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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28화 (129/260)

128화

균열에서야 익히 아는 종류의 괴물들이 많았으나 이쪽에서는 아니었다. 생경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와, 이름 부르기는커녕 모든 걸 괴물이라고 통칭할 수밖에 없던 시간들. 드디어 다시 이름 아는 것들이 등장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디코이가 켜졌다. 혹시 균열에서 만나던 것과 다른 종이면 어쩌나 싶어, 지호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만든 지진이 더해졌다. 소음에 흔들림. 해삼의 촉수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녀석은 진원과 소음원을 쫓아 거체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의 몸이 앞으로 구르기 시작한 시점이 주원이 움직일 타이밍이었다. 해삼이 움직이자 몸에 가려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크기가 크지 않아 약간만 큰 괴물이 나타나도 못 쓸 것 같은 생김새였다. 괴물이 역으로 빠져나갈 걱정을 했던 걸까?

괴물이 느릿하게 굴러간 자리로 주원의 에너지가 움직였다. 지호는 자기를 향해 굴러오는 해삼을 보며 바짝 긴장했다. 촉수가 길다. 어디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긴 어렵다. 놈에 대해 안다고 상대할 수 있단 보장은 없었으니.

첫 타격은 위에서부터 정직하게 아래로.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하자마자 그것이 유연하게 다리를 감으려 움직였다. 지호는 민첩하게 날아올랐다가 코앞까지 굴러온 놈의 다른 촉수들과 마주했다. 방벽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지호의 몸을 후려치는 짧은 촉수들.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끄트머리에 달려 있다. 접근해 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근접해서 부딪칠 때가 더 위험한 놈인 것 같았다.

방벽이 위태로울 정도까지 얇아진 다음에야 물러난 지호는 주원의 에너지가 다시금 임시 캠프에서 잡히는 것을 느끼자마자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건물 오 층 높이 이상으로 날아오른 몸을 쫓아오던 촉수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멈췄다.

타이밍 좋게 디코이가 다시 소음을 쏟아 내며 울렸다. 해삼의 촉수가 위아래로 흔들리다 저쪽 편으로 움직였다.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지호는 천천히 캠프 쪽으로 이동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마음은 담담했으나 몸은 떨림이 심했다. 체력이 한계에 부닥쳤다. 이러다 에너지 보유량을 초과할 만큼 사용하고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이형 에너지 방벽 없이 저놈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다행히 주원이 빠르게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넘어갔다. 다음은 지호 차례였다.

이 문마저 넘어가지 못하면 어쩌지.

덜컥 든 걱정을 옆으로 밀친 채, 그는 캠프에 나타난 주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주원은 날아온 지호에게 손을 얹으며 곧바로 이동했다. 박 팀장 못지않은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도착한 균열 코앞. 발발 떨며 걸음을 떼었다. 다행히 다시 저쪽으로 넘어가는 일이 없다. 전신에 색이 돌아왔고, 부근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진한 색감을 주장하며 눈을 어지럽혔다.

됐다. 돌아왔다. 지호가 통과하기 무섭게 연구원이 스위치를 내렸다.

“이지호 헌터!”

문밖에서 대기 중인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몇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본 몇몇이 달려왔다. 부족한 치료 능력으로는 피만 멎게 해 두는 게 고작이었다. 상처가 남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팔 한두 짝 날아간 것도 아닌데 피부 위 상처가 뭐 그리 대수라고.

녹색 빛이 과다하게 끼얹어져 몸이 순식간에 노곤해졌다. 선 채로 잠들 수도 있을 것처럼 몸이 이완된다.

팀원들과 선발대는 애매하게 서 있다. 그들을 체포할 권한 있는 사람들은 여기 모인 협회 측 연구원들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신고했을 것이고, 헌터 경찰 측에서 사람이 오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돌아왔군요. 진짜 다행이에요. 역시 하늘은 선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지. 이지호 헌터가 돌아올 줄 알았어요. 이걸 꺼 버리자는 놈들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고요.”

“왜 여기 있어요?”

“우리 팀 정도는 되어야 이걸 낱낱이 분석할 수 있으니까 그렇죠. 특히 저 같은 특출난 재원만이.”

피곤했다.

여러 가지로 피곤이 겹쳤지만, 양 박사의 얼굴을 보자 피로감이 배가 되었다. 지호를 걱정하는 듯 말하다가도 또 자화자찬으로 넘어가는 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호는 툭 말을 뱉었다.

“저쪽에서 실종자들 무리와 만났어요.”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호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선발대 그룹은 핏발 선 눈으로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연구 팀 역시 당황해서 입을 다물 뿐이다. 바깥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데려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데려와서도 안 될 것 같았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복잡해요. 협회 통해서 발표할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우선 다른 실종자 가족 그룹들에게 알려 줄래요? 이런 위험한 실험들을 진행하면 남은 가족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혼란을 가져오지 말고 좀 쉬게 해 달라고요. 진짜 한계예요.”

마지막 말은 헌터들의 처지를 대변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인 몸 상태에 대한 보고이기도 했다. 계속 이어지던 녹색 빛이 느리게 전신을 휘감으며 상처를 회복시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당장은 수면이 절실했다.

“혹시 저쪽 편에 각성자나 헌터들이 남아서 실종자들을 지키고 있는 겁니까? 살아 있다면 그런 형태로 목숨을 부지할 거라고들 예상했거든요.”

양 박사의 흥분한 목소리가 지호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그가 헌터를 향해 보이는 과도한 찬양은 언제나 꺼려진다. 오로지 희생 자체를 숭고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미리 말해 두지만, 좋은 소식은 아녜요.”

“데려오지 못했단 사실 때문에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아니면 한두 사람이라도 동행했겠다 싶어서요.”

“제가 무슨 산책 다녀온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저 살기도 급급했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챙겨요.”

“하지만, 헌터잖습니까?”

이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지호는 침묵과 함께 양 박사를 한참 노려보았다. 둘 사이가 살얼음판 걷는 듯 살벌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연구원들은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시선들을 돌릴 뿐이었다.

“우리는 그쪽이 머릿속에서 환상처럼 추종하는 숭고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아녜요. 기회만 되면 당신을 제일 먼저 버리고 튈 거라고요.”

“그때는 또 그럴 만한 상황일 수밖에 없겠죠. 이 두뇌를 잃는 건 인류에 큰 손실이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날이 온다면 저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짜 입만 살아서.”

양 박사 곁에서 지호의 눈치를 보고 있던 호위 담당 겸 연구 보조 송한결만이 매번 어쩔 줄 모를 뿐이다. 언젠가는 저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말리라. 지호는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지금은 화풀이할 힘도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헌경에서 사람이 나왔다. 선발대는 차례차례 끌려갔으나 처음 그들을 도울 때 약속했던 것처럼 순순히 잡혀갔다. 언제 사라졌나 모를 이주원 각성자를 제외한다면 일곱 명 모두 반항 없이 붙잡힌 셈이다.

지호는 헌경 차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죽은 듯이 잠들었다. 두어 시간 지난 후에 누군가 몸을 흔들어 일어나 보니 센터였다. 그를 둘러싼 헌터 무리가 이상할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다.

“뭐야……. 뭐 사건 났어요? 왜들 나와 있지…….”

“내가 분명 혼자 행동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언제부터 부천 센터 휴게실 간이 소파에 누워 있던 걸까. 그리고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보현은 왜 여기 와 있는 것이고. 몸은 다 나았나? 지호는 멍한 머리를 탁탁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언니, 벌써 퇴원했어요?”

“지호 씨 실종되고 이 주가 지났어요.”

“그것밖에 안 지났어요? 몇 년 지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걸 말이라고 지금…….”

보현의 표정은 복잡했다. 모인 헌터들 역시 비슷했다. 경계 너머로 갈 수 있는 첫 번째 헌터에 이어 균열 소멸에 휘말려 사라졌다가 돌아온 최초의 헌터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을 터였다.

“제가 넘어갔던 방법이 괴물들이 쓰는 방법이라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당연하죠. 그것들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방법을 알고 있던 거면 진작 넘어와서 깽판 부리고 한층 더 난리들 났을 텐데요. 아마 언니 방법이랑 제 방법이 다른 것 같아요. 역시 어깨너머로 남의 기술 훔치면 안 된다니까…….”

평소 같은 보현식 농담에 웃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호는 다른 사람들의 무거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눈치를 살폈다. 뭔가 큰일이라도 있었나.

“아무도 그렇게까지 무리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자꾸 몸을 던져요. 진짜로 큰일 날 뻔했잖아요. 전양련의 불법 실험 없었으면 돌아오지도 못했을 거고.”

보현의 음성이 차가웠기에 지호는 얌전히 눈치를 살폈다. 농담할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도 압박으로 다가왔다. 끙끙거리던 지호는 우선 사과부터 했다.

“아니, 어. 죄송합니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금방 갔다 오면 되는 계획이었잖아요.”

“혼자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적어도 나한테 이야기라도 했어야 했어요. 내가 직접 임무를 들어가진 못해도 백업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언니 몸으로요? 그런 걸 부탁할 순 없어요.”

“지호 씨가 죽는 것보다는 내가 조금 무리하는 게 나아요.”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잖아요.”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정말 다행히도요. 어차피 협회에 보고할 건데, 실종자들이 아직 많이 살아 있대요. 그걸 살아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요.”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돼요. 협회에 정식으로 보고 올리면 알아서 보고서 읽어 볼 거고요. 지금은 말 돌리지 말고 혼날 시간이에요.”

“언니 헌터도 아닌데 누가 들여보내 줬어요?”

“박 팀장요. 헌터인 나한테는 혼날 수 있고, 헌터 아닌 내 말은 듣지 않겠다 뭐 그런 건가요?”

“아니, 아니요. 그런 말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냥 센터에서 언니를 보니까 혹시 무리할까 봐 걱정이 돼서.”

누군가 코웃음 쳤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지호도 말하고 나니 좀 적반하장인 것 같아 얼굴을 붉힐 정도의 말이었다.

그러나 보현은 웃지 않았다. 한참 지호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일로 지호 씨를 영영 잃게 되었다면 나는 내 힘없음을 후회했을 거예요. 더 빨리 낫지 못한 몸 상태를 원망했을 거고. 돌아와 줘서 기뻐요. 이렇게 무리할 줄 알았다면 좀 더 강하게 헌터 아닌 다른 일을 권유했을 거예요. 지금도 그 심정은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지호 씨가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면 월권이 되겠죠?”

“지호 씨는 각성자 연합에서 뭐 만들라고 시켰으면 진작 때려치우고 나왔을 거예요.”

곁에 서 있던 차나연이 말을 거들며 까르륵 웃었다. 보현은 동의하며 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들 그런 지호 씨를 알아서 더 걱정해요. 다른 일 할 사람도 아니고 헌터가 천직인데, 또 이렇게 위험에 혼자 뛰어들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정식 파트너가 없으니 더 그렇죠. 있던 임시 파트너는 너무 바쁘고요. 말을 해도 안 들으니까, 한 번 더 무리하면 지호 씨 임무 제가 가요.”

“아니, 언니는 몸이…….”

“저 무리하게 하지 마요. 알다시피 종잇장처럼 약해졌으니까. 다들 걱정해서 하는 말이고, 한마디씩 하려고 기다리는 거예요. 제 차례 끝났으니 다른 사람들 걱정 받아요. 그리고 정말, 돌아와 줘서 기뻐요.”

보현의 손이 지호의 어깨를 힘 있게 주물렀다. 그 뒤로 하나와 지윤, 소민의 얼굴도 보였다. 함께 훈련하고 팀을 이뤘던 헌터들과 센터 사람들도.

그들 하나하나의 걱정 어린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던 지호는 결국 새빨개진 얼굴을 소파에 파묻었다.

아무도 없어 외롭다고 생각했던 긴 밤들과 달리,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아주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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