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가슴이 철렁했다. 도훈에 관한 이야길 들은 적이 없을 텐데도 보현의 추측은 사실에 근접했다. 물론 모든 괴물이 도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훈이나 준우를 비롯해 강해 보이는 괴물들을 볼 때 인간을 좀 더 많이 먹은 괴물들이 더 똑똑해지는 건 부정하기 어려워 보였다.
지호가 입을 열지 않는 걸 어떻게 오해했는지 보현은 웃으며 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말 통하는 놈 중에 좋은 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요.”
좋은 놈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좋았으면 싶은 놈은 있다. 도훈의 얼굴을 떠올린 지호는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그, 저, 다른 코드 레드 개체도 있었잖아요. 도플갱어.”
“어, 맞아. 그놈에 관해선 저도 별로 아는 게 없는데.”
“그쪽에서 접촉해 왔어요. 진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줬는데, 대신 이쪽으로 넘어오고 싶대요. 언니 말처럼, 사람을 많이 먹어서 자기를 사람처럼 느끼는 것 같았어요.”
보현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도플갱어에 관해선 할 수 있는 말이 많지는 않았다. 도훈이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보현은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걸 믿는 것도 믿지 않기도 어렵네요. 우선 저쪽에서 제공해 준 정보가 너무 유용하고,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었단 게 마음에 걸려요.”
“진짜 여기로 넘어오고 싶은 건 아닐까요?”
“지호 씨가 걱정하는 것처럼, 넘어온 다음에 본색을 드러낼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니 안 되겠어요. 그런 방법은 알아내도 폐기해요.”
“가끔 넘어오는 것들도 있긴 하잖아요. 일전에 균열 넘어오는 괴물들이 있어서 억지로 균열을 닫아서 사고를 막은 적이…….”
“뭘 했다고요?”
이번엔 보현이 놀랄 차례였다. 그러고 보니 그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할 필요가 있었다. 지호는 자기가 꼬리 잡은 전양련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실종자 가족을 찾는 극단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느릿느릿 풀어놓았다.
그 이지호 헌터에게 면회 시간 끝났으니 나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배짱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둘은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대화할 수 있었다.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풀어놓는 과정에선 약간의 변주와 해석이 섞였다.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을 들을 때마다 보현이 지호의 말을 중단시켰다. 여기서 정말 그랬느냐? 하는 질문을 들을 때면 지호 역시 멈칫했다. 자기 일을 객관적으로 보는 건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경계 너머로 끌려갔을 때 전직 헌터의 기억을 가진 괴물로부터 이쪽에 내통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자마자 균열이 사방에 뚫리고, 흔적을 쫓으니 그 범인들을 발견한 거죠? 누가 짜 맞춘 것처럼 딱딱 떨어지네요.”
“이것부터 그쪽 수작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요. 그 전직 헌터의 기억을 가진 괴물이 좀 의심스럽긴 하네요. 뭐 하는 새끼일까.”
언니가 찾던 새끼예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턱 막힌 듯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현에게 그 이름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 것만으로 보현은 직접 움직이고 싶다며 몸을 풀었다.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당장은 요양에 요양이 필요한데.
“처음에 저를 여왕의 호위대니 뭐니로 불렀어요. 그땐 착각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만난 도플갱어도 저를 그렇게 부르는 걸 보면 제가 각성할 때 여왕의 호위대란 것에 영향받은 모양이에요. 그 뱀 같은 놈들……. 그게 여왕의 호위대 중 하나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잘된 거겠죠.”
“이형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는지 그것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몸을 회복시켜 주는 에너지는 없대요?”
“치유계 능력 백 번 받아도 언니가 백한 번 균열에 들어가면 다 쓸데없는 거예요. 알죠? 병원에서 괜찮다는 말 나올 때까지 쉬시기예요.”
“누구랑 다녀서 이렇게 잔소리꾼이 다 되었담. 알겠어요. 그래서, 다른 데 못 할 이야기는 이게 다예요?”
보현이 쓰러져 있던 동안 지호가 영웅이 되었던 계양 균열 이후의 이야기도, 무수히 반복했던 훈련들도, 정체 모를 집단과 그들을 쫓던 날들도 사실은 중요하다고 할 순 없다.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나누었던 이야기니까. 심지어 깨어나지 못하는 보현을 앞에 두고 몇 번이고 되새겼던 내용이니까.
지호는 제일 중요했던 이야기를 끝끝내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언니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그리웠나 봐요.”
“싱겁게. 사람이 좀 아플 수도 있지, 안 그래요? 엄살 부리면 안 되겠네. 얼른 일어나야지.”
슬그머니 들어와 주사를 관에 찔러 넣은 간호사는 호들갑 떠는 보현에게 경고했다.
“아서요. 한참 멀었어요. 수면제 넣었으니까 주무세요. 면회자분도 슬슬 나가시고요. 편의 오래 봐드린 거 아시죠? 이지호 헌터님이어도 다음엔 시간 지켜 주세요.”
지호가 병원에 있을 때 그를 담당했던 간호사다. 야간 담당인 모양이었다. 밖을 보니 어느새 훅 어두워져 있다. 겨울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시간이 늦은 거였다. 지호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다음에는 일찍 올게요.”
“아니지. 다음에는 입원하지들 마세요. 두 분 다 무리하지 말고요.”
지호와 보현은 둘 다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도무지 말할 수 없는 사고뭉치들. 지호는 또 올게요, 하고 인사한 뒤 나가려다 문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아, 언니 정신계 능력 개화한 거 있어요? 나중에 능력이 트이는 일도 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예요?”
“아니, 언니 쓰러진 다음에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언니가 한밤중에 집에 찾아왔던 적이 있거든요. 처음엔 왔다 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병원에서 벗어난 적이 없더라고요. 근데 그때 언니랑 한참 이야기했었어요. 평소의 언니였고…….”
“아뇨. 정신 계통 능력이 없는 건 아닌데, 뒤집어 보고 다시 봐도 몸 놔두고 의식만 이동하는 방식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요. 그쪽 능력은 사용할 일도 많지 않아서 저라도 훈련이 안 되어 있거든요. 진작 해 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 후회할 일들을 겪었을 리도 없고.”
후회할 일들이란 말에 담긴 함축적 의미가 너무 무거웠기에 지호는 착각했나 보다고 황급히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기대선 지호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환상이었을 리 없다. 그걸 꿈으로 꿨을 리도 없다.
지호는 그 밤 보현이 말해 주기 전까지 괴물에게 총이 먹히느니, 국내에 불법 총기가 판을 치느니 하는 이야기에 관해선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꿈을 꾸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그게 지어낸 것이 아닌 현실에 대한 것들이라면 더더욱.
그 밤, 지호의 방에 나타났던 보현과 했던 말이 뭐였더라.
조심하라는 것. 사소하지만, 몰랐던 상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지호가 추적했었던 정체불명의 집단에 대한 정보들이었던가.
지호는 그가 찾는 것들을 빠짐없이 협회에 보고해 왔다. 그러니 누군가 굳이 그 밤 보현으로 위장해 지호를 찾아와야 했다면 필요한 건 협회보다 앞선 정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쪽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전양련의 수상한 짓거리를 포착하긴 했지만, 지호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쫓던 그 패거리와 전양련이 같은 곳일 거라고 짐작할 순 없었다. 애초에 뒤에서 정보를 받아 자기들 나름의 사고를 쳐 대는 집단은 생각보다 많았으니.
지호가 알아냈던 정보를 제일 먼저 필요로 해야 했던 자들. 들켰던 자들이나 그와 연관된 사람들 정도일 것이다.
이미 보현과 의논하고 나온 상황이다. 심지어 자신으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접촉자. 당연히 각성자일 테고 추측건대 정신계 능력자일 텐데 김 반장을 제외한 정신계 능력자는 아는 사람이 없어 더더욱 곤란했다. 애당초 다른 계열 능력자들과 달리 정신계 능력 보유자는 자기 능력을 구구절절 퍼트리고 다니지 않기도 하고. 끽해야 정신 방벽 정도나 공개되어 있을까? 김 반장이 예외적인 경우였다. 다들 꺼리니까 더더욱 그렇다. 아무런 능력 없는 척, 공격 방어할 힘 정도나 있는 척 숨기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지…….’
박 팀장이 정신계 능력자, 그중에서도 김 반장을 배척하는 이유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박 팀장이라면 김 반장 외의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고서, 지호는 박 팀장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연락하기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일전에도 늦은 시간에 소식을 주고받긴 했지만, 그래도 균열 닫히고 얼마 안 되었으니 오늘 정도는 푹 자고 싶을 것이다.
결정에 걸린 시간은 몇 분 남짓이었다. 헌터 공통 채널을 쭉 훑어 박 팀장이 보고를 올린 시각을 확인했다. 여섯 시 이후로 쭉 조용하다. 역시 오늘은 쉬게 두는 편이 좋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양련 같은 놈들이 언제 설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지호에게도 마찬가지로 휴식이 필요하긴 했다.
아직은 홀로 들어가는 빈집. 때마다 와 주시는 도우미 이모님이 아니었다면 집 꼴이 엉망이었을 것이다. 쓰러진 보현의 통장에선 온갖 자동 이체가 쭉쭉 빠져나가고 있겠지.
지호는 그 수혜를 누리며 매번 아무도 없는 집에다 인사를 하며 들어가곤 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잘 준비를 마치고 마석 치료기 스위치를 올리며 마정석 필터가 거의 다 닳았음을 알았다. 이건 남에게 맡길 수가 없는 부분이다. 어딜 가서 구해야 하지. 빛을 쐬며 단톡방에 질문을 올리자 아직 잠들지 않은 지윤에게서 답이 왔다.
[장지윤 : 오잉? 지호 씨 부자 됨? 개인용 마석 치료기라니! 정식 헌터 진짜 벌 만큼 버나 보네여.]
[이지호 : 제가 산 건 아니고 임보현 헌터님 거죠. 근데 쓰긴 제가 다 썼네요……. 이거 채워 놔야겠죠?]
[장지윤 : 임 헌터님한테 물어보면 안 되는?]
[이지호 : 이걸 다 쓸 만큼 무리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아서요.]
[장지윤 : 흠, 고민이네. 잠만여.]
네 사람 중에 정식 헌터가 되지 못한 건 하나뿐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지 여태 파트너를 찾지 못했다. 지호와 합을 맞추기엔 두 사람 특화 능력이 겹쳐 불가능하다. 덕분에 이 사람 저 사람과 팀을 이루어 본 하나는 넷 중에 제일 발이 넓은 편이었다.
같은 센터에다 같은 기숙사를 쓰기까지 하니 지윤이 하나를 불러 물어본 모양이다. 숫자 1이 더 사라지고 하나가 채팅창에 나타났다.
[강하나 : 마석 치료기? 어디 제품인데요?]
[이지호 : S사요.]
[강하나 : 아, 역시 임 헌터님 정도 되면 정품 쓸 줄 알았어요. 정품이면 아무 데서나 사도 다 호환될 건데, 우리 센터에서도 살 수 있을걸요? 정식 헌터 할인 붙는대요.]
정식 헌터 되어서 돈 좀 벌면 사려고 했던 것들이라며 하나가 주르륵 링크를 보냈다. 인터넷으로도 마정석 물품을 살 수 있다니! 온갖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지호는 충격을 받았다. 지윤이 폭주하는 하나의 말풍선 사이에 쏙 끼어들었다.
[장지윤 : 임보현 헌터 깨어났다면서여? 현장 복귀하시려나?]
[이지호 : 아뇨. 절대. 아니 애초에 은퇴하셨잖아요. 균열엔 다시 안 들어가실 거예요.]
[장지윤 : 파트너 할 거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갑자기 뭔 심경의 변화?]
지호는 핸드폰을 쥔 채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넷이 얼굴 본 지도 오래됐다. 각자 균열에 파견되어 사방팔방 뛰어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소민은 뻗은 것 같고, 하나와 지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했을 것이다. 지호는 그간 있었던 많은 것들을 전부 이야기하진 않았다.
[이지호 : 균열에 더는 들어갈 수 없을 거래요. 너무 많이 약해져서. 다들 적당히 장비들 챙기고, 돈 벌면 진짜 그거부터 사요. 이번에 새로 나오는 거.]
[장지윤 : 악, 그거 너무 비싸던데. 그거 말하는 거져? 이번에 각성자 연합 신제품.]
[이지호 : 신체 계열 아닌 사람들한테는 필수일 것 같더라고요. 신체 계열은 붕괴가 좀 느리잖아요.]
[강하나 : 아씨, 파트너 삼을 사람 진짜 없네요. 왜들 이렇게 상성이 안 맞는 거야. 내가 마음 같아선 확 단독 활동했다. 지호 씨, 그래서 균열에서 겪은 일은 언제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장지윤 : 없는 시간도 빼겠음. 훈련 농땡이 칠 용의 있음.]
[강하나 : 너는 농땡이 좀 그만 치고 인체 수업 좀 착실히 들어.]
[장지윤 : 아니 시바뮤ㅠㅠㅠ 내가 그런 머리 있었음 진작 의대 갔지. 인제 와서 안 되는 머리로 그런 거 공부하고 있으니까 뒤질 것 같아여. 살려 줘라.]
[이지호 : 사람 살리려면 이 정돈 알아야 된다고 뻐기던 언니 어디 갔죠.]
[장지윤 : 걔는 없어ㅠㅠ 균열에서 저기로 넘어감여. 나 구현화 빡세게 훈련할 자신 있으니까 응? 봐주라. 봐주세여. 팀에 넣어 주세여 계양의 새 영웅님아!]
[이지호 : 악 그렇게 부르지 마요.]
토독토독 화면 두드리며 수다 떠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방금 보낸 대화 말풍선이 날짜 변경을 알리며 00:00으로 찍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