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팀에 속해 있던 치유 담당 헌터가 지호의 몸 상태를 봐 줬다. 과연 진짜 치유계는 달라서 임시로 상태만 잡아 놨을 때보다 훨씬 몸이 편해졌다.
“이쪽이 미등록 각성자? 반가워요. 하필 첫날에 각성해서 빼도 박도 못 하고 도망 다니겠네.”
“예, 예? 어, 예.”
“우리 팀에 서울지부 교육 담당관 있는데. 그 친구한테 미등록 각성자 맡겨요. 좀 쉬라고. 몸 상태가 말이 아니네. 저쪽 헌터는?”
“어쩌다 합류했는데 인천 쪽 헌터는 아녜요.”
지호는 말을 얼버무렸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물론 헌터도 아니고 인간은 더더욱 아니라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아무도 모르면 겉보기에 차이가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 소개하지 않는 도훈을 흘깃 본 예린은 콧방귀를 끼며 지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반반한 것들은 얼굴값 한다. 조심해요.”
“네?”
“물론 상황도 이렇고 헌터들이니까 피차 필요 때문에 뭉치긴 했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고요. 어린 친구 같아서 오지랖 좀 부렸어요. 필요 없는 꼰대 짓이었다면 미안해요.”
저 얼굴의 파괴력을 익히 알고 있는 지호는 하하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준영에게 기본적인 사항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서울지부 교육관 뒤로 참견쟁이 몇 사람이 끼었다. 각성자라면 이 정돈 알아야지, 나 때는 이런 것도 중요했어! 하는 경험이 녹은 이야기들이다. 준영의 정신이 쏙 팔린 것을 보고 예린도 그쪽으로 끼었다.
초심자에게 훈수 두는 고인물들의 향연이 이어지는 동안 도훈이 지호를 불러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냥 여기서 하죠? 하는 말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터들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제지 공장을 좀 돌아본다며 일어난 두 사람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준영이 찌르는 대로 파드득 반응하는 타입인 탓에 재미 들린 헌터들이 이쪽으론 눈도 돌리지 않은 까닭이다.
“할 말이 뭐예요? 뭐 숨기고 있는 거라도?”
“내가 설명했던 거 기억해? 일반 균열과 급성 균열이 다르다는 거 말이야.”
“괴물들의 소망이 쌓여 열린 거, 그러니까 괴물이 많이 모여서 생긴 게 지금 같은 일반 균열이란 거 말이죠. 네, 기억하죠. 그게 왜요?”
“내가 저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이쪽으로 부른 거야. 너희한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거든. 그중에 골치 아픈 거 하나가 근방에 있는 것 같더군.”
“감지계 능력도 있었어요?”
“그런 게 없어도 알 수 있어. 밖에 보여? 안 부서진 건물들 말이야.”
헌터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도훈은 줄곧 창문 주변에 머물렀다.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밖에 있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였을 줄은 몰랐다. 지호는 자기가 도훈을 충분히 오해하고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물었다.
“뭘 봐야 하죠?”
“전기가 끊어진 건물들. 크기가 큰 놈이 아닌 모양이야. 일대 전기가 전부 끊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뭐, 이번에는 전기라도 먹는 놈이에요?”
“아니야. 금속 먹는 놈이지.”
도훈은 싱긋 웃었다. 금속과 전기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순간 창문 밖 건물 하나에서 전기가 픽 나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 하는 놈이죠?”
“말 그대로야. 금속을 먹는 놈이야.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않지. 근데 일반 금속보다 너희가 만들어 낸 인공적인 금속들을 더 좋아하는 놈이거든. 그것도 전자 기기 종류를 말이야.”
“말도 안 돼. 저쪽엔 그런 게 별로 없잖아요.”
“맞아. 넘어가는 게 적지. 그래서 별미인 거야. 그걸 먹으려고 꾸역꾸역 이쪽에 들어왔겠지. 괴물들과 잘 부딪치지 않으려는 놈이라 균열에 들어오는 일이 자주 있진 않은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사방에 널린 곳 중에 이 공장만큼 큰 건물은 없다. 균열에 휘말리면 어둠에 숨은 괴물에게 당하는 일이 없도록 전기 스위치를 전부 올려 둔다. 덕분에 이 공장은 일대에서 가장 빛나는 건물일 터였다.
“당연히 이쪽으로 오겠네요. 밝으니까.”
“맛있는 게 많을 것 같겠지.”
“하지만 사람을 먹진 않는 거 아녜요? 인간에겐 위험하지 않다면서요.”
“사람 자체를 먹기 위해 공격하진 않지만, 너희 몸에 있는 금속을 먹으려고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어. 안 먹는 거지 못 먹는 게 아니니까.”
지호가 입고 있는 신형 전투복뿐 아니라 구형 전투복에도 일체형 장비들이 꽤 있다. 전투용이 아닌 것들도 있었다. 가끔 기록 저장용으로 캠이 달린 종류의 전투복도 있다. 지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뒤편을 확인했다.
“그럼 당연히 헌터들한테 말해야 하잖아요.”
“처음부터 말했잖아. 무슨 수로 알고 있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말할 건데? 너희 쪽에 보고된 정보도 아니야. 우리가 만났었다고 할까? 그럼 어떻게 무사했다고 말하게? 지금 네가 감고 있는 신형 기계들 봐. 놈이 엄청 좋아할 거라고. 만나자마자 너한테 달려들지도 몰라. 대처법 알고 움직일 수 있겠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지호의 표정을 본 도훈은 한숨 쉬며 꽤 먼 곳에서 꺼져 가는 불빛을 응시했다. 놈이 지나온 곳이 어둡게 이어져 검은 선처럼 보인다.
“여기 도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그사이 놈의 눈을 피해 숨을 장소를 찾아 옮기든가 해야 해.”
“준영 씨는 좀 쉴 필요가 있어요. 이동만 하는 거로도 저렇게 지쳤는데.”
“솔직히 나도 힘들어. 너처럼 튼튼한 몸이 아니거든. 하지만 좀 피곤한 쪽이 죽는 것보다는 나아.”
옳은 말이었다. 지호는 헌터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며 열띤 토론 현장으로 돌아왔다.
준영은 막 괴물과 마주쳤을 때 효과적인 도주 방법에 관한 속성 강의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정신계 중 환상 계열 능력자가 있는지 준영의 눈을 마주친 채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 그 눈에는 괴물 모습이 보일 것이다. 표정을 보니 당장 도망가고 싶은 얼굴이라, 헌터 일의 험난함을 알려 주는 역할로 의도치 않은 제 몫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저, 밖에서 이상 현상이 관찰돼서요.”
지호의 말에 여섯 사람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창문을 가리켰다.
“시가지에서부터 이쪽으로 건물 몇 개가 정전되어 있어요. 그리고 보던 중에 하나가 또 꺼졌고, 공교롭게도 이쪽으로 저 정전이 이어지려는 것 같아서요.”
정확한 타이밍이다. 지호가 설명하며 모두가 창밖을 내다본 그 순간, 정전 상태가 아니었던 어느 작은 상가 불빛이 툭 꺼졌다. 도훈이 말한 것보다 속도가 빠르다. 어쩌면 저걸 발견하자마자 곧장 지호에게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표정이 단번에 굳는다. 풀어진 채 여기저기 기대어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노련한 헌터들이라 다행이다. 그 와중에 준영만 공포에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저, 저게 뭐죠?”
“괴물이겠죠. 눈에 보이는 종류면 좋겠네요. 투명한 건 초면에 마주치기 너무 까다롭거든요.”
예린이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방벽 담당을 돌아보았다. 방벽을 두껍게 하자 밖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방벽을 투명하게 하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고, 꼭 시야를 유지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에너지 쓸 이유가 없긴 하다. 그러나 지호는 좀 더 밖을 보고 싶었다. 놈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청하진 않는다. 지호 혼자 있는 것도 아닌 탓이다. 무모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건 헌터가 할 짓이 아니기도 했다.
문득 떠오른 주변 사람들의 걱정하는 얼굴에 더더욱 생존 의지가 불탔다. 한때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가 다치거나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많았다. 고작 호기심 때문에 위험에 섶 진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는 없어졌다는 뜻이다.
“하나 더 꺼졌어요.”
눈에 힘을 집중한 감지계 능력자가 경고한다. 저 방법이 있었구나. 지호는 얼른 그를 따라 에너지 배분을 바꿨다.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건물 불이 꺼졌다. 아마 공장 사람들이 쓰던 기숙사일 확률이 높았다. 층고 낮은 아파트에서 소란 이는 게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게 보인다. 사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음은 이쪽이겠네요.”
지도를 확인하자 멀지 않은 곳에는 다른 헌터 팀의 신호가 없었다. 경계에서 그렇게 먼 지역은 아니다. 처음에는 경계 부근에 있다가 안정기가 오는 대로 준영을 내보낼 계획이었던지라 방향을 이쪽으로 잡았었으니까.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하는 놈인지 보고 싶어요. 도망 가능한 위치에서 정찰합시다.”
“어차피 낮이니까 불이 좀 꺼진다고 어두워지진 않을 거예요.”
사방에서 의견이 튀어나왔다. 예린은 의견을 수합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팀 운용 방식을 정했다.
“좋아. 퇴로 준비한 상태에서 마주해 보자. 상대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튄다. 이지호 헌터, 염동력 가능자였죠?”
“네. 하늘로 빠지나요? 밖에 날아다니는 놈들이 좀 있는데.”
예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근방에 몸 숨길 곳 없이 무너진 지역의 단점이다. 여길 포기하면 갈 곳이 없다니.
“그럼 위로 날아가는 건 자살행위겠네요. 최대한 잔해에 붙어서 움직이죠. 이동 능력자 요청해 놓고요.”
“안전 구역이 아니라서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싸우는 수밖에.”
앳된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이 지호에게마저 옮아왔다. 방벽 담당이 갑자기 앗, 소리를 내며 휘청인다. 충격이 몸으로 오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었다. 뭔가가 공장 건물로 침입하려 시도하는 거다.
“힘 빼지 말고 방벽 사이즈 줄여.”
“괜찮을까요?”
“뭔지도 잘 모르는 거랑 힘겨루기하다 지치는 것보단 낫지.”
“저도 방벽 칠 수 있어요.”
“지호 씨야 유명해서 알지만 괜찮아요. 비상시 전투 인력으로 열외예요. 그쪽 헌터분은 능력이?”
“당장 필요한 전투 인력은 아닙니다.”
도훈이 순순히 존댓말로 답하자 지호의 얼굴에 의외란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예린은 더 묻지 않고 신체 계열 헌터에게 준영을 맡겼다. 그가 염동력까지 가능하니 여차하면 준영을 데리고 다른 팀으로 지원을 갈 수 있을 거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저, 저는 뭘 할 수 있죠?”
“뭘 봐도 소리 지르지 않고 얌전히 있는 일이요. 생각보다 어려워요. 비명은 종종 의지를 배신하고 튀어나오거든요.”
준영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었다. 그러나 그를 달랠 상황이 아니다. 지호는 감지 파장을 펼칠까 말까 고민하다 힘을 자기 안으로 갈무리했다. 놈이 만약 이걸 감지할 수 있는 종류라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질 터였다. 한때는 주변을 훑는 것이 당연했던 전투 방식은 보다 더 복잡해진다. 이제는 상대의 반응까지 예상해 가며 머리를 써야 했다.
건물 전체에 방벽을 칠 수 있었던 방벽 담당은 한숨과 함께 그 크기를 일행들을 덮을 사이즈로 축소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건물의 전기가 툭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