이번 모델이 S사 것보다 훨씬 효율이 나올 거라고 했어요. 수제라 다른 데선 구할 수도 없다고요.”
“오타쿠 말이니 믿어도 됨.”
김 반장의 말에 따르자면 예전보다 훨씬 나은 수준의 정신 방벽을 가지게 되었다곤 하지만 지호의 능력은 여전히 미비한 편이다. 감지계 능력자의 숙명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는 자기를 위해 고민하고 물품 제작 의뢰까지 맡겨 준 친구들을 보며 감동했다.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말하고 싶은데 언니 손님이 있어서…….”
“아냐, 시간 없어서 우리도 가 봐야 돼요.”
“맞아. 하루빨리 누워야 함요. 너무 많이 돌아다님.”
“지호 씨는 벌써 이주원 각성자 보고 온 거예요?”
어서 자리를 떠나려던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소민은 슬쩍 질문을 던지며 이 시간을 유예했다. 지호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협회에서 붙잡고 있어서 면회는 안 되더라고요.”
“그쪽 소식은 들은 게 없겠네요…….”
소민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지호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박 팀장 휘하에서 일하는 이동 능력자의 말이 아무것도 아닐 턱이 없었다.
“이형 에너지의 이상 반응을 추적하러 간다고 했었죠? 혹시 뭔가를 찾은 건가요?”
“아직 찾은 건 아녜요. 하지만 그 에너지들이 발견되었던 위치들에서 공통적으로 포착되었던 사람 중 몇몇이 전양련 소속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중에 제일 많이 발견된 게 이주원 각성자고요.”
이동 능력자들 역시도 주원에게 용건이 있는 셈이다. 아마 지호가 그를 보고 왔단 소식을 들었다면 다른 이들 역시 들를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지호는 미안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음, 만나게 되더라도 정상적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신계 능력에 너무 많이 노출된 것 같더라고요.”
괴물의 힘과 인간의 힘의 근원이 같기에 거기에 오래도록 노출된 부작용 역시 비슷할 것이다. 지호는 소파에 기절해 있는 세진과 다은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역시 주원과 비슷한 상태가 되면 어쩌나 싶었다. 거의 맹목에 가까웠던 주원의 태도. 한 가지 외에는 생각할 수 없어진 사람처럼 행동하던 극단적인 모습까지 떠오르자 걱정이 더해졌다.
“그런 사람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뭔가에 씐 것 같다고 해도 항상 그런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전에도 지호 씨를 납치한 전적이 있잖아요.”
균열 밖에서도 그러했고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호는 이주원 각성자의 소식을 듣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며 소민에게 약조한 뒤 정말로 친구들과 인사하고 문을 닫으려 했다.
기이한 감각.
네 사람의 헌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랫동안 많은 헌터를 위험에서 구한 바로 그 감각이 그들을 동시에 움직이게 했다. 넷 중 유일하게 신체 계열이었던 지호만이 그 믿기지 않는 현상의 첫 일그러짐을 목격했다.
허공이 깨졌다.
말도 안 돼. 경악은 외침이 되지 못했다. 하마터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균열의 시작점으로 뛰어들 뻔한 지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멈추었다. 휩쓸리는 것은 괜찮다. 그저 열리는 균열로 끌려 들어가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열리는 균열을 막으려고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였다. 한때 천운으로 생존했던 그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대신 다급히 다른 세 사람을 붙잡았다.
세상이 찢어진다.
급성 균열조차 그런 식으로 공간을 찢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호는 그 틈새로 붉은빛을 목격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과연 착각일까? 깨져나가기 시작한 허공의 모든 곳에서 이형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모든 곳이 산산이 조각나며 풍경이 일그러지고 바닥이 일렁인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고, 분명 존재했던 것들이 무너지며 제 모습을 잃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본래 빛깔을 갈취당했다. 드리워지는 어둠.
지호의 손에 매달려 가까스로 추락을 면한 지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친구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소민과 함께 허공에 떠 있던 하나 역시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뒤늦게 뛰쳐나온 김 반장은 제 앞에 펼쳐진 초현실적인 풍경에 당황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호는 뿌득 소리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악성 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